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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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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종교/풍속-민속 | 자부-의가류
· 작성주체 허임(許任, ?-?)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無匡郭, 無界, 10行 20字, 無魚尾 ; 27.1 X 17.5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1.4

안내정보

선조(宣祖)에서 광해군(光海君) 시기에 활약했던 침의(鍼醫) 허임(許任)이 저술한 침구전문서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허임은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 침구학 뿐 아니라 동아시아 침구학 전반에 지형적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본서는 중국 침구학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중국 침구학을 자신의 임상 경험에 비추어 변형시키고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연원하는 침술을 이어받은 기반 위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임상경험들을 덧붙여 완성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침구학 지식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의 침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그의 생몰년에 관하여는 1570년(선조3)-1647년(인조25)이라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정확하지는 않으며 출생지도 미상이다. 다만 전라도 나주(羅州)에 있는 집에 내려가 있었다는 『실록(實錄)』의 언급으로 미루어볼 때 고향이 나주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출신에 대하여는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물인 『실록』에 따르자면 그는 천민 출신이며, 그의 부친 허억복(許億福) 혹은 허억봉((許億逢, 許億鳳)은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였으며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실록』 곳곳에 그의 출신을 문제 삼아 그가 받은 직책이 과분하니 거두어 달라는 간언(諫言)과 함께, 임금이 그의 재능을 아껴 출신에 비해 높은 직위를 계속해서 부여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악공이었으며 관노였다는 것은 그의 선대가 양수척(揚水尺)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서 서문 말미에 보이는 “河陽 許任”이라는 언급에 주목해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를 살펴보면, 대종분파(大宗分派) 21세손으로 허락(許珞)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으며, 묘는 공주군 우성면(牛城面) 한천리(韓川里)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신분 상승 후 후대에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록』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면 아래와 같다.
1570년(선조3) 경 : 관노이자 악공인 부친 허억복(許億福), 혹은 허억봉(許億逢, 許億鳳)과 사비였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다.
1593년(선조26) : 선조의 서남행시에 수행하여 11월에는 해주에서, 12월에는 삼례역(參禮驛)에서 3일 간격으로 침 치료를 시행하다.
1598년(선조31) : “鍼醫 許任”이라는 호칭이 『실록』에 처음 보임.
1600년(선조33) : 고향으로 물러나다. 침을 잘 놓아 일세에 이름을 알린 자로 언급됨.
1604년(선조37) : 9월 23일. 선조의 갑작스러운 편두통에 야간 입시 진료하다. 아시혈(阿是穴)에 대한 평소 허임의 견해를 허준이 언급함. 10월 23일.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포상을 받다. 6품의 직에서 당상(堂上)으로 전격 승진하다. 당상관의 가자(加資)의 지나침을 간쟁하는 신하들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1606년(선조39) : 4월 26일, 29일, 5월 2일, 4일, 6일, 연속 다섯 차례에 걸쳐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南), 이명원(李命源)과 다른 침의였던 남영(南嶸), 김영국(金英國) 등과 함께 입시하여 침치료를 하다.
1609년(광해군1) : 새로 즉위한 광해군에게 재능 및 공로를 인정받아 마전(麻田) 군수(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곧 물러나 실첨지(實僉知)에 임명되다. 당시 모친을 봉양하며 궁핍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임.
1610년(광해군2) : 3월 12일. 전라도 나주의 집에 머물러 있었으며 상경하라는 전교(傳敎)를 받고도 따르지 아니한 것으로 보임. 3월 13일. 허임의 몸에 전부터 중병이 있었던 것이 언급됨.
1612년(광해군4) : 서로(西路)에서 남하할 때 호종했던 공로로 가자를 받다. 9월 21일. 1593년(계사년) 선조의 서남행시에 수행하며 침치료를 한 공로로 3등 녹훈에 수록된다.
1614년(광해군6) : 내국의 의관에 속해 있음. 궐문 밖에서 대기하다 필요시에 입시함.
1615년(광해군7) : 11월 28일. 광해군이 허임을 경기와 가까운 곳의 수령으로 임명할 것을 지시하다.
1616년(광해군8) : 1월 23일. 영평현령(永平縣令)에 제수되다. 11월 27일. 여러 해 동안 입시하여 침치료를 한 공로로 자급을 더해 받게 되다.
1617년(광해군9) : 2월 12일.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다. 2월 18일. 허임이 천출이라는 이유로 사헌부가 왕에게 직위의 교체를 잇달아 간청하였으나 광해군이 받아들이지 않다. 3월 9일.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제수되다. 6월 21일. 임금에게 침을 놓고 인사하고 임지로 돌아가다.
1619년(광해군11) : 11월 23일. 의약인들에 대한 대대적 포상이 있었고 이 때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다. 12월 13일. 노모의 병세가 중해져 자급을 더해 받다.
1622년(광해군14) :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다.
1623년(광해군15) : 2월 19일. 의관들의 경솔한 행위에 광해군의 질책이 있었으며 다른 어의 및 침의들과 함께 문책을 받고 녹(祿) 1등이 감봉됨.(『실록』 기록은 이곳까지임)
1644년(인조22) : 『침구경험방』을 간행하다.
1647년(인조25) 경 : 졸하다.
구성 및 내용
본서에는 『침구경험방』 전체가 순서대로 필사되어 있고, 그 뒤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春風堂記」, 「喚醒說」, 「江山辨」이 필사되어 있는데, 필사 상태로 보아서는 동일인에 의한 필사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침구경험방』의 구성 및 내용에 대한 소개를 개괄하도록 한다.
『침구경험방』은 크게 서문, 전반부(총론에 해당함), 후반부(각론에 해당함), 발문 등 네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그 내용을 적시하면 아래와 같다.
서문 : 본서에는 서문임을 지시하는 말이 없이 권수제 아래에 곧바로 서문이 시작된다. 허임은 서문에서 책의 저술동기와 편집방향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견지하고 있는 의학관, 병기 및 경락, 보사법 등 핵심적인 침구이론을 요약하고 있다.
전반부(총론) : 침구학의 기본 이론 가운데 임상과 관계가 깊은 내용을 실용적으로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그 항목은 다음과 같다. 「訛穴」, 「五臟總屬証」, 「一身所屬臟腑經」, 「五臟六腑屬病」, 「十二經抄穴」, 「鍼灸法」, 「別穴」, 「募·原·會穴」, 「十二經井滎兪經合傍通」, 「折量法」.
후반부(각론) : 병증문별 임상침구처방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항목은 다음과 같다. 「頭面部」, 「耳部」, 「目部」, 「口部」, 「鼻部」, 「咳嗽」, 「咽喉」, 「頰項」, 「齒部」, 「心胸」, 「腹脇」, 「腫脹」, 「積聚」, 「手臂」, 「腋腫」, 「腰背」, 「脚膝」, 「諸風」, 「癲癎」, 「厥逆」, 「急死」, 「痢疾」, 「痔疾」, 「陰疝」, 「五痳陰痿」, 「霍亂」, 「瘧疾」, 「虛勞」, 「勞瘵」, 「食不化」, 「黃疸」, 「瘡腫」, 「瘰癧」, 「蠱毒」, 「眠睡」, 「瘀」, 「消渴」, 「汗」, 「傷寒瘟疫」, 「大小便」, 「身部」, 「嘔吐」, 「婦人門」, 「小兒門」, 「鍼灸擇日」.
발문 : 간행배경 및 간행의 의의를 설명하였다.
서지적 가치
『침구경험방』은 우리나라 침구학을 대표하는 서적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수차례 간행되어 유포될 만큼 영향력이 지대했던 서적이다. 때문에 규장각만 살피더라도 木版本(奎 4492, 奎 4493, 奎 6797), 戊申字本(奎 809) 뿐 아니라 다양한 필사본까지 남아 있는 상황이며, 후대에는 현토를 붙인 책(한국한의학연구원 소장)까지 나왔다. 이 모든 상황이 『침구경험방』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는지를 지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침구경험방』 전체를 필사하고 그 뒤에 「春風堂記」, 「喚醒說」, 「江山辨」 등 『침구경험방』과는 관련이 없으며 문집에 실릴 만한 글들이 필사되어 있다. 이는 전문 의학자들뿐만 아니라 글을 하는 문인들에게도 『침구경험방』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내용적 가치
『침구경험방』은 허임이 평생 동안 쌓은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씌어진 서적으로, 내용의 중간 중간에 허임의 견해와 임상경험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 본서의 가장 큰 특성 가운에 하나는 내용의 간결함을 통해 실용성을 극대화하였다는 점이다. 즉, 저술에 있어서 이론의 완결성보다는 침구임상의 실제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허임은 이 책을 지으면서 『내경(內經)』·『동인수혈침구도경(銅人腧穴鍼灸圖經)』·『신응경(神應經)』·『기효양방(奇效良方)』·『동의보감(東醫寶鑑)』 등 기존의 주요 침구학 관련서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으나, 인용한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임상경험에 따라 창조적으로 변용해 놓았다. 특히 수혈(腧穴)을 정리하고, 기존에 행해지던 부정확한 취혈을 바르게 고쳐 놓고, 새로운 치료혈을 모색하고 수많은 경외기혈(經外奇穴)을 정리하고, 『기효양방』의 수법을 변용하여 침보사법(鍼補瀉法)을 창안한 것 등은 이후 동아시아 침구술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각론의 병증문별 항목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침법은 서양의학에서의 내·외과 가릴 것 없이 거의 온갖 영역에서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명종(明宗) 대의 의원인 임언국(任彦國)과 깊은 연관이 있는 『치종지남(治腫指南)』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특히 「瘡腫」에서 ‘諸危惡症[여러 가지 위험하고 나쁜 증세]’ 가운데 하나로 든 ‘누정(縷疔)’은 임언국이 창시한 개념으로, 이 개념이 쓰인 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영향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침구경험방』은 임상에서 큰 효력을 발휘함에 따라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침구학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으며 청대(淸代)에 널리 유행한 요윤홍(廖潤鴻)의 『침구집성(鍼灸集成)』(1874년)의 내용이 『침구경험방』·『동의보감』, 그리고 『유경도익(類經圖翼)』의 일부를 짜깁기한 서적임이 밝혀짐에 따라 동아시아 침구술에 본서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침구경험방』은 침구의(鍼灸醫)의 기본서였으며, 이후 한국적 특색이 짙은 종합의서인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뿐 아니라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의 「구급편(救急篇)」 등의 형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보사법이며 오늘날 우리나라 임상에서 광범위하게 시술되고 있는 사암침법(舍巖鍼法)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사암의 치료편 가운데 중풍(中風)·곽란(霍亂)·각기(脚氣)·구병문(口病門) 등은 『침구경험방』을 인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침구경험방』은 우리나라의 침구학 뿐 아니라 동아시아 침구학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게서 특히 침술에 강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왔는데 여기에 큰 밑거름이 되었던 저서가 바로 『침구경험방』인 것이다.
참고문헌
박문현, 「許任『鍼灸經驗方』 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허임 저, 강상숙 외 역, 『침구경험방』, 허임기념사업회, 2006.
안상우·박상영 역, 『국역 치종지남·치종비방』, 한국한의학연구원, 2008.
안상우 외, 『해외에서 찾아낸 우리 옛 의학책(증보판)』, 한국한의학연구원, 2009.
집필자 :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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