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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청쇄어(鯸鯖瑣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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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16.AS_SA_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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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역사서 | 사회-역사-역사기록 | 사부-잡사류
· 작성주체 이제신(李濟臣, 1536-1584)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1冊 : 左右雙邊 半郭 18.8 x 13.2 cm, 有界, 10行20字, 無魚尾 ; 30.2 X 19.8 cm
· 주기사항 異書名 : 淸江鯸鯖瑣語
附 : 淸江詩話
備考 : 徐有榘의 自然經室 寫本의 하나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6.23

안내정보

조선 중기의 문신 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1536-1583)이 역대 사적(史蹟), 인물 일화(逸話), 당대의 풍습, 문물제도의 연혁(沿革) 등을 기록한 필기류(筆記類) 잡록(雜錄)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제신은 자(字)가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이문성(李文誠)(1503-1575)의 아들이다. 용문(龍門)조욱(趙昱)(1498-1557)과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에게 수학했으며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 權知正字)에 보임된다. 예문관 검열(檢閱), 감찰(監察) 등을 지내고 병조좌랑 겸 기사관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70년(선조 3)울산군수(蔚山郡守), 정언(正言), 진주목사(晋州牧使), 강계부사(江界府使)를 거쳐 1583년(선조 16)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 兵馬節度使)가 되었으나 여진족 이탕개 (尼湯介) 등이 경원(慶源) 일대를 침범한 일로 견책을 받아 의주(義州)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이듬해 신원(伸寃)되고 아들 이수준(李壽俊)(1559-1607)의 원종공(原從功)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제신은 시문(詩文)에 능했고 특히 여러 편의 잡록들을 남겼는데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청강선생사재록(淸江先生思齋錄)」,「청강선생시화(淸江先生詩話)」,「청강선생소총(淸江先生笑叢)」이 합철된 『청강소설(淸江小說)』(규장각소장, 목판본과 필사본 2종)이 전한다. 『청강소설』 4편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전하기도 한다. 이 밖의 저서로는 『청강집(淸江集)』,『진성잡기(鎭城雜記)』가 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19.3×30.2cm 2권 1책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으로 표지에는 “鯸鯖瑣語 全”, “淸江詩話 全”으로 서명이 기록되어 있다. 표지 서명대로 두 편의 작품이 같은 책에 합철되어 있다. 표지 안쪽 면은 “小華叢書”라는 제명과 함께 비교적 작은 글씨로 “鯸鯖瑣語”, “淸江詩話”라고 쓰인 종이를 글자 면이 뒤로 가도록 덧발라 서명의 자체(字體)가 뒤집혀 보이도록 장정했다.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41장(82쪽)으로 이루어졌으며 2장에서 23장까지는 「후청쇄어(鯸鯖瑣語)」, 24장에서 40장까지는 「청강시화(淸江詩話)」로 구성되어 있다. 각 면은 10행 20자 내외로 비교적 바른 글체로 정사(淨寫)되어 있으며 판심에 “自然經室藏”이란 인장이 찍힌 용지에 필사되어 있다.
「후청쇄어(鯸鯖瑣語)」는 대략 40여 항목의 기사(記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용면에서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전체 내용을 기록된 순서대로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1363-1452)에 대한 일화, 세종 조에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 선조(先祖) 효정공(孝靖公)이정간(李貞幹)(1360-1439)의 일화, 세종이 효정공에게 궤장을 하사하며 남긴 교서와 효정공의 자손들, 선조 조에 궤장을 하사 받은 인재(忍齋)홍섬(洪暹)(1504-1585)과의 일화, 전의(全義) 이씨 전보(全譜)를 만들게 된 경위, 궤장연(几杖宴)에 대한 단상, 성안공(成安公)상진(尙震)(1493-1564)의 인물됨과 업적, 효정공 『경수시축(慶壽詩軸)』의 소재처,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의 유래와 당시 서원의 실태, 향교(鄕校)와 서원의 비교, 숭의전(崇義殿)의 내력과 태조(太祖)의 화상(畵像)을 숭의전에 옮겨 봉안하게 된 경위, 부모 상례에서 담제(禫祭) 전에 착용하는 갓의 혼란과 백포립(白布笠) 의정(議定)에 대한 단상, 망곡례(望哭禮)를 시행하게 된 경위, 순안어사(巡按御使)가 사형(死刑)을 담당하는 중국의 제도와 그에 관한 일화, 사마소(司馬所)의 병폐와 유성룡(柳成龍)의 혁파 사실, 관대(冠帶)와 의복 제도의 변모 및 가죽 허리띠와 길고 큰 패도(佩刀) 착용에 대한 우려, 왜달피(倭獺皮) 피견(披肩)의 유행과 남명(南冥)이 그 폐단을 없앤 사실, 명종(明宗) 조 유일(遺逸)로 벼슬에 제수된 성수침(成守琛)(1493-1564)·조식·이희안(李希顔)(1504-1559)·성제원(成悌元)(1506-1559)·조욱(趙昱), 남명의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에 얽힌 일화, 명종과 남명의 문답을 목격했던 일, ‘단성현감사직소’에 대한 성수침(成守琛)의 언급, 숭양서원(崇陽書院)과 화담(花潭)의 배향, 『화담집(花潭集)』에 실린 「증조경양(贈趙景陽)」시의 진위 문제, 육친(六親)의 상(喪)에 최복(衰服)을 착용하게 된 경위, 여묘(廬墓)와 반곡(返哭) 준행의 경위, 혼례에서 남침(覽寢)과 독좌(獨坐)에 대한 비판과 친영례(親迎禮)의 시행, 당시의 사모(紗帽)와 이엄(耳掩)의 체제, 양사모(凉紗帽)의 유행과 충정관(冲正冠)을 유입하게 된 경위, 살쾡이 가죽으로 만든 작은 이엄(耳掩)이 유행하게 된 경위, 명명(命名)과 관련된 기이한 일화, 소경 점쟁이가 이이(李珥)의 장원을 예언했던 일화,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윤군평(尹君平)에 대한 징험, 인종 조 송기수(宋麒壽)(1506-1581)에 관한 일화, 규암공(圭庵公)송인수(宋麟壽)(1499-1547)의 신주(神主)에 관한 기이담, 고려시중심용(沈龍)의 신주에 관한 일화, 남치근(南致勤)이 시조의 묘소를 찾아낸 일화 등.
「청강시화(淸江詩話)」는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의 인물들의 시와 시화를 일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모두 61개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닌 인물과 그의 시를 소개하거나, 작시(作詩) 과정이나 시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작품이나 시재(詩才)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 정인인(鄭麟仁)(?-1504)의 어머니, 유응부(兪應孚)(?-1456), 이승소(李承召)(1422-1484), 박상(朴祥)(1474-1530), 김인후(金麟厚)(1510-1560), 이후백(李後白)(1520-1578), 김천령(金千齡(1469-1503), 신광한(申光漢)(1484-1555), 김안로(金安老)(1481-1537), 홍유손(洪裕孫)(1431-1529), 소세양(蘇世讓)(1486-1562), 이행(李荇)(1478-1534), 이색(李穡)(1328-1396), 최연(崔演)(1503-1546), 임형수(林亨秀)(1504-1547), 박순(朴淳)(1523-1589), 김안국(金安國)(1478-1543), 조성(趙晟)(1492-1555), 상진(尙震), 고경명(高敬命), 김홍도(金弘度)(1524-1557), 임억령(林億齡)(1496-1568), 성몽정(成夢井)(1471-1517), 정사룡(鄭士龍)(1494-1573), 이언충(李彦忠), 성효원(成孝元)(1497-1551), 조식(曺植), 정화(鄭和), 강극성(姜克誠)(1526-1576), 노수신(盧守慎)(1515-1590), 윤결(尹潔)(1517-1548), 홍귀달(洪貴達)(1438-1504), 어무적(魚無迹), 정광필(鄭光弼)(1462-1538), 성세창(成世昌)(1481-1548), 김정국(金正國)(1485-1541), 박영(朴永)(1471-1540), 김석철(金錫哲)(1456-?), 진우(陳宇)(?-1535), 안수(安璲)(1521-?), 이희보(李希輔)(1473-1548), 이양국(李良國), 조욱(趙昱), 정희량(鄭希良)(1469-?), 송세형(宋世珩)(?-1553), 하응림(河應臨)(1536-1567).
서지적 가치
본서는 풍석(楓石)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소화총서(小華叢書)』의 간행을 목적으로 정사(淨寫)한 가장원본(家藏原本)으로 그의 사고지(私稿紙)인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에 필사되어 있다. 서유구 가(家)에서 기획했던 『소화총서』편찬 작업은 완결된 것은 아니지만, 대상 편목을 정하고 여건이 되는 대로 필사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본서는 그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서의 앞표지 안쪽 면에 보이는 ‘小華叢書’라는 제명(題名)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즉 본서는 서유구가 진행했던 『소화총서』의 편찬 작업을 증빙해 주는 자료로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명청(明淸) 시대 총서(叢書) 유입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총서류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특히『소화총서』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서적들을 망라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분류하여 총집하고자 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서는 『소화총서』의 재적(載籍) 부분(총 49종)에 안배된 것으로, 필사의 목적과 필사 당대의 소장처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정사(淨寫)된 자료란 점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
내용적 가치
「후청쇄어」는 이제신의 선조 이정간과 처조부 상진, 그가 수학했던 조식 등 자신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일화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 친분에 따른 인물 일화에 머물지 않고 당대의 궤장연(几杖宴)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당대의 의복(衣服) 및 관대(冠帶)의 연혁, 혼례와 상례의 풍습 등을 담고 있어서 16세기 후반의 문물(文物)과 제도(制度)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제신 본인이 직접 중국에서 충정관(冲正冠)을 유입하고 살쾡이 가죽으로 만든 이엄(耳掩)을 유행시킨 점은 복식 문화가 유입되고 전파되는 경로를 보여주는 아주 특색 있는 기사라 할 만하다. 이 밖에도 서원(書院)의 유래, 1576년 무렵의 향교와 서원의 실태, 사마소(司馬所)의 병폐 등 당시 사회상을 짐작케 하는 내용들이 산견되는 바, 조선 중기의 사회·문화사를 고찰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
「청강시화」는 전문적인 시비평서는 아니지만 풍부한 시에 관한 일화를 수록하고 있는 자료이다. 특히 당대의 요절한 인물과 무신(武臣), 여성, 무명인, 서얼(庶孼)의 시까지 전하고 있어서 조선 전기와 중기의 시사(詩史)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전적이다. 김시습에 대한 일화가 비교적 많고, 신광한, 박상, 어무적의 시재(詩才)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제신 개인의 자평(自評)이지만 당대의 세평(世評)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것이므로 이를 통해 조선 중기 시평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청강시화」는 성종 조의 『동인시화(東人詩話)』이후 순수 시화류(詩話類)의 재출현이라는 점에서 조선 시화사(詩話史)에서 상당히 중요성을 띠는 자료이다. 이제신은 여러 편의 잡록을 저술하면서 시화를 따로 구분하였는데, 비록 자신의 시론(詩論)을 전문적으로 개진한 것이 아니라 주로 시에 대한 일화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잡록과 시화를 변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면이 있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김영진, 「조선 후기 실학파의 총서 편찬과 그 의미」, 『한국 한문학 연구의 새 지평』, 소명출판, 2005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대동야승』 14, 민족문화추진회, 1982
집필자 : 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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