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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기(西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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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16.AS_SA_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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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소설류
· 작성주체 왕실보(王實甫, 1260-1336) 찬
김성탄(金聖歎, 1608-1661) 평비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5卷2冊
· 주기사항 跋: 歲崇禎庚辰(1640)首夏孫男通政大夫守
書名: 表題에 依함
卷首題: 聖歎先生批評第六才子書科白詞懇解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42.1

안내정보

중국 원대(元代)의 왕실보(王實甫)(1250?-1337?)가 지은 명편 희곡 『서상기(西廂記)』, 그 중에서도 청대(淸代) 초기에 김성탄(金聖歎)(1608-1661)이 개편한 평비본(評批本)을 저본으로 하여 『서상기』 원문만 전사(轉寫)한 백문본(白文本)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원저자 왕실보는 본명이 왕덕신(王德信), 자(字)가 실보이다.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 출신으로 관한경(關漢卿) 등과 함께 원대를 대표하는 극작가이며, 10여 종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대표작 『서상기』를 비롯해 『여춘당(麗春堂)』, 『파요기(破窯記)』 등 3종만 전한다.
개편자 김성탄은 본명이 김인서(金人瑞), 자가 성탄이다. 강소(江蘇) 오현(吳縣, 지금의 소주) 출신으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만년에 관료들의 부패에 항의하다 처형되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대표적인 문예비평가로, 독자적인 견식으로 주변장르였던 희곡과 소설을 정통문학과 구별하지 않고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장자(莊子)』, 「이소(離騷)」, 『사기(史記)』, 두시(杜詩), 『수호전(水滸傳)』, 『서상기』를 중국 고전문학의 각 장르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작으로 꼽으며 이른바 ‘육재자서(六才子書)’라 칭하였다. 그 가운데 『수호전』을 개작하여 방대한 평비를 덧붙인 『제오재자서수호전(第五才子書水滸傳)』과 『서상기』 평비본 『제육재자서서상기(第六才子書西廂記)』는 원작보다 훨씬 높은 인기를 끌어 그의 대표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본(金本) 『서상기』는 18세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20세기 초까지 널리 유행하며 큰 영향을 낳았다.
필사자와 관련해서는 제1책 마지막 면에 “歲在乙未陽月莅扶風東軒書”라는 필사기가 적혀 있고, 제2책 마지막 면에는 “歲在乙未冬十二月上澣知扶餘東閣書”라고 쓰여 있어 대략적인 필사시기와 필사자의 신분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두 필사기는 각각 “을미년 10월에 부풍에 부임하여 동헌에서 쓰다.”와 “을미년 겨울 12월 상순에 부여 수령이 동각에서 쓰다.”로 풀이된다. 을미년은 1835년 또는 1895년일 것으로 보이나 지질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첫 번째 필사기의 ‘부풍’이라는 지명은 ‘부여’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름이며 ‘동헌’과 ‘동각’은 관아 또는 집무실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당시 부여군수(또는 부여현감)가 관아에서 직접 필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상․하 2책,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상기』 원문만 전사한 한문 필사본으로, 광곽(匡郭) 및 계선(界線)은 없고 행자수는 12행 23자이다. 정자로 또박또박 필사되어 있으며 행간에 구결(口訣) 표기가 되어있다. 노래 부분인 곡문(曲文)은 큰 글씨로,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부분인 과백(科白)은 소자(小字) 2행으로 필사하였다.
총 5본(本) 20절(折)로 이루어진 『서상기』 원문을 5권으로 나누어 제1책에는 제1본부터 제2본까지, 제2책에는 제3본부터 흔히 ‘속편(續篇)’으로 불리는 제5본까지 수록하였다. 각 권별 목록을 본서에 명기된 김성탄의 장명(章名)에 따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卷一 : 「一之一驚艶」, 「一之二借廂」, 「一之三酬韻」, 「一之四鬧齋」
卷二 : 「二之一寺警」, 「二之二(請宴)」, 「二之三賴婚」, 「二之四琴心」
卷三 : 「三之一前候」, 「三之二鬧簡」, 「三之三賴簡」, 「三之四後候」
卷四 : 「四之一酬簡」, 「四之二拷艶」, 「四之三(哭宴)」, 「四之四驚夢」
卷五 : 「續之一泥金報捷」, 「續之二金字緘愁」, 「續之三鄭恒求配」, 「續之四衣錦榮歸」
서지적 가치
본서는 『서상기』라는 표제 외에 “성탄선생비평 제육재자서 과백사살해(聖歎先生批評第六才子書科白詞煞解)”라는 권수제(卷首題)를 쓰고 있어 김성탄 평비본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중국본에서는 찾을 수 없어 필사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거나 저본으로 삼은 국내 유통 이본에 사용된 제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탄선생비평’이라고 명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김성탄의 평비가 전혀 수록되어있지 않다. 곧 김성탄의 서문인 「통곡고인(慟哭古人)」과 「유증후인(留贈後人)」, 「독제육재자서서상기법(讀第六才子書西廂記法)」, 「성탄외서(聖歎外書)」, 각 장절의 총평 및 협비(夾批) 등을 일체 수록하지 않았다. 김성탄이 수정, 윤색한 『서상기』 원문만 수록했을 뿐이다. 조선시대 국내에서 유통된 『서상기』는 그 형태를 막론하고 작품 원문 외에 최소한 김성탄의 서문은 실려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마저도 싣지 않은 것은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 권수제에서 ‘살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작품 내용에 관한 주해도 전혀 실려 있지 않다.
수록된 『서상기』 원문의 경우, 김성탄 비주본의 원문을 충실하게 수록하고 있다. 제목총명(題目總名)과 각 본별 제목정명(題目正名) 및 과백과 곡문은 물론이고, 궁조명(宮調名)과 곡패명(曲牌名), 창자명(唱者名), 과개(科介) 등도 빠짐없이 명기하였다. 김성탄이 후인이 덧붙인 사족이라며 그 가치를 크게 폄하한 제5본 ‘속편’도 그대로 전문을 수록했다. 다만 제1본부터 제4본까지는 본과 본 사이에 여백 없이 이어서 필사한 데 비해, 속편은 제4본이 끝난 면에 충분한 여백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면부터 필사하였다. 이로써 필사자가 제5본에 대한 김성탄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종의 부록과 같은 성격으로 인식했음을 엿볼 수 있다.
제2본 제목정명의 경우 김성탄본 『서상기』의 원각본인 관화당본(貫華堂本)의 그것과 달리 이후에 나와 역시 인기를 끌었던 추성맥(鄒聖脈, 1691-1762) 증보본 계열(『회상타주제육재자서(繪像妥注第六才子書)』, 『운림별서수상타주제육제자서(雲林別墅繡像妥註第六才子書)』, 『누외루증정타주제육재자서(樓外樓訂正妥註第六才子書)』 등)에 보이는 제목정명과 일치한다. 관화당본의 제목정명은 “張君瑞破賊計 莽和尙殺人心 小紅娘晝請客 崔鶯鶯夜聽琴”인 데 비해, 본서에 명기된 제목정명은 “張君瑞解賊圍 小紅娘晝請客 老夫人賴婚事 崔鶯鶯夜聽琴”으로 추성맥본 계열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본서의 모본이 관화당본 계열이 아니라 추성맥본 계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책 37면b 상란에 ‘설자(楔子)’라는 두 글자가 보이는데, ‘설자’라는 용어 역시 관화당본에서는 볼 수 없고 추성맥본 등에서만 보인다는 점에서 관화당본 계열이 모본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 할 것이다. 참고로 추성맥본은 김성탄 비주본을 바탕으로 하여 역대 제가의 『서상기』 평비 및 기타 상세한 주석을 덧붙인 좋은 판본으로 국내에서도 널리 유행하였다.
한편, 등장인물의 인명과 궁조명, 곡패명 등 우측에 주필(朱筆)로 물결 모양의 선을 그어 독자들이 구분하기 쉽게 했고, 군데군데 주필 권점(圈點)으로 강조표시를 했으며 끊어 읽기를 위한 타점도 보인다.
그러나 일부 필사상의 오류도 간간이 발견된다. 가령 제1본 첫머리에서 ‘題目正名’을 ‘題目總名’이라고 잘못 적었으며, 이 제목정명의 제4구 ‘張君瑞鬧道場’은 ‘張君瑞開道場’이라고 오기하였다. 1책 제2본 제2절과 2책 제4본 제3절의 경우, 각각 첫머리의 2자 장명인 ‘請宴’과 ‘哭宴’이 누락되어 있다. 또 1책 제2본 제2절 끝부분의 「收尾」 다음에 장생(張生)의 대사 한 단락과 제2본 제4절 마지막 부분 「尾」의 후반 2구절이 누락되어 있다. 또 곡문과 과백을 혼동하여 간혹 다른 부분들과 달리 곡문을 작은 글씨로 표기하거나 과백을 큰 글씨로 표기한 경우도 일부 발견된다.
내용적 가치
본서는 조선말 지방관이 직접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당시 사대부의 『서상기』 감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런 주해 없이 작품의 원문만 수록하고 있어 한문에 익숙한 필사자와 그 주변의 한문 식자층 사이에서 읽혔던 독본으로 추정된다. 김성탄 평비본을 정성스럽게 정서한 것에서 조선후기 『서상기』의 수용양상, 특히 김성탄본 『서상기』의 인기를 보여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이 책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9세기 후반에는 중국본 『서상기』나 그 단순 전사본은 물론이고, 조선인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주해본이나 번역본, 소설체 개역본 등 다양한 형태의 조선 독본들이 유통되며 널리 읽혔다. 그런 점에서 단순 한문 전사본인 본서는 당시 다양한 형태와 층위의 『서상기』 읽기가 공존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김성탄 비주본을 모본으로 삼았으면서도 그 서문조차 수록하지 않은 것이 다소 의아스러우나, 원문을 충실하게 전사했다는 점에서 『서상기』를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읽으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했던 중국의 희곡을 그대로 감상하려 했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권수제에 보이는 ‘살해’라는 말에서 국내에서 유통되던 주해본을 저본으로 하여 전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이미 국내에 『염몽만석(艶夢漫釋)』, 『서상기소주별전(西廂記小註別傳)』, 「서상기어록(西廂記語錄)」(『주해어록총람(註解語錄總覽)』)과 같은 『서상기』 전용 주해어록서가 만들어져 유통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서와 같은 백문본은 그러한 어록해류와 함께 읽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인에 의해 이루어진 『서상기』 주해본과 번역본에 관해서는 이미 1차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으나, 본서와 같은 국내 한문 필사본에 관해서는 아직 포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단순 전사본들이라 하더라도 필사의 시기와 주체, 필사 양상과 특징, 이본관계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조선후기 국내 『서상기』 수용 양상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폭넓은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金聖歎, 『貫華堂第六才子書』, 萬卷出版公司, 2009.
曺淑子, 「『第六才子書西廂記』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4.
정선희, 「조선후기 문인들의 김성탄 評批本에 대한 독서 담론 연구」, 『동방학지』 129, 2005.
김효민, 「조선독본 『서상기』의 이본 실태 및 유통 양상」, 『중국어문논총』 46, 중국어문연구회, 2010.
집필자 : 김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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