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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본기(天君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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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소설류
· 작성주체 정기화(鄭琦和, 1786-1840)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정헌시(鄭憲時, ?-?)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無匡郭, 無界, 10行20字, 無魚尾 ; 30.8 X 21.0 cm
· 주기사항 表題: 天君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6.39

안내정보

본서는 헐오재(歇五齋)정기화(鄭琦和)(1786년-1840년)가 지은 심성가전(心性假傳)으로 일명 「심사(心史)」라도 한다. 인간의 성정(性情)을 의인화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30세가 될 때까지의 심상의 변화과정을 기년식(紀年式)으로 그린 심성가전(心性假傳)이다. 그의 아들 정현석(鄭顯奭)이 발문과 교열을 담당하고 손자인 정헌시(鄭憲時)가 편하여 을유(乙酉)년 가을에 간행하였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 정기화는 1786년(정조 10) 첨지중추 정홍진(鄭鴻晋)과 경주이씨 사이에 태어나 숙부 정홍관(鄭鴻觀)에게 입양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남중(南仲), 호는 헐오재(歇五齋)다. 1827년(순조 27)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의 청환직을 역임하였으며 세자시강원필선에 이르렀다. 남인계열의 학자로 일생을 시문과 학문에 헌신 하였다. 이조참판·홍문관제학이 증직되었다.
그가 지은 심성가전(心性假傳)인 「천군본기(天君本紀)」는 일명 「심사(心史)」라 하는데, 인간의 성정(性情)을 의인화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30세가 될 때까지의 심상의 변화과정을 기년식(紀年式)으로 그린 가전이다. 이 작품은 그의 아들 정현석(鄭顯奭) 이 발문과 교열을 담당하고 손자인 정헌시(鄭憲時)가 편하였다. 정현석(鄭顯奭)1817년-1899년)은 자가 보여(保汝), 호가 박원(璞園)이며 1817년에 태어나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유융비번사고(有戎備藩司考)」, 「유원고(柔遠考)」, 「여지고(輿地考)」, 「백행록(百行錄)」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성 및 내용
본서 1장에 “천군록(天君錄)”이라는 제목이 있고 5장에 “천군본기서(天君本紀序)”를 시작으로 하여 “총론(總論)”(6장-10장), “본기(本紀)”(11장-73장), “발(跋)”(73장-74장), “천군찬(天君贊)”(74장), “사씨평(史氏評)”(7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염락(濂洛)의 제현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심학(心學)이 주해서나 도설(圖說)로 훌륭한 글이 많아 선유(先儒)의 글은 뿌리와 근원이 되며 자신의 글은 가지요, 말류에 해당되지만, 이 글을 통해 천려일득(千慮一得)이라도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총론에서는 「천군본기」에서 마음을 사람에 ‘비유’하여 독자로 하여금 깨닫기 쉽게 한 점, ‘천군’의 용어 유례와 인간의 성장에 따른 심성 변화를 가지고 내용을 구성하였다는 점, ‘심학’을 말하면서 본문에 하나의 ‘심(心)’자도 드러내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였다.
본문은 본기의 형식을 충실히 따라 천군의 선조에 대한 내력에서 시작하여 30년까지 충신과 간신에 의한 치란을 심과 관련된 각종 전고(典故)를 이용하여 기술하였으며 각 해마다 ‘사씨왈(史氏曰)’을 달아 논평하였다. 본문에는 중요한 부분에 소주(小註)나 두주(頭註)를 부기해 전고의 출처(出處)나 보조 설명을 달아 이해를 돕고 있다.
발문(跋文)에서는 세속의 선비들은 문장 짓는 데만 힘써 심학(心學)이 폐하여진지 오래 되었기에 비록 이 글이 부족하지만 경전에 뜻이 있는 것이며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자득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뒤에 부기된 “천군찬”과 “사씨평”은 다른 판본에는 없고 『수채이문(搜采異聞)』에 수록된 「심사(心史)」와 버클리대본에만 보인다. “천군찬”에서는 ‘천군’의 30년 통치가 바름을 얻은 것을 치하하였고 “사씨평”에서는 사람에 나아가 일을 논하고 일에 나아가 이치를 논했으며 과거를 끌어와 현재를 알리고 포폄하는 가운데 경계를 드러내었으니 훌륭한 사관(良史氏)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부분까지가 정기화의 「천군본기」에 해당하고, 뒤에는 『율곡선생문집』에 수록된 차자(箚子) 11편이 덧붙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간원차제일(司諫院箚第一)」)사간원걸변통폐법차(司諫院乞變通弊法箚)), 「제이차(第二箚)」(사간원청진덕수정차(司諫院請進德修政箚)), 「육조계(六條啓)」, 「옥당논을사위훈차제일(玉堂論乙巳僞勳箚第一)」, 「제칠(第七)」(칠차(七箚)), 「제십육(第十六)」(십육차(十六箚)), 「진폐차(陳弊箚)」(진이재오책차(陳弭災五策箚)), 「옥당차(玉堂箚)」(옥당진계차(玉堂陳戒箚)), 「옥당차(玉堂箚)」(옥당론군덕사사차(玉堂論君德四事箚)), 「사간원청면학친현신차(司諫院請勉學親賢臣箚)」, 「황해도민폐계(黃海道民弊啓)」(진황해도민폐계(陳黃海道民弊啓)) 이들의 순서는 현재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에 수록된 순서와 달라 어떤 체제를 가지고 구성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지적 가치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천군본기」이본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국립중앙도서관 a본 - 수고본(手藁本). 필사본. 표제 “心史”. ‘천군본기서’→ ‘총론’ → ‘본기’ → ‘발’로 구성되었고, 발문 뒤에는 “不肖 男 顯奭 校, 孫 憲時 編. 乙酉秋刊”으로 간행기록이 있고, 끝장에 정현석이 쓴 것으로 보이는 “憲時時在外衙門參議, 刊出一百本. 乙酉九月日. 余在德源任所.”라는 기록이 있다.
* 버클리대본 - 표제 “천군록(天君錄)”. 필사본. ‘천군본기서’ → ‘총론’ → ‘본기’ → ‘발’ → ‘천군찬’ → ‘사씨평’ 으로 구성되었다.
*『수채이문(搜采異聞)』본(영남대·전남대본) - 『수채이문(搜采異聞)』소재. 필사본. 제명 「심사(心史)」.「화사(花史)」·「수성지(愁城誌)」와 합본. ‘천군본기서’ → ‘총론’ → ‘심사본기’ → ‘천군찬’ → ‘사씨평’ → ‘발’로 구성되었다.
* 규장각본 - 표제 “心史 全” . 필사본. ‘天君本記序’ → ‘天君本紀序’ → ‘총론’ → ‘본기’ → ‘발’로 구성되었다. 서문은 동일 내용이 중복되었다. 끝장에 “不肖 男 顯奭 校, 孫 憲時 編. 乙酉秋刊”이라는 기록이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 b본 - 표제 “心史”. 활자본(活字本). ‘天君本紀序’ → ‘총론’ → ‘본기’ → ‘발’로 구성되었다. 끝장에 “不肖 男 顯奭 校, 孫 憲時 編. 乙酉秋刊”이라는 간행기록도 동일하다. 저자의 수고본을 그대로 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 충남대본 - 표제 “心史 全” 나머지는 국립중앙도서관 b본과 동일하다.
* 현토본 - 『천군연의(天君演義)』의 부록. 대정(大正) 6년(1917년) 한남서림(翰南書林) 백두용(白斗鏞)이 간행. 현토본. ‘天君本紀序’ → ‘총론’ → ‘본기’ → ‘발’로 구성되었으며 뒤에 정현석의 간행기록은 없다. 대신 본문 시작 전에 “헐오재 정기화 저, 후학심재 백두용 교(歇五齋 鄭琦和 著, 後學心齋 白斗鏞 校)”를 써서 저자와 교열자를 밝혔다.
「천군본기」이본은 필사본과 활자본, 현토본으로 나뉘는데 이본간의 글자출입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이본에서 ‘天君本紀序’ → ‘總論’ → ‘本紀’ → ‘跋’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인다. 다만 필사본 중에서 버클리대본과 『수채이문』본이 여타 이본과 구성상에서 몇 가지 차이를 보여 독립된 계열로 분리해야함을 보여준다.
첫째, 버클리대본과 『수채이문』본에는 다른 판본에 없는 부분인 ‘천군찬’과 ‘사씨평’이 포함되어 있다. “천군찬”은 말 그대로 천군의 덕을 치하하는 부분이며, “사씨평”은 「천군본기」에서 매년마다 부기한 사평이 훌륭하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는 “顧此僭妄, 固知其不自量, 亦見興起之一端. 覽者恕焉.”이라는 작자의 말을 붙였다. 이 두 부분이 다른 판본에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뒷부분에 부기된 발문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 현재 다른 판본에서도 발문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心學之廢, 久矣”로 시작하여 좌사(左思)의 삼도부(三都賦)가 장단지 덮개가 되고 왕통(王統)의 속경(續經)이 지붕의 기와를 세우는데 쓰였는데 이글은 삼도부나 속경에도 못 미치지만 경전의 뜻을 표절하였고 선유들이 논한 것을 따라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앞부분과 “心史者何? 我先君子 歇五公所著也”로 시작하여 아들 현석이 「천군본기」의 효용을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에 비기며 성인이 경세(經世)하는 뜻이 보탬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극찬하는 뒷부분으로 되어 있다. 내용상으로만 보아도 앞부분은 저자가 자신의 글에 대한 겸양의 표현이고 뒷부분은 아들이 아버지의 글에 대한 극찬임이 분명이 드러난다. 즉 앞부분은 저자 자신의 발문이고 뒷부분은 아들의 발문으로 별개의 발문이다. 저자의 수고본인 국립중앙도서관 a본에는 발문의 앞 부분 뒤에 정기화의 낙관이 찍혀 있고 뒷부분은 장을 달리하는데다가 필체도 달리 되어 있다. 이는 활자본에도 똑같이 되어 있고, 저자의 낙관은 없지만 규장각본에도 뒷부분은 장을 달리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백두용의 현토본에 와서 구분없이 발문 아래 한꺼번에 이어붙여 마치 정현석이 쓴 하나의 발문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 두 개의 발문 중에 버클리대본과 『수채이문』본에는 저자의 발문만이 수록되어 있다. 게다가 간행기록(不肖 男 顯奭 校, 孫 憲時 編. 乙酉秋刊)도 없기 때문에 이들 두 판본을 통해서는 간행시 저간의 사정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두 가지 점이 다른 판본과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부분이라 버클리대본과 『수채이문』본을 하나의 계열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구성상 버클리대본은 본문 내용 뒤에 ‘발’ → ‘천군찬’ → ‘사씨평’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비해, 『수채이문』본은 ‘천군찬’ → ‘사씨평’ → ‘발’의 순서로 되어 있어 이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판본들간의 유사성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여전히 버클리대본과 『수채이문』본은 「천군본기」이본 중에서 구별되는 중요한 이본군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용적 가치
성리학에서 강조된 심학의 발달로 조선시대에는 심성을 의인화한 천군소설이 꾸준히 창작되었다. 김우옹의 「천군전(天君傳)」을 시작으로 임제의 「수성지(愁城誌)」, 황중윤의 「천군기(天君記)」, 정태제의 「천군연의(天君演義)」, 유치구의 「천군실록(天君實錄)」 등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이들 소설은 대개 인간 몸의 주재자인 마음이 타락하거나 어지러워졌다가 다시 원래의 바른 마음을 회복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니, 인간 본성의 회복과 욕망의 부정이라는 성리학적 기본 이념을 소설로 구현한 것이다.
「천군본기」가 다른 천군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기년식 서술과 매년 부기된 사평에 있다. 「천군본기」는 여타 소설과 비교할 때 서사성보다 이념성이 강한 작품이다. 본문에서도 천군과 관련된 서사보다 사평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이는 공히 이념의 소설화이면서도 연의(演義) 형식을 빌어 서사적 흥미를 높인 「천군연의」와 대조된다. 지금까지 「천군본기」는 이러한 이념성으로 인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설적 관점에서 볼 때 「천군본기」는 서사성이 약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에 이념을 서사화한 천군계 작품들은 당대 문인들에게는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이들 심성가전과 더불어 사물을 의인화하거나 가탁한 작품들, 즉 이른바 가문(假文)들은 작품이 포함하고 있는 상당한 양의 한문학적 전고들로 인해 문인들에게 지적 포만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천군본기」는 이념성이나 우의성을 살펴보는 것과 함께 문인취향 가문(假文)의 창작과 향유라는 소설사적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광순, 「천군본기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78, 국어국문학회, 1978.
김광순, 『수성지·천군본기』, 형설출판사, 1982.
집필자 :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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