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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김공행장(孝子金公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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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23.RICH_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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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역사서 | 개인-전기-행장 | 사부-전기류
· 작성주체 홍정현(洪政鉉) 찬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5張) : 四周單邊 半郭 23.0 x 14.8 cm, 有界, 8行20字 ; 29.8 X 18.7 cm
· 주기사항 被傳者: 金膺渭(1821-1873)
撰者: 時玄黓閹茂(壬戌, 1922)...唐城洪政鉉謹狀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294.8002

안내정보

1책(5장)의 『효자김공행장(孝子金公行狀)』은 강원도삼척사람으로 효행으로 이름났던 김응위(金膺渭, 1821-1873)의 행장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편자인 홍정현(洪政鉉)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효자 김공은 김응위(金膺渭, 1821-1873)로 본적은 삼척(三陟)이며, 신라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 자는(字) 문우(文遇)이다. 아버지는 김인규(金仁奎)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우기(洪禹基)의 딸이다. 김응위의 부인은 3명으로 첫부인은 강릉(江陵)최호혁(崔好赫)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강릉김재심(金載心)의 딸로, 딸을 낳아 남양(南陽)홍재덕(洪在德)에게 시집보냈다. 셋째 부인은 강릉김연집(金演集)의 딸로 2남 3녀를 낳았다.
김응위는 효행(孝行)으로 1882년(고종 19)에 효자정려비가 내려졌다.
구성 및 내용
1책 5장인 『효자김공행장』은 김응위의 가계, 김응위의 효행사실과 효행에 의한 정려, 후손에 대한 기록,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응위는 신라경순왕의 8번째 아들인 실직군왕(悉直郡王)김추(金錘)의 후손으로 처음으로 삼척에 자리를 잡았다. 도통사대장군(都統使大將軍)김정휘(金正暉), 호부상서(戶部尙書)김해(金侅), 충좌위호군(忠佐衛護君)김하은(金夏殷) 등이 김응위의 선조이다.
김응위의 효행에 관한 사실(事實)은 다음과 같다.
김응위는 신축년(1841)에 모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매일 저녁부터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모친의 쾌유를 빌었고, 갑진년(1844) 부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산속을 헤매며 좋은 약초를 구하였으나 조금의 차도만 있을 뿐 완쾌되지 못하였다. 김응위는 두타산(頭陀山)에 가서 영약을 구해 부친의 병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험한 바위를 지나 산정상의 조선암(祖禪菴)에 이르렀다. 동굴안의 탁자 위에는 금불(金佛)만 있었다. 김응위는 굴 안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눈보라를 무릅쓰고 여기에 온 뜻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김응위는 일어나 절을 하고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왔다고 답했다. 노인은 “너의 정성이 가상하지만 너의 부친의 병은 영약으로는 구할 수 없다. 너의 조상의 묘가 있는 산은 죽은 사람에게 좋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라.”라 하고 동편일산(東偏一山)을 가리키며 “이곳은 설운곡(雪雲谷)의 화전치(花田峙)로 길지이다.”라 하였다. 김응위가 묘를 옮기기 위해 무덤을 파 보니, 무덤에 물이 가득하고, 벌레가 시체에 가득하였다. 김응위가 이를 보고 통곡하는데 한 마리 학이 스스로 내려와서 떠나지 않고, 무덤의 제거하기 어려운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였다. 이에 김응위가 선조의 유골을 안장하자 부친의 병이 나았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 효성에 감동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부친이 돌아가시니 그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응위가 죽은 뒤 임오년(1882)에 사림들이 공의 효행을 조정에 상소하여 정려를 받았다.
서지적 가치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장서각, 단국대 퇴계기념도서관 등에 홍정현이 편찬하여 1961년에 간행된 『강암선생유고』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 책의 권7에 「효자김공행장」의 제목으로 실려 있다.
내용적 가치
『효자김공행장』은 1922년 홍정현(洪政鉉)이 지은 것이다. 김응위의 행장만을 따로 묶어 책이 전해진 것은 피전자인 김응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집필자 : 맹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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