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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세보(十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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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27.RICH_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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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족보 | 사회-가족/친족 | 사부-계보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90節179面) : 四周雙邊 半郭 26.2 x 19.8 cm, 世別10段, 上下向2葉花紋魚尾 ; 38.1 X 25.4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290.4.4040

안내정보

편자미상의 필사본 1책인 『십세보(十世譜)』는 기준 인물인 본관이 안동인 김양순(金陽淳)의 위로 10대까지의 직계 조상을 기록한 자료로, 부계와 모계 혈족이 동등하게 기록되어 있어 각 가문간의 혼인관계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십세보』의 저자를 확정해 줄 만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십세보(十世譜)나 팔고조도(八高祖圖)와 같이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조상을 소급해 기록하는 가계기록의 경우에는 기준이 되는 인물이 바로 그 기록의 저작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십세보』는 기준 인물인 김양순(金陽淳, 1776-1840)의 저술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에 그의 약력을 간단히 들어 둔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원회(元會), 호는 건옹(健翁)이다. 아버지는 군수 김이례(金履禮)이다. 1803년(순조3)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808년(순조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822년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가자(加資)되었다. 1825년 이조참판에 올랐고, 1827년 대사헌에, 1833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헌종이 즉위한 뒤 1838년(헌종 4)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1840년 모역혐의를 받고 투옥되어 국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편서로 『탄옹행장(炭翁行狀)』이 있다.
구성 및 내용
일반적인 팔고조도의 양식(세로로 5칸이 구획되어 있으며, 맨 아래 칸에 기준 인물이 있고 맨 위에 고조부모가 있는 형식)을 기본으로 해서 거기에 한 칸이 추가되어서 한 면에 5대조까지의 조상이 수록되는 도표 형식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1장이 천(天), 2장이 지(地), 3장이 현(玄), 4장이 황(黃) 등과 같은 식으로 위(位)장까지 쪽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본문에서 특정 인물이 다른 페이지에 등장하는 경우에는 이 쪽번호를 기준으로 ‘見○’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예컨대 ‘見天’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면 이는 ‘天’장을 보면 그 인물이 나와 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책의 기준 인물인 김양순의 위로 10대까지를 거슬러 올라가 부계와 모계의 모든 직계 조상을 기록하였다. 다시 말해 김양순의 부모(2), 조부모(2×2=4), 증조부모(4×2=8), 고조부모(8×2=16), 5대조(16×2=32), 6대조(32×2=64), 7대조(64×2=128), 8대조(128×2=256), 9대조(256×2=512), 10대조(512×2=1024)까지 2046명의 명단이 이 책에 기본적으로 실려 있는 셈이다. 또한 김양순의 직계가 아닌 조상이 김양순의 직계로 입양되었을 경우에는 그의 원래 조상들도 기록하였으므로, 수록 인물은 2046명을 훨씬 상회한다. 입양된 인물들의 직계 조상을 기록할 때에도 기준은 김양순으로부터 10대조까지로 한정하였다.
인물을 기록할 때에는 큰 글씨로 해당 인물의 이름을 적고, 그 왼편이나 아래쪽에 간단한 이력을 적어두었다. 기록 순서는 가장 먼저 자(字)를 적고, 만약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라면 그 사실을 간단히 적었다. 진사시에 급제했을 경우에는 ‘진사(進士)’, 문과에 급제했을 경우에는 ‘문과(文科)’라고만 적고, 어느 해 어떤 시험에서 몇 등으로 급제했는가는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문과에서 장원을 했을 경우에는 ‘괴(魁)’라고 하여 그 사실을 밝혔다.(민정중(閔鼎重, 1628-1692) 등의 경우) 다음으로는 그 인물이 지낸 벼슬을 적었다. 자신이 지낸 벼슬을 먼저 적고, 증직(贈職)이 있을 경우에는 그 다음에 적었다. 그 다음으로 시호가 있을 경우 시호를 적었고, 호가 있을 경우 시호 바로 다음에 호를 적었다. 그밖에 순절(殉節)을 했다거나 하는 특이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밝혀 적었다.(김상용(金尙容, 1561-1637) 등의 경우) 마지막으로 해당 인물이 문집을 남겼을 경우에는 ‘有遺稿’ 또는 ‘有集’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여성 쪽에는 기본적으로 아무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해당 인물이 계배(繼配)일 경우에는 그 사실을 밝혀 두었다. 그리고 10대조 여성의 경우에는 그의 조상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밑에 그가 누구의 딸인가를 밝혀 적었다.
다음으로 인물들이 수록된 순서를 보면, 우선 김양순의 직계 조상이 먼저 기록되고, 다음으로 직계 조상 중에서 입양된 인물의 직계 조상을 기록하였다. 앞부분의 경우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a-1b면(天장)에서는 김양순의 5대조까지 부계와 모계의 직계 조상을 모두 기록하였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62명의 조상(부계 31명, 모계 31명) 중에서 김양순의 직계가 아니면서 직계로 입양된 사람은 김양순의 증조모 완산이씨의 아버지인 이이명(李頤命, 1658-1722), 김양순의 조부인 김교행(金敎行, ?-?), 김양순의 조모 여흥민씨의 외조부인 윤흥적(尹興績, 1651-?), 그리고 김양순 자신(그의 부친은 김이례(金履禮)로 되어 있으나 『십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생부는 삼촌인 김이인(金履仁)이다)인데, 이들의 직계 조상에 대해서 2a-3b면에 걸쳐서 기록되었다. 4a-4b면에는 김양순의 고조부인 김수빈(金壽賓, 1626-?)으로부터 그의 5대조까지의 조상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김양순으로부터 계산했을 때 딱 10대조가 된다. 5a-5b면에는 김수빈의 부인인 남양홍씨의 5대조까지 조상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식으로 김양순의 5대조(부계 16명, 모계 16명)의 5대조까지의 기록이 71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72장부터 끝까지는 김양순의 생모인 벽진이씨의 9대조까지가 기록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현전하는 십세보 저작들은 대개 관리를 대상으로 한 공공 기록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개인 기록으로서의 십세보 또한 조선시대에 종종 편찬되었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실학파 문인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종질 이중빈(李仲賓)이 편찬한 『십세보』에 서문을 써주었으며, 조선 말기의 문인인 해좌(海左) 정범조(鄭範朝, 1833-1898)는 척형(戚兄) 청송 심씨가 편찬한 『심씨십세보(沈氏十世譜)』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문들의 존재를 통해 볼 때 각 가문별, 개인별로 적지 않은 수의 십세보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실물로 오늘날까지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양순의 『십세보』는 개인적인 가계 기록물로서의 십세보의 내용과 체제가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종합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세보’라는 명칭을 가진 자료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후기의 문관․무관․음관의 10대조를 밝힌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규장각 소장), 조선태조대의 배극렴(裵克廉, 1325-1392)으로부터 고종대의 정범조(鄭範朝, 1833-1898)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승들의 10대조를 밝힌 『황각십세보(黃閣十世譜)』(규장각 소장) 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모두 정부 관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김양순의 『십세보』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제에 있어서도 『십세보』가 세로로 6칸을 기본으로 하여 한 면에 5대조까지를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황각십세보』는 11칸을 기본으로 하여 한 면에 10대조를 모두 기록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내용적 가치
『십세보』에는 부계와 모계 혈족이 동등하게 모두 기록되어 있어서 각 가문 간의 혼인관계를 일반 족보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반 족보의 경우에는 온전히 부계혈족만을 위주로 하고 있어서 모계혈족의 파악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개인적인 가계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한계를 안고 있음이 자명하다.
참고문헌
송준호, 「한국에 있어서의 가계기록의 역사와 그 해석」, 『역사학보』 87, 역사학회, 1980.
집필자 : 김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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