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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순조대왕옥책문(壬戌純祖大王玉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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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27.RICH_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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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3張7折14面 : 30.8 X 19.1 cm
· 주기사항 表題: 壬戌玉冊文
印: 大同文叢, 財團法人興韓財團藏書,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之寶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DS915.15.C454 1862

안내정보

1862년(철종 13) 철종이 순조에게 ‘고명박후강건수정(高明博厚剛健粹精)’이라는 존호(尊號)를 추후로 올린 옥책문(玉冊文)을 탁본(拓本)한 첩(帖)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본 책자에서는 옥책문을 지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 실린 동일 내용의 옥책문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 1825-1905)이 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찬자(撰者) 김병국은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의 아들이며,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의 동생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용(景用), 호는 영어(穎漁)이다.
1850년(철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대교(待敎)를 거쳐, 1853년(철종 4)에 대사성에 특진하였다. 1857년 예조판서, 1858년 병조판서·호조판서 등 안동 김씨 세도의 물결을 타고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1860년 훈련대장에 이르렀다.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집권과 더불어 안동 김씨 세도는 일단 후퇴하였으나, 그 이전부터 흥선대원군과 관계를 맺어왔던 그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1865년 경복궁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1867년(고종 4) 정리사(整理使)·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를 역임하였다.
1874년(고종 11) 우의정이 되어 1876년 강화도조약에 대한 고종의 자문에 사태를 보아 정책을 강구하자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1878년(고종 15) 좌의정이 된 뒤, 1880년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따라 연미국론(聯美國論)을 주장, 미국과의 수교에 찬성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계기로 사태의 수습에 나선 흥선대원군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함에 따라 영삼군부사(領三軍府使)가 되었고, 이어 호조판서·총리통리내무아문사무(總理統理內務衙門事務)를 거쳐 12월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영의정세자사총리군국사무(領議政世子師總理軍國事務)를 역임하고, 같은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가 1885년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그가 지은 「예릉지문악장(睿陵誌文樂章)」이 『예릉지장(睿陵誌狀)』에 수록되어 있다. 예릉은 철종과 철종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의 능호(陵號)이다.
구성 및 내용
본서의 전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표지에 ‘임술옥책문(壬戌玉冊文)’이라 쓰여 있고, 바로 그 다음장에 ‘임술(壬戌) 순조대왕옥책문(純祖大王玉冊文)’이라고 쓰여 있다. 다음 장에 2개의 도장, 재단법인흥한재단장서(財團法人興韓財團藏書)와 대동문총(大同文叢)이 찍혀 있다. 이어서 옥책문의 내용 14면이 나온다.
맨 마지막에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륭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문안무정영경성효대왕지보(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之寶)’라고 쓴 도장이 찍혀 있다.
책(冊)은 국왕과 왕후의 존호나 시호(諡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새긴 간책(簡冊)이다. 이것을 옥에 새긴 것을 옥책(玉冊), 대나무에 쓴 것을 죽책(竹冊)이라 한다. 존호는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고, 시호는 죽은 뒤 이름 대신 시호를 지어 그 이름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본서에 ‘임술 순조대왕옥책문’이라고 쓰여진 것을 통해, 옥책문을 작성한 시기 및 옥책문의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순조가 승하한 뒤 즉위한 헌종(憲宗)과 그때의 신하들이 순조의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으로 정해 올렸다. 그 뒤 1857년(철종 8)에 ‘순종’에서 ‘순조’로 묘호를 고쳐 올렸다. 본서에 ‘임술 순조대왕옥책문’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순조’라는 묘호를 통해 적어도 1857년 이후에 이 옥책문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본서와 『열성지장통기』에 실린 「추상존호옥책문(追上尊號玉冊文)」, 철종의 행장(行狀),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기록에 추상한 존호가 ‘고명박후강건수정’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옥책문의 대상이 순조이며, 작성 시기인 임술년이 1862년(철종 13)임을 말해준다. 1861년(철종 12)에 순조의 추상존호를 ‘고명박후강건수정’이라고 정해 올렸고, 최종 옥책문을 작성하고 옥책을 조성한 것은 그 이듬해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국왕에게는 ‘고명박후강건수정’에서 볼 수 있듯이 8글자의 존호를 올렸다.
철종은 헌종의 대통(大統)을 이어 왕위에 올라 헌종과 부자의 의리가 형성되었다. 그런 그가 다시 순조의 후사로 들어가, 순조를 ‘순고(純考)’ 혹은 본서에 나오듯이 ‘황고순조(皇考純祖)’라 일컬었다. 철종은 아들로서 새로이 부모가 된 순조와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에게 여러 차례 존호를 가상(加上) 혹은 추상(追上)하였는데 1862년에 올린 본서의 것도 그 하나였다. 옥책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순조의 덕을 기리는 것이었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철종이 순조의 덕을 기려 ‘고명박후강건수정’라는 존호를 올린다는 내용의 옥책을 탁본한 첩이다. 존호는 그것을 받는 대상이 살아 있을 때 올리기도 하고 죽은 뒤 추후로 올리기도 하였다. 전자의 경우를 ‘가상(加上)존호’라 하고, 후자를 ‘추상(追上)존호’라 하여 구별하였다. 본서는 순조가 승하한 뒤 한참 뒤에 올린 존호이므로 추상존호에 해당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이나 왕후에게 존호를 가상 혹은 추상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또 존호를 올릴 때마다 옥책문을 지어 옥책을 조성하였고, 그 옥책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옥책을 탁본한 본서와 같은 첩은 고종대의 것이 많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것은 흔하지 않다.
탁본한 옥책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남아 있다. 규장각에는 순조의 추상존호 관련 탁본 옥책문은 남아 있지 않고, 대개 고종대 작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대상 인물은 태조·태종과 익종(翼宗, 1809-1830)과 익종의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철종과 철종의 비 철인왕후 등이다.
장서각에는 순조의 추상존호 관련 탁본 옥책문이 몇 개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순조추상존호옥책문(純祖追上尊號玉冊文)』이 그것인데, 1848년(헌종 14)[청구번호 K2-4078], 1853년(철종 4)[청구번호 K2-4079], 1857년(철종 8)[청구번호 K2-4080], 1858년(철종 9)[청구번호 K2-4081] 등 4종이다. 임술년(1862)에 탁본한 ‘순조대왕옥책문’은 장서각에도 남아 있지 않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여러 종의 옥책문이 남아 있다. 이곳 소장본도 고종대 이후에 편찬된 것이 대부분이고, 정조·순조·철종대 편찬된 것도 간혹 확인된다. 그 중 철종대 편찬된 것이 2종 있는데, 하나는 1861년(철종 12)에 순원왕후에게 ‘홍화(洪化)’라는 추상존호를 올린 옥책문이고(청구번호 古朝52-6), 나머지 하나는 헌종의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에게 올린 옥책문(청구번호 古4468-56)이다.
대개 존호를 가상 혹은 추상하면 그와 관련한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의궤(儀軌)를 작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1862년에 철종이 순조에게 ‘고명박후강건수정’이라는 존호를 올린 뒤 이와 관련한 의궤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애초 의궤를 작성하지 않은 것인지 그것조차 현재로서 분명하지 않다. 또 본서가 탁본이라 개인 소장 혹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는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지만 왕실 자료의 대체를 보관하고 있는 위의 세 기관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탁본은 서지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인데, 그러한 측면에서 본서의 가치가 클 듯하다.
내용적 가치
‘임술 순조대왕옥책문’의 내용은 본서 이외에 『열성지장통기』에 수록되어 있고, 또 『열성지장통기』는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있어서 접하기가 쉽다. 그러나 학계에서 존호를 통한 연구가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본서의 경우 왕실 의례를 연구하는 이에게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된다. 그 가운데 왕실의 신주(神主)나 보(寶)·인(印)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주에 글을 쓸 때 간혹 존호를 반영해 쓰기도 하고, 또 존호를 올린 뒤에 반드시 보나 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존호를 올리는 일은 왕실의 위상과 관련되기 때문에 본서의 경우는 철종대 정치 사상사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李賢珍, 「19세기 조선 왕실의 왕위 계승과 종묘 세실론」, 『韓國思想史學』 32, 韓國思想史學會, 2009.
집필자 : 이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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