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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니왕복(懷尼往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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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20609.TOYO_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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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별집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無界 ; 33.0 X 22.5 cm
· 주기사항 書名: 表題
印: 幣原圖書
備考: 朱墨 批點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4-322

안내정보

이 자료는 조선후기 숙종대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사이의 갈등,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된 편지와 상소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자료의 편찬자는 윤증 집안의 후손이나 제자, 또는 문인(門人)으로 보이나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실린 편지는 모두 윤증 문집인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려 있으므로 저자는 윤증으로 볼 수 있다. 윤증(1629~1714)의 자는 인경(仁卿) 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또는 유봉(酉峯),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윤증의 조부 윤황(尹煌)(1571~1639)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제자이자 사위였고, 그 부친 윤선거(尹宣擧)(1610~1669)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의 문인이었으므로, 윤증은 서인(西人) 명문가의 후손으로 볼 수 있다. 윤황은 인조대 정묘호란 당시 척화론을 대표하였고, 윤선거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1636년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조선에 사대를 강요하러 온 사신을 쫒아내는 상소를 주도하여 반청(反淸) 척화(斥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병자호란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신의 백부(伯父)인 윤전(尹烇)과 부인 이씨가 죽었는데도 살아남아서 그의 행적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1637년 삼전도의 치욕 이후 윤선거는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등과 김집 문하에서 종유하면서 호서(湖西) 산림(山林)을 형성하였는데, 윤증도 이들과 교유하면서 특히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윤선거가 죽은 뒤, 윤선거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이 묘갈명에서 윤선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 핵심적 이유는 윤선거가 남인 윤휴(尹鑴)를 포용하자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고쳐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후 윤증은 송시열의 학문적 태도와 정치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이로 인한 윤증과 송시열 사이의 갈등을 ‘회니시비’라고 부른다.
윤증과 송시열 사이의 논쟁은 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졌는데, 1674년숙종 즉위 직후부터 시작되어 1680년 경신환국 이후 격화되었다. 1684년에는 송시열 문인인 최신(崔愼)이 윤선거와 윤증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송시열을 두둔하는 노론과 윤선거·윤증을 옹호하는 소론 사이에 상소를 통한 논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회니시비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일단 중단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재연되었는데, 1716년숙종이 송시열을 옹호하고 윤선거·윤증을 비판하여 노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윤증은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종대부터 ‘학행지사(學行之士)’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 진선(進善), 사헌부 장령(掌令)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대에도 관직이 계속 내려져서 1709년에는 우의정(右議政)까지 올랐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백의 정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714년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 회니시비가 다시 격화되어 1717년에는 부친 윤선거와 함께 관작(官爵)을 추탈당하였다가 경종대 소론이 집권하자 1722년에 회복되었다. 영조대에도 윤선거·윤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영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정조대에 다시 관작의 추탈과 회복이 반복되었다. 이것은 회니시비가 정조대 탕평 정국에서까지도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구성 및 내용
이 자료는 차례나 서·발문이 없이 바로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한다. 맨 첫 편지는 ‘윤이서(尹二書)’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윤선거 묘갈명을 완성한 뒤에 그것의 수정을 청하는 것 가운데 두 번째로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윤증의 편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을 비롯하여 송시열 친구인 이유태(李惟泰)의 편지, 그리고 윤증의 친구인 박세채(朴世采) 등의 편지도 같이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자료는 모두 『명재유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집에서는 윤증의 편지를 수록한 부분에서 따로 회니시비 관련 편지를 뽑아서 「별집(別集)」 4권을 만들었는데, 본 자료는 「별집」 권1의 앞 부분이 누락되었지만 그 뒷 부분은 거의 같고(아래 일련번호 1~20), 「별집」 권2와는 거의 일치하며(21~49), 「별집」 권3에서는 3통의 편지만 실려 있다(50, 51, 52). 그 나머지 편지(53~66)는 『명재유고』의 「서(書)」에서 뽑은 것이다. 끝에는 윤증이 작성한 그 동생 윤추(尹推)(1632~1707)에 대한 회고록(67)과 최신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최신의 상소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니시비를 조정의 정치 쟁점으로 만든 바로 그 상소문이다.
『명재유고』 「별집」은 주제별로 편집되어 있는데, 1) 윤증이 송시열에게 윤선거의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청한 뒤에 왕복한 편지, 2) 묘갈명이 완성된 후에 왕복한 편지, 3) 묘갈명을 고쳐주기로 허락한 뒤에 왕복한 편지, 3) 묘갈명을 두 번째로 고쳐 주겠다고 허락한 뒤에 왕복한 편지(이상 「별집」 권1), 4) 이유태의 예설에 대한 문제로 왕복한 편지, 5) 박세채의 강방운(江邦韻) 문제로 왕복한 편지, 6) 을묘년(1675) 이후 왕복한 편지, 7) 탄방(炭坊)에 관한 일로 왕복한 편지(이상 「별집」 권2), 8) 신유년(1681) 이후 왕복한 편지(「별집」 권3,4) 등 8가지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본 자료집에는 「별집」 권1과 권2의 내용은 대부분 수록되었고, 권3, 4에 실린 ‘신유년 이후 왕복한 편지’는 박세채 편지와 윤증의 답장 2통만 실려 있다.
「별집」 권1에서는 앞 부분 4개의 편지를 제외하고 모두 실려 있으므로, 윤선거 묘갈명을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오간 편지가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윤증의 항의로 송시열이 여러 번 수정을 약속하였지만 ‘윤선거에 대한 송시열 자신의 의견을 밝혀 달라’는 윤증의 주장을 송시열은 결국 거부하였다.
「별집」 권2에 실린 4가지 주제 가운데 4) 이유태 예설 문제란 1674년 갑인예송 이후 송시열과 이유태 등 서인이 예론을 이유로 처벌받았는데, 이후 이유태가 예설을 바꾸어 처벌을 면하려 하였다고 송시열이 주장하였다. 이에 윤증이 확인해 보았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윤증은 송시열이 근거 없는 주장을 날조하여 서인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였다고 강하게 의심하였다.
5) 박세채의 강방운 문제란 1675년박세채가 지은 시구 가운데 운자(韻字)가 ‘강(江)’과 ‘방(邦)’인 시에 대한 논란을 말한다. 6) 을묘년 이후 왕복한 편지는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원인을 두고 송시열과 윤증이 논란을 벌인 것이다. 7) 탄방(炭坊)에 관한 일이란 탄옹(炭翁)권시(權諰)의 아들 권유(權惟)(1625~1684)의 처신에 대한 논란을 말한다. 권유는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 및 윤휴의 아들인 윤의제와 처남 매부 사이이며, 송시열의 맏사위이다. 갑인예송 이후 남인 정권 아래서 권유의 출사를 막아달라고 송시열이 윤증에게 요청하였지만 윤증이 이를 거부하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이 세 가지는 결국 모두 서인의 남인에 대한 대응에서 강경이냐(송시열) 온건이냐(윤증)의 논쟁이었다.
「별집」 권3, 4에 실린 신유년 이후 왕복 편지는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한 이른바 ‘신유의서(辛酉擬書)’를 두고 두 사람과 박세채 그리고 윤선거·윤증 문인들 사이에서 오고간 편지들인데, 본 자료에는 박세채의 편지와 윤증의 답장 2통만 실려 있다. 초점은 송시열과의 스승의 의리를 끊을 수 없다는 박세채의 주장을 윤증이 반박하는 내용이다. 나머지 편지(53~66)는 『명재유고』의 「서(書)」에 들어 있는데, 박세채와 주고받은 편지가 가장 많고, 그 외에는 안방준(安邦俊)의 제자인 서봉령(徐鳳翎, 1622~1687), 윤선거 문인인 성지선(成至善, 1636~1693), 조득중(趙得重, 1637~1711), 나량좌(羅良佐, 1638~1710), 그리고 유계(兪棨)의 아들인 유명흥(兪命興, 1648~1704), 김집의 손자 김만규(金萬圭), 조카 윤경교(尹敬敎)와 아들 윤행교(尹行敎, 1661~1725) 등에게 윤증이 보낸 편지이다. 남인 이현일(李玄逸) 문하이면서 윤증 문인이 된 정만양(鄭萬陽, 1664~1730)·규양(葵陽, 1667~1732) 형제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박세채와 주고받은 편지는 현종대 예송 관련 내용, 숙종대 최신 상소 이후 1685년부터 전개된 노·소론 사이의 상소를 통한 논전에 관한 내용 등이 있고, 1689년 송시열이 죽은 직후와 1690년 2월에 보낸 편지도 있다. 대체로 윤증과 송시열 사이를 중재하려는 박세채의 주장에 대해서 윤증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반박하는 내용이다. 나량좌·성지선·조득중 등은 윤선거 문인으로서 1687년 나량좌를 소두로 한 상소를 올려서 윤선거·윤증을 변론한 사람들이다. 이들과는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도 편지를 교환하면서 노론의 공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특히 왜란 당시 성혼이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 여러 군데 실려 있고, 안방준(安邦俊), 송준길(宋浚吉)에 대한 인물평도 보인다. 안방준 문인인 서봉령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동인(東人)인 황준량(黃俊良)을 정인홍(鄭仁弘)과 견주어 평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현일 문인인 정만양·규양 형제에게 보낸 편지는 북인인 박성(朴惺)이 이이와 성혼을 헐뜯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유명흥과는 유계 문집 편찬 문제, 김만규와는 김집의 『의례문해속』 편찬 문제를 논의하는 내용이다. 이들 가문은 노론에 속하였지만 윤증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이려는 의도에서 수록한 것 같다. 윤증의 재종 조카인 윤경교에게 보낸 편지는 윤증이 제문을 지어 윤휴의 묘에 제사지냈다는 소문이 근거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아들 윤행교에게 보낸 편지는 윤선거에 대한 온갖 모함은 모두 송시열에게서 나온 것이라면서, 윤선거는 자신에게 아비일 뿐만 아니라 스승이기도 한데, 송시열과 윤선거 두 스승 가운데 한 스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지, 스승과 아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당시 널리 퍼져있던 부사경중(父師輕重)론을 비판하였다.
윤추 회고록은 『명재유고』의 「사제(舍弟) 장령(掌令) 유사(遺事)」에서 3항목을 뽑아서 수록하였다. 자신이 송시열에게 자기 부친 윤선거 묘갈명을 청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 그가 윤휴를 유자(儒者)가 아니라고 비판했다는 것, 그리고 윤선거가 송시열과 윤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군자가 소인에게 속임을 당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는 내용 등이다.
맨 마지막으로 실린 송시열 문인 최신의 상소문은 회니시비를 조정의 정치 쟁점으로 만든 계기가 된 상소문이었는데, 「신유의서」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서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조목조목 반론하면서 윤증과 윤선거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1. 尹二書* ; 「與懷川」 碣銘旣成後往復 「二書」, 『明齋遺稿』 別集 권1, 민족문화추진회 간행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136책 504쪽 다(하단 우측면)~라(하단 좌측면, 이하 ‘총간 136-504다~라’로 줄임)
* 편지 맨 첫머리에 ‘尹二書’라고 명기되어 있어 이를 본 자료의 제목으로 삼았다. 일련번호는 해제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2. 尹三書 ; 「三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5가(상단 우측면)~나(상단 좌측면)
3. 懷答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5나~라
4. 玄石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5라~506가
5. 玄答懷曰 ; 「玄石答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6나~507가
6.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7가~다
7. 尹答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7다~509나
8. 懷答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09나~510가, 丙辰 九月*
* 이하 연월일은 『명재유고』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9. 懷答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0나~라
10. 尹三書 ; 「答懷川 三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0라~511가
11. 玄答懷 ; 「玄石答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1가~다
12. 尹答玄書 ; 「答朴和叔」,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1다~512가
13. 玄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2-나~라, 五月 六日
14. 懷與玄石 ; 「懷川與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2라
15. 玄抵尹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3다~514가
16. 尹答玄 ; 「答朴和叔」,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4나~517라
17.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7라~518가
18. 玄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8가~나
19. (윤증 답서)*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8나~라
* 편지에 아무런 제목없이 내용이 필사된 경우이다.
20. 懷答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1, 총간 136-518라
21. 蓬山語錄 ; 「蓬山語錄」,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19가~나
22. (윤증 편지) ; 「與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19나
23. 草廬書 ; 「草廬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19다~라
24. 草抵尹書 ; 「草廬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19라~521라
25. 尹與懷書 ; 「與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1라~522나
26. 尹答草書 ; 「答草廬」,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2다~라, 丙辰 至月 十二日
27. 懷書 ; 「懷川書」(2통),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2라~523가, 丙辰 十二月 二十日
28. 尹答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3다~524라
29. 懷書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4라, 丁巳 元月 十三日
30.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4라
31. 懷答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4라~525다, 丁巳 三月 十九日
32.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5다~526가, 丁巳 六月 二十二日
33. 懷答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6나~다
34.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6라
35. 尹答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6라
36. 尹抵草書 ; 「上草廬」,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6라~527나, 己未 十二月
37. 草答 ; 「草廬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7나~528가
38.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8가~나
39. 尹答 ; 「答懷川」 玄石江邦韻往復,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8나
40. 懷抵玄書 ; 「懷川與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8나
41. 玄石與尹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8나~529가
42.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9나~다
43. 尹答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9다
44. 尹與懷書 ; 「與懷川」 乙卯以後往復,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9다~라
45. 懷答 ; 「懷川答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29라~531가
46. 尹答 ; 「答懷川」(2통),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31가~532가
47. 懷書 ; 「懷川書」,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32가~라
48. 尹答 ; 「答懷川」,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32라~533라
49. 尹答 ; 「答懷川」(3통) 炭坊事往復, 『明齋遺稿』 別集 권2, 총간 136-534가~나
50. 玄書 ; 「玄石書」, 『明齋遺稿』 別集 권3, 총간 136-546가~547나
51. ‘甲午玄書’ ; 「答朴和叔」, 『明齋遺稿』 別集 권3, 총간 136-543라~544가
52. ‘明村便至’ ; 「答朴和叔」, 『明齋遺稿』 別集 권3, 총간 136-548-가~다
53. 與成汝中 至善 ; 「與成汝中 至善」(2통), 『明齋遺稿』 권16, 총간 135-365다~366가
54. 答鄭萬陽葵陽 ; 「答鄭萬陽葵陽」, 『明齋遺稿』 권25, 총간 136-11나~다
55. 與朴和叔 ; 「與朴和叔」, 『明齋遺稿』 권11, 총간 135-250가~다, 259가~262가*
* 이 편지는 쪽 별로 착간이 있다.
56. 附玄石答書 ; 「附玄石答書」, 『明齋遺稿』 권11, 총간 135-262나~263다
57. ‘前書所敎’* ; 「與朴和叔」, 『明齋遺稿』 건11, 총간 135-263다~라, 264다, 265라~266나, 268라
* 제목없이 필사되어 제목 대신 맨 앞부분 4글자를 제시하였다.
58. 附玄石答書 ; 「附玄石答書」, 『明齋遺稿』 권11, 총간 135-269가~라
59. ‘今日處義’ ; 「與朴和叔」, 『明齋遺稿』 권11, 총간 135-269라~270가
60. 答徐景翬鳳翎 ; 「答徐景翬鳳翎」, 『明齋遺稿』 권12, 총간 135-284다
61. 與趙士威 ; 「與趙士威得重」, 『明齋遺稿』 권13, 총간 135-309가~나, 311가~나, 312다
62. 答羅顯道 ; 「答羅顯道」, 『明齋遺稿』 권15, 총간 135-339나~다, 345나~다, 348라~349가, 353다, 354라, 355가~다
63. 答白采叔以受* ; 「與兪起甫命興」, 『明齋遺稿』 권18, 총간 135-411다~라
* 63.은 제목과 편지 내용이 어긋난 경우이고, 64.는 제목을 잘못 적은 것이다.
64. 答金君萬圭 ; 「答金君玉萬圭」, 『明齋遺稿』 권18, 총간 135-422라
65. 與再從子敬敎 ; 「與再從子敬敎」, 『明齋遺稿』 권27, 총간 136-68가~다
66. 與子行敎 ; 「與子行敎」, 『明齋遺稿』 권28, 총간 136-87가~나
67. 舍弟掌令遺事 ; 「舍弟掌令遺事」, 『明齋遺稿』 권30, 총간 136-130가, 131가~다
68. 司甕直長崔愼疏
서지적 가치
본 자료에 실린 내용은 최신 상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명재유고』에 실려 있으므로 내용상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명재유고』 「별집」과 비교해 보면 현행 「별집」에는 누락된 편지의 시기를 밝힌 부분이 보인다. 8. 회답(懷答)은 「별집」에 ‘병진(丙辰)’이라고 연도만 밝혔는데, 여기에는 ‘병진(丙辰) 9월’이라고 명기하였다. 13. 현서(玄書)와 26. 윤답초서(尹答草書)에는 「별집」에는 보이지 않는 날짜가 밝혀져 있다. 어떤 자료는 제목과 내용이 어긋난 경우도 있다. 63. 답백채숙이수(答白采叔以受)라고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여유기보명흥(與兪起甫命興)」(『명재유고』 권18), 즉 유명흥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다음 편지 제목은 64. 「답김군만규(答金君萬圭)」인데, 이것은 「답김군옥만규(答金君玉萬圭)」(『명재유고』 권18)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이것을 통해서 본 자료가 『명재유고』를 필사하여 「별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자료는 각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고, 영인본도 존재한다. 「회니왕복서(懷尼往復書)」라는 자료가 경희대(811.98-회28)와 성균관대 존경각(D04B-0022), 그리고 고려대(대학원 D6-A64)에 소장되어 있고, 여강출판사에서 펴낸 『아주잡록(鵝洲雜錄)』 영인본(『조선당쟁관계자료집(朝鮮黨爭關係資料集)』 39)에도 보인다. 경희대와 성균관대 소장 자료는 본 자료와 겹치는 부분이 적은 완전히 다른 자료이며, 고려대 자료는 여강출판사 영인본과 내용이 같은데, 본 자료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역시 완전히 다른 자료이다. 따라서 본 자료는 「회니왕복서」 가운데서는 독자적인 희소한 자료로 볼 수 있다.
내용적 가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용상의 독자성은 없지만,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편집 방법이 주목된다. 이것은 『명재유고』 「별집」 편찬 과정에서 나온 한 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별집」과 비교해서 회니시비를 대하는 소론 내 또 다른 분파의 존재를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용흠, 「숙종대 전반 회니시비와 탕평론 -윤선거·윤증의 논리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8, 한국사연구회, 2010.
김용흠, 「「당론서(黨論書)」를 통해서 본 회니시비(懷尼是非) -『갑을록(甲乙錄)』과 『사백록(俟百錄)』 비교」, 『역사와 현실』85, 한국역사연구회, 2012.
집필자 : 김용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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