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감계등록(勘界謄錄)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40409.TOYO_1080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등록 | 정치/행정-외교 | 사부-정법류
· 작성주체 이중하(李重夏, 1846-1917)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不分卷2冊 : 無界, 10行21字 註雙行 ; 23.8 X 16.5 cm
· 주기사항 第1冊表紙墨書: 初度乙酉(1885)春
第2冊表紙墨書: 再度丁亥(1887)夏
受贈記: 昭和十六年(1941)九月一日幣原坦殿惠貺
第1冊筆寫記: 丙午春
第1冊筆寫記: 丙午春移謄
一部 絲欄空卷: [大阪]木村製
本文에 朱墨, 赤色펜으로 校正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240

안내정보

1906년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청국을 상대로 간도 영유권 문제를 논의할 때, 1885년(을유년, 고종 22)과 1887년(정해년)에 조선과 청국이 백두산 및 두만강 인근 양국 국경선을 논의한 감계회담의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李重夏)(1846-1917)가 작성한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을 등사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책은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대한제국 정부에 소장된 이중하의 『감계사등록』을 등사한 것이다. 만약 『감계등록』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의 의견이나 새로운 내용이 첨부되었으면 통감부파출소가 편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등록의 기술 체제와 내용은 이중하의 『감계사등록』과 동일하다. 따라서 『감계등록』은 이중하 자료의 이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통감부파출소를 저자라고 하기보다는 이중하를 저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중하는 전주이씨 광평대군(廣平大君) 정안부정공파(定安副正公派) 17세손이다. 1846년(헌종 12) 11월 9일 경기도양평군(楊平郡)창대리(倉垈里)에서 현감을 지낸 이인식(李寅植)의 아들로 출생하여 1917년 72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는 후경(厚卿), 호는 이아당(二雅堂), 규당(圭堂) 또는 탄재(坦齋)이다.
1882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뒤 관찰사와 외부협판, 장예원경 등을 역임한 정부 고위관료이다. 1885년 안변부사였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파견되어 청국 측 대표인 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진영(秦瑛) 등과 함께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土門江) 지계(地界)를 답사한 뒤, 국경문제를 놓고 담판하였으나 청국 감계위원들의 강압적인 태도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이중하는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에 열린 감계회담의 대표가 되었다. 이때 청국 측 감계위원은 이중하의 주장을 무시하고 위협하였는데,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吾頭加斷, 國疆不可縮)”면서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4년 외무부협판이 되었고, 청일전쟁시 아산에서 청군을 영접하기도 했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慶尙道宣撫使)·영월영천안핵사(寧越永川按覈使)·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1895년 대구부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의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는데, 그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의 요구에 의해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투표로 11명의 대신후보자를 선출하였을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김종한(金宗漢) 등과 함께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12월 5일 원각사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공격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중하는 1남 3녀를 두었다. 그 중 외아들인 이범세(李範世)는 1889년 8월 경무대(景武臺)에서 유생전강(儒生殿講)을 통과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에 나아가 급제하였다. 1909년 장예원전사와 규장각부제학을 지내고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아버지 이중하를 따라 양평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마감하였다.
이중하는 식민지 치하에서 더 이상의 행적을 보이지 않았으나 항일의식이 분명했다. 그의 항일의식은 양평에 소재한 묘소에서 확인된다. 그의 무덤 상석에는 “유한정헌대부장예원경완산이공중하지묘배정부인창령조씨부좌(有韓正憲大夫掌禮院卿完山李公重夏之墓配貞夫人昌寧曺氏祔左)”라고 하여 일제 강점기임에도 ‘유한(有韓)’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범세의 무덤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유한’의 한(韓)은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중하는 자신의 무덤에 대한제국의 관료였다는 것과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새기게 한 것이다. 일제시기 전직 대한제국 관료는 물론 지방 유림들의 무덤에서도 ‘유한’이라는 글씨는 보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중하가 일제 통치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중하가 남긴 전적으로는 『이아당집(二雅堂集)』과 여러 편의 서찰, 공문서, 일기 등이 있다.
구성 및 내용
이 등록은 1885년과 1887년에 걸쳐 진행된 두 차례의 감계회담을 2권의 책으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다. 책의 표지나 주제로는 2권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으며, 감계회담의 해당 년도에 따라 구분하였다. 두 책의 내용은 2년의 간극이 있지만, 조선과 청국 간의 감계회담이라는 큰 틀에서는 연결되는 내용이며, 필체 상 동일한 인물이 작성한 것이므로 작성 시기의 선후에 맞추어 1, 2권으로 나눌 수 있다. 1권은 1885년인 을유년 기사내용이며, 2권은 1887년인 정해년이다. 따라서 편의상 1책은 『을유년 감계등록』, 2책은 『정해년 감계등록』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책명이라고 생각한다.
1권의 표지에는 “초도을유년(初度乙酉年)”, 2책에는 “재도정해년(再度丁亥年)”이라고 하였으며, 각 책의 내용은 간지에 맞추어 일지 형식으로 기재 되었다. 초도는 1885년 제1회의 감계회담을 의미하며 재도는 1887년의 2회의 회담을 말한다. 또한 두 책 모두 표지에 “병오춘(丙午春)”이라고 하였으며, 2책에는 병오춘 다음에 “이등(移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두 책이 병오년 봄에 등사되었으며, 1887년 이후 병오년인 1906년에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06년은 통감부시기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간도의 용정에 설치되어 한인들의 보호와 관리를 명분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이식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당시 간도파출소는 대한제국과 청국 사이에 진행되었던 간도 영유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양국에서 작성하였던 간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때 수집된 자료에 이중하가 작성했던 감계 회담 관련 자료들도 포함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감계등록』이었다.
이 책은 국내에도 이본이 존재한다. 동양문고본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감계사등록』(古2121-84-1)과 동일한 체제와 내용이다. 책명만 “감계사”가 아닐 뿐이지 전체 구성은 같다. 『감계사등록』의 원저자인 이중하의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동양문고본이 후대에 작성된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본이 첨삭이나 수정된 것이 적으며, 수록한 문서들의 배열이나 기재 형태가 정형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동양문고본을 후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현재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 20세기 초 통감부에서 외무성으로 보고했던 간도 관련 자료 중에서 이 책에서 인용한 감계사 자료들과 대조한다면 보다 정확한 작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명칭이 『감계등록』이지만 『감계사등록』을 등사하면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두 책 모두 표지 제본 없이 제목을 본문의 앞에 기재한 형태이고 서문과 목차 등이 없다.
책의 주요내용은 감계회담 과정에서 함경도의 각 관서 사이에 오고간 문서, 조선과 청국 사이에 오고간 외교문서들을 간지 일자에 맞추어 정리하였다. 본문 중에는 붉은 색으로 첨삭하거나 수정한 곳이 상당수 있으며, 간간이 일본어와 초서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과 청국간의 외교 문답서에 수정한 내용이 많으며, 간지를 이용하여 내용의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1책인 『을유년 감계등록』은 1885년 3월부터 11월까지의 보고문, 계초(啓草), 별단초(別單草) 등의 세 개 문서군으로 구성되었다. 보고문에는 감계회담의 배경과 이중하가 감계를 준비하고 진행하던 중에 해당 지역 관청들과 연락한 내용을 비롯하여 청국에서 파견한 감계위원이었던 진영(秦煐), 가원계(賈元桂), 덕옥(德玉) 등과 주고받은 문서들을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9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청국인들이 간도 거주 한인들의 가옥을 방화하고 핍박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대응을 바라는 지방의 보고문이 주를 이루며, 9월부터 11월까지는 이중하가 감계사에 임명된 이후 청국이 파견한 감계위원과의 회담 및 백두산 등의 답사 내용이다. 11월 말에는 양국 간에 합의가 도출되지 못한 점, 양측이 조사한 내용 등을 정리하였다. 계초와 별단초는 이중하가 감계회담 이후 고종에게 직접 보고한 것으로 두만강 인근의 국경 영역과 한인들의 거주상황 및 향후 간도 이주민에 대한 대처, 관리방법 등을 설명한 것이다.
2책인 『정해년 감계등록』도 『을유년 감계등록』과 체제가 대동소이하다. 다만 정해년 등록에는 청국 감계위원들이 주장한 내용들이 더 많이 기재되었으며, 청국과의 외교문서인 이문(吏文)이 많아 구두와 해석에 난해한 점이 많다.
주요 내용은 1887년 3월 19일 이중하가 감계회담을 위해 원산을 출발한 것에서, 4월 7일부터 이중하가 청국 감계위원과 회령 및 장파(長坡)에서 회담한 내용인 담초(談草)와 청국 감계위원과 주고받은 조회(照會) 및 조복(照覆) 등이 수록되었다. 이어서 5월 11일부터 조선과 청국 대표 간에 서한으로 감계를 질의 응답한 내용과 회령에서 직접 만나 회담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계초(啓草)에는 이중하가 감계를 마치고 돌아와서 회담 내용을 국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장계(狀啓) 초본이 실렸다. 마지막으로 1887년 감계회담의 발단이 되었던 1886년 3월 25일에 청국에서 조선정부에 보낸 총리각국사무아문주의등본(總理各國事務衙門奏議謄本)과 감계인원 및 의안을 알리는 1887년 4월 18일의 청국초간총국(招墾總局)에서 혼춘부도통아문(琿春副都統衙門)변무교섭승판처(邊務交涉承辦處)에 보낸 공문서가 첨부되었다.
서지적 가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이중하의 『감계사등록』의 이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여러 문서와 일기, 편지, 보고서 등의 원본 및 이본 등은 국내외 사료관 등에 남아 있어서 자료의 희귀성면에서는 다소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여러 곳에 산재한 감계회담의 자료를 회담의 일자별로 연대기 형태로 정리하여 감계의 전체 구도를 살피게 해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에서 이 책을 등사하면서 첨삭하고 수정한 내용을 통해 당시 일본이 수집하던 한국 자료들의 기술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등사한 내용을 수정한 것이 적색과 흙색, 붓과 연필로 한 것 등으로 구분되므로 최소 2회 이상의 교정을 거쳤으며, 초서를 잘못 등사한 것은 정자로 수정했다. 그리고 글자가 누락되었다고 판단한 곳은 두주에 일본어로 설명하여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또한 원문의 글자가 오류라고 판단되지만 그대로 등사하였다는 것도 두주에 표시하였으며, 등사한 문장의 높낮이도 원본과 동일하게 맞추려고 했다.
내용적 가치
이 등록은 이중하가 조선의 감계대표로 청국과 국경 회담에 임하면서 작성한 문서와 회담 내용 및 양국의 주장을 기록한 것이어서 19세기말 조선정부의 관료가 지녔던 영토관과 국가관이 나타나 있다. 또한 당시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백두산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부근의 상황을 조사해서 작성한 공식적인 보고서라는 점도 이 자료의 특징이다. 더욱이 조선 측의 자료만을 위주로 감계회담의 내용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청국 관원들의 대화와 문서, 편지 등도 실려 있기 때문에, 19세기말 조선과 청국간의 국경문제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책이다. 물론 조선 측 감계회담 대표인 이중하가 주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감계등록』은 등록이 가지는 성격에 맞추어 기재 문서의 내용을 한 글자의 누락도 없이 그대로 싣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적인 내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등록에 포함된 「백두산일기(白頭山日記)」, 「토문감계(土門勘界)」, 「문답기(問答記)」, 「조회담초(照會談草)」 등의 개별 문서들은 감계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별도의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자료이다. 더욱이 규장각에 이중하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1885년 1차 감계회담에서 백두산 일대를 논의한 『감계사문답』(규21038), 1887년 2차 감계회담의 보고서인 『감계사교섭보고서』(규11514-2), 1885년 1차 감계회담에서 백두산 일대를 답사한 『백두산정계비감계사교섭보고서(白頭山定界碑勘界使交涉報告書)』(규26302), 이중하가 1885년 12월 6일에 올린 『첩정』(규26677), 백두산과 간도에 관련된 문서를 정리한 『백두산정계비자료』(규252219) 등과 비교하면 19세기말 한국 북방 영역과 국경 및 간도에 대한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이중하의 자료를 이용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며 그의 문집은 해제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감계회담에 참여한 조선과 청국 위원들의 인물조사는 물론 감계의 전후에 대한 자료 정리도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 자료의 가치가 더욱 높다고 본다. 아울러 최근 이중하의 『감계사등록』이 국역되어 자료의 해석과 접근이 용이해진 것이 다행이다. 앞으로 동양문고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교하여 정본화 작업을 거친다면 감계회담의 전모가 밝혀질 것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이왕무 외,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이왕무, 「19세기말 조선의 疆域인식 변화-李重夏의『勘界使謄錄』을 중심으로-」, 『역사와실학』37, 2008.
이왕무 외, 『역주 감계사등록』2, 동북아역사재단, 2010.
집필자 : 이왕무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