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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명해사록문견잡기(金東溟海槎錄聞見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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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40417.TOYO_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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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사부-잡사류
· 작성주체 김세겸(金世濂, 1593-1646)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15張) : 四周單邊 半郭 27.5 x 18.6 cm, 靑絲欄, 14行28字 註雙行, 無魚尾 ; 35.7 X 22.9 cm
· 주기사항 表題: 金東溟海槎聞見錄
附錄: 東萊梁敷河傳 / 任相元 著
印: 在山樓蒐書之一
藏書記: 前間氏所藏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284

안내정보

19세기 말경 일본인이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1636년 통신사(通信使) 부사(副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관찰한 기록인 「聞見錄」,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의 「東萊梁敷河傳」을 채록하고, 신유한(申維翰, 1681-?)의 『해유록(海游錄)』과 김세렴의 『海槎錄』에서 기사를 발췌하여 개인적인 의견을 적은 필사본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金東溟海槎聞見錄』의 저자 동명 김세렴은 1593년(선조 26) 통천군수 김극건(金克鍵)과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허봉(許篈)의 딸인 양천 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이다. 1615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증광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24세의 나이에 예조좌랑 겸 시강원 사서를 제수 받았고, 홍문관 수찬 겸 지제교와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17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을 탄핵하였다가 이이첨 무리의 미움을 사 곽산으로 유배되었고, 강릉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수찬으로 복귀하였고, 병조좌랑, 헌납(獻納),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으며, 수의어사(繡衣御史)로 충청도를 살피고, 사가독서를 하기도 하였다. 1631년 이귀(李貴)를 탄핵하였다가 중신을 무함하였다고 하여 현풍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통신사 부사로 선발되었다. 대마도 도주 종의성(宗義成)과 가신인 유천조흥(柳川調興) 사이에 알력다툼이 생기면서, 그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간 국서를 개작한 일이 폭로되었다. 1635년 막부에서 종의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대마도의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고, 조선도 대마도를 위해 “장군습직(將軍襲職)”이 아닌 “태평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교린 관계가 확고하게 되었고, 예식과 국서도 형식에 맞게 정해졌다. 일본과의 관계는 안정되었으나, 이듬해 3월 귀국했을 때는 병자호란의 남은 참상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37년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백성을 구휼하였고, 이후 병조·형조·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41년 외직을 자원하여, 안변도호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근사』·『소학』·『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讀書錄)』 등을 간행하고 향약을 실시하였다.
강릉에 유배되었고 후에 이곳을 자주 왕래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동명(東溟)”이라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는 성당에 가까웠다. 전서, 해서, 초서를 모두 잘 하였으며, 의약과 점술 등에도 두루 통하였다. 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과 『해사록(海槎錄)』 등이 있다.
「東萊梁敷河傳」의 저자 임상원은 1638년 임중(任重)과 전주 이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염헌(恬軒)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였다. 1676년(숙종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공조참판,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공조참판, 공조판서, 우참찬,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저서로 『염헌집(恬軒集)』, 『교거쇄편(郊居瑣篇)』이 있다. 1711년 통신사 부사로 파견되었던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의 아버지이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金東溟海槎錄聞見雜記」 12장, 「東萊梁敷河傳」 2장, 부기(附記) 1장으로 이루어져있다.
「金東溟海槎錄聞見雜記」는 총 25칙(則)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은 일본 견문에 관한 것이다. 1칙은 국서개작사건의 폭로로 인해 1636년 통신사가 파견된 경위를 기술하였다. 2칙은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세계(世系)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물리치고 막부를 성립하게 된 경위 및 현 상황에 대해 기술하였다. 3칙은 천황의 기원에 대한 속설과 막부정치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4칙은 일본의 지세와 행정구역에 관한 기술이다. 5칙은 여정 중 본 일본의 명승 및 토지에 관한 기술이다. 6칙은 일본 물산에 관한 기술이다. 7칙은 일본의 의생활에 관한 기술이다. 8칙은 일본의 식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9칙은 일본의 풍속에 관한 기록이다. 10칙은 일본의 상례와 제사에 관한 기술이다. 11칙은 일본의 건물 및 주생활에 관한 기술이다. 12칙은 일본의 문자생활에 관한 기술이다. 13칙은 일본의 절일(節日)에 관한 기술이다. 14칙은 일본의 의복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15칙은 일본의 관제(官制)에 관한 기술이다. 16칙은 일본의 봉건제에 관한 설명이다. 17칙은 일본의 수세(收稅)에 관한 기술이다. 18칙은 일본의 전지(田地) 및 병력 규모에 관한 기술이다. 19칙은 일본의 부역(賦役)에 관한 기술이다. 20칙은 일본의 위치에 관한 기술이다. 21칙에서 24칙은 일본 각 지역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기록한 것이다. 25칙은 사행 명단이다.
「東萊梁敷河傳」는 임상원이 95세의 양부하(梁敷河)에게 직접 얘기를 듣고 그의 생애를 기록한 형태로 되어 있다. 양부하는 1581년동래에서 출생하였는데, 할아버지 양조한(梁祖漢)은 훈도(訓導)를 역임한 인물로서 아우 양통한(梁通漢)과, 1592년동래성이 함락되었을 때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죽었다. 이때 12세였던 양부하는 대마도 도주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 양가의 자제들과 함께 풍신수길에게 바쳐졌다. 풍신수길의 눈에 든 양부하는 일본어를 배우고 풍신수길의 곁에서 총애를 받게 되었다. 강화사로 온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풍신수길이 비밀리에 회담할 때 양부하가 배석하였고, 심유경이 풍신수길을 속여 독약을 먹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독살은 성공하여 몇 개월 후 풍신수길은 앓다가 죽었다. 그 후 일본은 모리휘원(毛利輝元)의 서군과 덕천가강의 동군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양부하는 모리휘원에 소속되었다. 모리휘원은 싸움에서 패하여 영지가 축소되었고, 양부하는 그의 허가를 받아 배를 마련해 남녀 82인과 함께 대마도에 갔다. 39세의 나이에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부하가 19년을 일본에 있었으나 기록이 없어, 임상원이 이를 기록하였고 인명과 지명은 일본어를 병용하였으므로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을 참조하였다고 하였다.
부기(附記)는 신유한의 『해유록』과 김세렴의 『해사록』에서 한 구절 씩 인용하여 일광산(日光山) 치제(致祭)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질정한 것으로, 기록한 이는 이 책의 편자로 추정된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표지에 “前間氏所藏”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첫장에 “在山樓蒐書之一”이라고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1)의 장서였음을 알 수 있다. 마에다 교사쿠는 본래 쓰시마 이즈하라(嚴原) 출신으로, 1891년 유학생의 신분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통감부(統監府)와 총독부(總督府)의 통역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조선 체류 중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조선의 고서를 수집한 일이다.
본서는 필사자가 별도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문집 소재 문장 가운데 일본과 관련된 문장인 김세렴의 『해사록』의 견문록과 임상원의 「동래양부하전」을 채록하였고, 부기에 日光山 치제 및 차천로(車天輅)의 일본 방문에 관한 사실을 질정한 것으로 보아, 고전적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타 기록의 확정을 위해 검토한 내용을 일본인이 기록하였으며 정황상 마에다 교사쿠 혹은 그 주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구한말 일본의 조선 침략이 현실화되기 이전 조선 문헌의 채록 과정과 조선 연구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내용적 가치
본서의「金東溟海槎錄聞見雜記」은 『동명집(東溟集)』 10권에 실려 있는 「문견잡록(聞見雜錄)」과 몇 군데 글자의 변이가 있고 자세한 사행원의 명단이 생략되어 있을 뿐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본문 중간에 필사자에 의한 다수의 주석이 들어가 있고, 역사적 사실 및 지명, 인명에 관하여 다른 문헌 기록과 대조하거나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필사자는 김세렴의 『해사록』 이외에도 신유한, 오윤겸(吳允謙, 1559-1636),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차천로(車天輅)(1556-1615)의 일본 기행에 관한 기록을 널리 수집하여 보았고, 『화한역대기(和漢歷代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繪)』 등의 서적을 참조하였다. 부기의 내용은 주로 일광산(日光山) 치제와 덕천가광의 사당인 동조궁(東照宮)의 형성에 관한 것에 집중되어 있다.
필사자의 주석과, 김세렴의「문견잡록」과 임상원의「동래양부하전」이 함께 채록된 점, 일관산 치제에 대한 관심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메이지 초기 조선 연구에 선두에 있었던 일본 학자들의 관심이 어느 쪽에 집중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백진우,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 소장 한국 고서에 대해 : 자료 개관·연구 현황·연구 과제·특징적 면모를 중심으로」, 『열상고전연구』 36, 열상고전연구회, 2012.
집필자 : 구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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