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시종통론(時種統論)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40423.TOYO_1623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의가류
· 작성주체 이종인(李鍾仁, ?-?) 찬집자 역대인물바로가기
이종원(李鍾元) 의정자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45張) : 無界, 14行24字 註雙行 ; 29.0 X 20.5 cm
· 주기사항 印: 在山樓蒐書之一
藏書記: 前間氏所藏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3-146

안내정보

조선 순조 때 편찬된 두창(痘瘡, 천연두) 전문서인 이종인(李鍾仁)의 『시종통편』을 재편집한 필사본 의서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 이종인은 자가 수보(壽甫)이며 본관이 완산(完山)이다.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자료는 바로『시종통편』 및 본서의 서문(서문의 내용은 일부 글자출입을 제외하면 서로 동일하다)이다. 본서 및 저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서문을 번역하여 보이면 아래와 같다. (번역 및 원문에 대한 표점은 해제 작성자가 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두방(痘方)을 거칠게나마 이해하고 있었으나, 무오년(1798) 겨울 비로소 읍재(邑宰) 박제가가 소장한 종두서를 보았더니 증세에 따른 적절한 처방이라 기이하게 여겼다. 마침내 이것을 전수받고 널리 『의종금감』․『난대궤범』․『종두신서』 등을 살펴보니 실려 있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강희자전』의 ‘두(痘)’자 주에도 두즙(痘汁)을 콧속에 넣어 두창을 피어오르게 하는 설이 있었다. 이처럼 종두설은 여러 서적에 다양하게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집에서 이를 시험한 뒤 마을에서 시험하고, 마을에서 시험한 뒤 여러 읍에 시험하였더니 과연 두독(痘毒)이 가벼워지고 두립(痘粒)도 성글어져 열이면 열이 온전해지고 백이면 백이 살아났다. 훗날 주순하(朱純嘏)가 지은 『두진정론』을 보게 되었는데, 주손하는 예장(豫章) 사람이었다. 강희(康熙) 연간에 종두법(種痘法)으로 태의원(太醫院)에 뽑혀 들어갔으니 그렇다면 중국 전역에 종두가 시행된 것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못 의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에 비방을 무릅쓰고서 잡술(雜術)이라 낮추어 보지 않고 고심하여 종두법을 시행하기를 20년에 목숨을 살려낸 자가 천백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진정 어린아이를 살리는 신방(神方)이었던 것이다. 대개 종두(種痘)는 불치의 증세가 아니다. 그 치료법이 시두(時痘)와 다르지 않은데도 세상 사람들은 종두를 한다면 단지 종두법만 알지 치두법(治痘法)을 알지 못한다. 백에 하나의 실패도 없으니 내가 이미 조선에 이 방법을 시행하여 두가(痘家)의 요법(要法)을 잘 알고 있다. 목숨을 잃는 것을 구할 생각으로 이를 전하지 않는다면 어찌 진실로 사람을 살리기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겠는가? 이에 여러 의가(醫家)들의 중요한 설명을 요약하고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시종통론』이라 이름 하였다. 한편으로 시종(時種)의 근본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自少時畧解痘方, 歳戊午冬, 始見種痘書於洞邑令朴齊家所藏, 臨症指南異之. 遂博搜[傳授], 廣考『醫宗金鑑』․『蘭臺軌範』․『種痘新書』, 無不備載, 『康熙字典』痘字註, 亦有痘汁納鼻痘出之説. 其雑出書籍者如此. 於是乎, 自家而試諸郷, 自郷而試諸邑, 果痘毒輕痘粒稀, 十全而百活. 後又得見朱純嘏所著『痘疹定論』, 純嘏乃豫章人也. 康熙間以種痘選入太醫院, 然則種痘之行于中國也已久. 我國創見之, 故人頗疑信之. 余乃不避謗毁不卑雑術, 苦心行之二十餘年, 所全活者不知千百計, 眞保嬰神方也. 大低種痘無不治之症, 治法與時痘無異, 而世之以種痘行者, 但知種痘之法, 不知治痘之方. 不無百一之失, 余既始此方於東[我]東, 又知其痘家要法, 而不思所以救其失[夭]壽, 其傳則豈好生之誠心也哉也? 乃撮合諸家要語, 参以己所經歷, 輯成一書, 名曰『時種通論』. 一以示時痘[種]之本, 非二途云.)
위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 이종인은 영평부사(永平府使)로 있던 박제가가 소장했던 종두법 관련 처방을 전수받은 뒤 이를 시행하여 임상에서 효험을 보았고, 훗날 『두진정론』 등 두창과 관련된 최신의 주요 의서들을 섭렵하고 자신의 임상경험을 압축하여 『시종통편』을 저술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도 최초의 종두 시행과 관련한 언급이 보여 이종인에 대한 단상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애초에 의주 사람이 북경에서 종두방(種痘方)을 얻어오고, 이것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이기양(李基讓)의 장자(長子)가 정약용에게 보였다. 그러나 두어 장에 불과해 내용 파악이 어려워 임상에 적용을 하지 못하다가 박제가가 초(抄)해둔 처방과 합하여 보고 한 편의 간단한 처방서를 짓게 되었다. 이것으로 박제가가 영평현에서 이방(吏房), 관노, 그리고 그의 조카 등에게 시험하여 효험을 얻고, 의사 이씨(李氏)에게 처방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의사 이씨가 바로 이종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음해 정약용은 장기(長鬐)로 귀양을 가고 박제가는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으며, 의사 이씨는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고문을 받아 종두법이 단절되는 듯했다. 그러나 7년 뒤 상주(尙州)를 시작으로 다시 종두법이 시행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에 의하면 이때 종두법을 영남에 전한 사람이 바로 본서의 저자인 이종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본서의 서문 내용과 일치하는 사항들이므로 저자에 대해 자세히 알게 해주는 자료들이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표제 및 권수(卷首)에는 모두 ‘時種通論’이라 되어 있다. 이종인의 두창 전문서로 유명한『시종통편(時種通編)』과 내용들이 주요한 많은 부분 일치하지만, 다음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다. 『시종통편』은 상․하 2권본이 통행되고 있으나, 첫 부분이 이 책과는 목차를 달리한다. 『시종통편』은 저자 이종인의 서문 다음에 그의 동생인 이종원의 발문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種痘始終凡例」가 나온다. 책의 목적이 시두(時痘)와 종두(種痘)에 대해 모두 논하고, 처치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행 판본의 구성이 더 조직적이며 임상에서 활용성이 더 커 보인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시종통편』과 거의 일치하지만 제목을 말한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변개를 하면서 『시종통편』의 일부분을 생략해 놓고 있다. 이 때 문장의 생략이 없는 『시종통편』 쪽이 말이 전체적으로 어기가 고르기 때문에 이 책이 『시종통편』보다 먼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시종통편』을 기준으로 제목을 변개하고 서문 앞부분의 의론 부분을 많이 삽입하여 새로운 서적을 만든 형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료에서 아쉬운 점은 기존 통행본 『시종통편』에 비해 구조적인 조리가 많이 떨어지고, 서문 다음에 부가된 의론들이 다소 난삽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時種通論’이라는 권수제 아래 ‘完山李鍾仁壽甫纂輯’, ‘家弟鍾元君善議定’, ‘延城李復延君七參攷’가 각각 1행씩을 차지하며 적혀 있다. 이곳에 보이는 종원(鍾元)은 이종인의 동생으로, 본서의 발문을 작성한 이종원을 말한다. 그 아래에는 제목 없이 이종인의 서문이 있으며, 그 아래부터 조문들이 제목 아래에 나열되어 있다.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痘之毒如火說」, 「毒輕當種」, 「毒重當種」, 「不信不如不種」, 「自出好者如種」, 「痘有種之而發熱, 痘一粒不見, 終身不復再出」, 「不明醫理, 不識藥性, 能保無數小兒」, 「小兒有痘疹三關, 年至古稀者寡」, 「順險逆」, 「種痘切防痘家蒙蔽」, 「權宜賦」, 「治法」, 「天月二德日」, 「人神所在日忌不可種」, 「五善歌」, 「七惡歌」, 「蔘芪飮」, 「蔘芪飮加減禁忌法」, 「斷乳畫眉方」, 「虛實論」, 「三陽」, 「三陰」, 「跋」, 「第種痘始終凡例」, 「種痘預先調治法」, 「種痘兒形氣精神論」, 「種痘法」, 「指南賦」, 「玉髓賦」, 「金鏡賦」, 「百日內出痘歌」, 「表裏血氣虛實論」, 「虛實相似論」, 「辨虛實次第用藥法」, 「氣血榮衛論」, 「七暈論」, 「五陷論」, 「伏陷論」, 「種痘源因」, 「發熱論」, 「發熱賦」, 「驚搐」, 「腹痛」, 「汗下辨」, 「腰痛」, 「嘔吐」, 「泄利」, 「渴」, 「大小便泌」, 「咳嗽」, 「喘急」, 「自汗」, 「譫妄」, 「見點賦」, 「見點時」, 「起脹賦」, 「起脹時」, 「灌濃賦」, 「灌濃時調治法」, 「灌濃時諸症」, 「收靨賦」, 「收靨時調治法」, 「收靨後諸症」, 「附室女孕婦年長男女出」, 「溫元散」.
이후 171종의 처방을 나열한 뒤, 「藥補辨疑」라는 제목 하에 약재명을 나열하고 몇몇 증상과 처방 등을 나열하고 있다.
서지적 가치
여타 전염병 관련 서적과 마찬가지로 두창을 문제 삼은『시종통편』은 당시에 급히 인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목판본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목판본의 소장처는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계명대학교 등이다. 필사본은 도처에 소장되어 있으나 한독의약박물관의 광서 을축(光緖乙丑, 1870) 필사본이 유명하다. 이들은 의학서적의 성격상 내용에 출입이 없다.
본서는 『시종통편』에 기초하면서도 『시종통편』과는 달리 서문 뒤에 종두 및 시두에 대한 이론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놓았다. 이로 인해 구성이 다소 난삽해지고 임상활용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당시 새로운 이론들이 필사를 통해 급속히 흡수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일면이 있다.
내용적 가치
오늘날 한의학 시장에서와는 달리 두창은 조선 의료에서 매우 중대한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여 전염에 대한 기전을 전혀 알 수 없던 때에, 종두가 시두와 마찬가지이며 종두를 통해 시두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학설이 빚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최초의 인두법 시행과 그 방식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 서적은 의료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에서는 서문 및 각 조문을 통해 종두(種痘)와 시두(時痘)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두창 치료의 각종 정보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종두시종범례(第種痘始終凡例)」에서는 종두 시의 유의점뿐 아니라 두창 일반에서의 시기적 증후나 그 증후에 따른 처방, 금기 등에 대해 적시해놓았다. 특히 시두보다는 종두를 강조하여 「종두예선조치법(種痘預先調治法)」, 「종두아형기정신론(種痘兒形氣精神論)」, 「종두법(種痘法)」, 「종두원인(種痘源因)」 등을 배치해놓았다. 뿐만 아니라 책의 뒷부분에서는 두창 관련 각종 처방을 제시함으로써 임상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종두법」 조항에서는 종두의 방법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대개 인두법에는 4가지의 방식이 있다고 전해진다. 장묘법(漿苗法), 의묘법(衣苗法), 한묘법(旱苗法), 수묘법(水苗法)이 그것으로, 장묘법은 두립(痘粒)의 고름을 짜서 이것을 베나 면에 적셔서 콧구멍에 넣는 것이고, 의묘법은 두창으로 고름이 생긴 아이의 속옷을 벗겨서 건강한 아이에게 입히는 것이고, 한묘법은 두가(痘痂)를 곱게 가루 내어 거위 깃털로 만든 대롱 끝에 채워 콧속에 불어넣는 것이고, 수묘법은 두가(痘痂)를 곱게 가루 내어 물에 적신 뒤 솜에 흡수시켜 콧속에 밀어넣는 것이다. 이 자료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인두법 가운데 수묘법을 행하고 있어서 조선후기 우리나라에서는 수묘법이 크게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인두법 처치 방식인 동시에 지석영(池錫永)의 우두법 이전에 두창에 대한 예방의 구체적 방식이며, 『시종통편』, 『여유당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적지 않은 인명을 살려낸 처치법인 것이다.
본서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다른 자료와의 연계를 통해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새로운 의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실제 의료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한다는 것에도 있다. 우리나라 인두법은 중국에 비해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나, 정약용을 시작으로 박제가를 거쳐 이종인에게 넘어가 실용화되어 두창이 창궐했던 시기에 수많은 사람을 살려낸 것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업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초(抄) 작업이 단순히 심심파적 유희가 아니라 실제 생활을 변화시키는, 오늘날의 정보화와 맞먹을 수 있을 정도의 행위임을 알게 해준다. 이는 실학자들의 여러 활동 중 의학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조명이 필요한 한 사례를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출판, 1963
집필자 : 박상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