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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방(經驗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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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40423.TOYO_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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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종교/풍속-민속 | 자부-의가류
· 판종 목판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不分卷2冊 : 四周雙邊 半郭 18.8 x 13.9 cm, 有界, 10行17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3.4 X 17.4 cm
· 주기사항 書名: 表題임
印: 金濟謙印 ; 在山樓蒐書之一
藏書記: 前間氏所藏
內容: 第1冊, 痘瘡經驗方 / 朴震禧 編. -- 第2冊, 經驗方彙編 / 李義泰 彙集
第1冊은 上下內向3葉花紋魚尾 混入
第2冊은 筆寫本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3-163

안내정보

박진희(朴震禧)의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과 이석간(李碩幹) 등 4인의 명의(名醫)가 중심이 되는 처방을 이의태(李義泰)가 휘집(彙集)한 『경험방휘편(經驗方彙編)』을 각각 1권으로 하여 ‘경험방(經驗方)’이라는 제목 하에 묶은 서적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본서는 서적의 형성에 있어 전혀 연관이 없는 『두창경험방』을 건권으로 삼고 『경험방휘편』을 곤권으로 삼아 ‘경험방’이라는 틀 아래 묶어놓은 책이다. 두 서적에 대해 내용변경도 없을 뿐 아니라, 건곤이 목판본이며 언해가 부기되어 있으나, 곤권은 필사본 경험의서이다. 이렇듯 전혀 상관이 없는 의서가 같은 제목 하에 묶이는 것은 임상을 위한 편의에 따라 의서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두 서적 각각에 대해 설명을 가하기로 한다.
『두창경험방』의 저자인 박진희는 효종 대부터 현종 대까지 궁중에서 어의(御醫)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두창 관련 치료가 뛰어나 관직에 오르고 상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반 자료가 없어 생몰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상인 상태이다.
『경험방휘편』은 오늘날 『사의경험방』으로 불리는 책과 거의 동일하며, 『사의경험방』의 ‘사의’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저자는 4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석간(李碩幹), 채득기(蔡得己), 박렴(朴濂), 허임(許任)으로, 본서는 이들의 경험방들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의 경험방을 조합해서 형성되었다. 4인 외에 여러 원저자가 있다는 것은 본문에 출전을 표시한 ‘李’, ‘朴’, ‘蔡’, ‘許’, ‘東’, '生', ‘聞’, ‘本’, ‘杏’ 등의 표시가 다양하게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4인의 명의가 이들이 당시에 서로 교류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크게 유명을 떨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석간(李碩幹, 1509-1574)은 공주 이씨로 자가 중임(仲任), 호가 초당(草堂)이며 생원 이성(李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당대에 유명 인사와 교류하고 퇴계이황을 시료(施療)할 정도로 명망 있는 유학자였으나, 의학에 매우 밝아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괴이한 병을 고쳐주고 황제에게서 천도(天桃) 씨로 만든 한 쌍의 술잔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술잔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의 의술은 가전(家傳)되어 그의 후손인 이의태(李義泰, 1700년경)에 의해 본서가 남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산청군 한의학박물관 소재 『이석간경험방(李石澗經驗方)』을 발굴한 바 있는데, 처방이 매우 독특하고 지방색이 뚜렷하며 다른 서적에서의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李碩幹’과 ‘李石澗’은 동일인물일 것으로 파악된다.
채득기(蔡得己, 1600년경)에 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사의경험방』의 판본들과 『삼의일험방』, 『광제비급(廣濟秘笈)』의 인용제서(引據諸書) 등에서는 ‘蔡得己’ 혹은 ‘蔡得已’로 적고 있는데, 이 ‘蔡得己’ 혹은 ‘蔡得已’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 확보가 미답인 상태로 남아 있다. 다만, 이 인물이 채득기(蔡得沂, 1605-1646)라는 설이 있다. 그는 인천(仁川) 사람으로 자(字)가 영이(詠而), 호(號)는 우담(雩潭), 학정(鶴丁)이다. 학문이 깊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천문·지리·복서·음률·병서 등에도 두루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화산(華山)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은거하였고, 다시 상산(商山)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후에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된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과 세자·대군들을 받들기도 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상의사(尙義祠)에 제향되었다. 시문집으로 『우담유고(雩潭遺稿)』 2권 3책을 남겼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 왕자들을 호종하여 심양(瀋陽)에 갔을 때의 여러 시문들을 수습한 것이다. 채득기(蔡得沂)의 의술에 대해서는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인조 14년에 일본으로 사신 갔다가 이듬해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해사록(海槎錄)』 병자년(인조 14, 1636) 8월 22일(癸巳) 기사에 보인다. 김세렴은 『해사록(海槎錄)』에서 “교수 채득기(蔡得沂)가 침술(鍼術)에 신묘한데…….” 라고 하여 당시 채득기의 의술이 유명을 떨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蔡得己’와 ‘蔡得沂’가 동일인물인지는 미정의 상황이다. 다만 이석간, 채득기, 박렴 등의 세 의가의 경험방을 중심으로 꾸며진 『삼의일험방』에서는 채득기(蔡得己)의 경험방 말미에 ‘학(鶴)’이라고 적고 있어, 이는 채득기(蔡得沂)의 호인 학정(鶴丁)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박렴(朴濂, 1600년경) 역시 17세기 활동했던 의가이며 호는 오한(悟漢)이다. 그의 생몰연대 및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허임(許任, 1570?-1647?)은 임란직후 등장하여 큰 명성을 떨쳤던 침구의가이다. 그는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학에 입문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호종(扈從)하게 된다. 그는 내의원에서 침의(鍼醫)로 활동하면서 탁월한 치료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왕의 신임 속에서 마전군수(麻田郡守), 실첨지(實僉知) 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영평현령(永平縣令)(1616), 양주목사(楊州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1617), 남양부사(南陽府使)(1622)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자신의 의학적 견해를 모아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1644)을 저술하였다.
구성 및 내용
건곤에 해당하는 『두창경험방』은 표지 상단 왼쪽에 ‘經驗方 乾’이라 하고 오른쪽에 ‘痘瘡’이라 하였다. 곤권에 해당하는 『경험방휘편』은 표지 상단 왼쪽에 ‘經驗方 坤’이라 하고 오른쪽에 ‘雜病’이라 하였다.
건권은 권수제가 ‘痘瘡經驗方’이며, 두창 증세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목차를 적시하면 아래와 같다.

「稀痘方」, 「延生第一方」, 「三豆飮」, 「辨豆法」, 「飮食」, 「禁忌」, 「發熱三朝」, 「出痘三朝」, 「出痘終日」, 「出痘時變痘經驗」, 「起脹三日」, 「貫膿三日」, 「收靨三日」, 「痘瘡經驗方跋」

「稀痘方」부터 「禁忌」까지는 진단이나 일반적 처방 및 금기사항을 제시하였다면 그 다음부터 발문 앞까지는 두창이 진행되는 과정마다 처치법과 처방을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으나, 책 하나에 내용을 가지런히 모아놓았을 뿐 아니라 언해를 부기하여 임상에서의 활용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마지막에 붙어 있는 발문은 신묘년 11월 이세항(李世恒)이 작성한 것이다.
곤권은 권수제가 ‘經驗方’이며 그 아래에 목차를 적시한 다음, 「萬藥名記」라는 항을 통해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본초 약제를 14개의 부(部)로 나누고 292개의 약제에 대해 목록과 향약명칭을 언해로 부연하여 임상에서 쉽게 발생하는 약물에 대한 혼동을 최소화해 놓았다. 그 다음에 다시 서적명이 나오는데, ‘經驗方彙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4인의 원저자를 기술하고 ‘本草抄’, ‘東醫寶鑑抄’, ‘聞見錄抄’ 등을 써서 이 책의 원내용의 저자 및 출처 등을 밝힌 후, 이 책을 휘집한 사람에 대해 적고 있다. 즉 ‘李碩幹孫義泰彙集’이라는 8자가 보이는데, 책 표지의 ‘前間氏所藏’이라는 글자와 조합해보면 현재까지 존재 확인이 되지 않던 이의태의 『경험방휘편』이 바로 이 책임을 알 수 있다. 미키사카에(三木榮)가 『경험방휘편』에 대해 ‘前間恭作’이 소장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후는 서문이나 발문 없이 내용이 시작된다. 항목들을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頭部」, 「耳部」, 「目部」, 「鼻部」, 「口部」, 「咽喉部」, 「胸部」, 「心部」, 「腹部」, 「肩背部」, 「腰部」, 「身部」, 「風部」, 「厥逆部」, 「瘧疾部」, 「疝部」, 「痔疾部」, 「痢疾部」, 「霍亂部」, 「咳嗽部」, 「飮食部」, 「嘔吐部」, 「消渴部」, 「汗部」, 「瘡腫部」, 「疸部」, 「眠睡」, 「雜病」, 「婦人門」, 「姙娠雜病」, 「小兒門」, 「痘瘡經驗方」

이상의 목차는 통행하는 『사의경험방』과 같으나 이상의 목차 뒤에, 「辟瘟新方」을 부기하여 온병에 대해 8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본문에는 인체 증상들을 인체부위, 병명, 부인, 소아 등 특성에 맞게 33가지 부(部)로 분류하고, 각각의 부(部)에 대해 세부 병증들과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서지적 가치
의서는 특성상 필사본이 많으며 여러 의서들이 섞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혀 다른 체계의 두 서적을 각각 건권과 곤권으로 묶어 같은 체제 하에 놓으려는 시도는 다소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두창경험방』은 여느 전염병 관련 인행 의서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희귀한 자료라 할 수 없다. 현재 목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고려대, 계명대, 영남대, 숙명여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필사본은 도처에 소장되어 있다.
『경험방휘편』은 의사학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니는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의서 가운데 『사의경험방』은 체제가 간결하고, 한 처방에 사용되는 약재 수가 적으며(단방이거나 2-3가지 약재가 주종이다), 약재들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한의학의 자국화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져 왔다. 열람의 용이성과 처방 구사의 용이성으로 인해 조선후기에는 매우 유행하는 처방서가 되었고, 목판본뿐 아니라 많은 필사본을 남겼으며 또 수진본까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책의 4명의 원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있었으나 이 원저자의 책을 누가 모아서 편집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고, 다만 미키 사카에의 『조선의학사급질병사(朝鮮醫學史及疾病史)』를 통해 이석간의 후손 이의태에 의해 『경험방휘편』이 나왔으며 이것이 『사의경험방』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었다. 그런데 이 서적의 경우, ‘經驗方彙編’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소장자가 일치하여 미키 사카에가 말한 바로 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게다가 맨 마지막에 부기되어 있는 「辟瘟新方」을 제외하면 목차구성 및 내용이 『사의경험방』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어 『사의경험방』의 편자가 바로 이의태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현재 『사의경험방』은 ‘경험방’ 혹은 ‘사의경험방’이라는 제목으로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대학교 등 많은 곳에 소장되어 있으나, 국내에 ‘경험방휘편’이라는 제목의 서적은 없으며 이 자료가 유일한 것으로 사료된다.
내용적 가치
『두창경험방』은 두창에 대해 일반적인 사항들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면서도 일시별로 진행사항에 맞게 처방 및 금기를 함께 기술하고 있어 열람이 매우 용이하여 임상에서의 활용이 매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언해를 부기함으로써 임상에서의 활용을 극대화한 면이 보이며, 오늘날에는 국어연구의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경험방휘편』은 우리나라 의학의 단초를 연 서적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의학의 정체성을 최초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동의보감』이었다. 하지만 『동의보감』이 풍부한 내용과 임상에서의 활용도가 큰 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이 쓰기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난감한 사항이 있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많은 처방들이 고급처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약재 값이 만만찮을 뿐 아니라 구하기 자체가 난감한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약재 수급 자체의 불안정성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여러 서적에서 적지 않게 지적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방에 가까운 간단한 처방들을 모으되, 처방에 쓰인 약재들이 우리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약재로 되어 있는 처방집을 손에 넣는 것은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처방들을 대거 수록한 서적이 나왔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험방휘편』인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곳에서 소장한 『사의경험방』은 바로 이 책이 모태가 되었으며, 오늘날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조선후기에 얼마나 이 책이 유행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약재 수급의 불안정성은 우리나라 의학의 자생적 발전이라는 특이하면서도 역설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다.
참고문헌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출판, 1963.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93.
안상우 외, 『사의경험방․의가필용』, 한국한의학연구원, 2007.
오준호 외, 「조선 중기 유의 이석간의 가계와 의약사적 연구」, 『한국의사학회지』26권 1호, 한국의사학회, 2013.
오준호, 「16세기 조선 의서 이석간경험방에 나타난 전통지식 분석」, 『한국한의학연구원』17권 1호, 한국한의학연구원, 2013.
집필자 :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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