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50331.OGURA_014
· 분류 |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잡저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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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종 | 필사본 |
· 발행사항 |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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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태사항 | 1冊(105張) : 無界, 10行字數不定 ; 31.6 X 20.0 cm |
· 주기사항 |
表題: 敬覽 書根題: 敬覽 農岩 |
· 현소장처 |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 청구기호 | L45032 |
장수 |
제목 |
작자, 저작시기, 내용 개요 |
관련 자료 |
2a-2b |
(어졔) 임오 졍월 이십팔일 |
-1702년(숙종28) 1월 28일 숙종이 김창집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문집(『문곡집(文谷集)』)을 읽고 어제시를 지어 김창집에게 내림.(김수항은 1689년(숙종6) 기사환국 때 유배지에서 사사됨.) |
『숙종실록』 28년(1702, 임오) 2월 10일(임술). |
3a-3b |
(슉어졔) 좌의정 김□□화샹찬 |
-1713년(숙종39) 김창집이 청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자, 숙종은 좌의정에 임명하고 화사(畵師)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화상찬을 지음. |
金信謙(1693-1738), 「伯父夢窩府君行狀」, 『橧巢集』 卷9. |
3b-7b |
(몽와샤뎐) 본월 이십팔의 신이 도총부 딕녀의 업드여 |
-1702년(숙종28) 김창집이 도총부에 숙직하고 있을 때 숙종이 내려준 어제시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숙종에게 올린 전문(箋文). |
金昌協, 「代伯氏謝賜御製詩箋」, 『農巖集』 卷26. |
7b-8b |
(숙어졔) 샤은겸 동지졍김○○ 부윤지인 셔장노셰하 부연시(연경갈)인견 |
-1712년(숙종38) 11월 김창집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사신 갈 때, 숙종이 사행(使行)을 보내면서 지어준 시 2수. |
金昌集, 「燕行時肅宗大王御製贐章」, 『夢窩集』 卷3. |
8b-9a |
셩산길 우셔 우연히 단뉼을 읇프니 마 신 명이잇더라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賜死)의 명을 듣고 지은 시. |
金昌集, 「星山路上, 偶吟短律, 適聞有賜死之命(四月二十七日)」, 『夢窩集』 卷4. |
9a-9b |
졔겸의게 브티노라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아들 김제겸에게 보낸 시. |
金昌集, 「寄濟謙(四月二十七日)」, 『夢窩集』 卷4. |
9b-10a |
승지의게 브티노라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아들 김제겸에게 보낸 편지. |
金昌集, 「寄濟謙書(二十七日)」, 『夢窩集』 卷4. |
10a-11a |
단암 민공 신 편지라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사돈인 단암 민진원의 시에 차운하여 보낸 시. |
金昌集, 「次閔尙書(鎭遠)四言韻」, 『夢窩集』 卷4. |
11a-11b |
븡의게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외손자인 민백붕(閔百朋)에게 보낸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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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b-12b |
슌의게 브티노라 |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외손이자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순에게 보낸 편지.(『몽와집』에는 28일로 되어 있음.) |
金昌集, 「寄外孫閔百順書(二十八日)」, 『夢窩集』 卷4. |
12b |
모든 손들의게 브티노라 |
-1722년(경종2) 4월 28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손자들에게 보낸 편지. |
金昌集, 「寄諸孫書(二十八日)」, 『夢窩集』 卷4. |
13a |
문답셔 |
-1722년(경종2) 4월 28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종손(從孫) 김문행(金文行, 1701-1754)에게 보낸 답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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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a-14a |
명을 님야 니명뇽을 써주노라 |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유배지에서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이명룡(李命龍)에게 써 준 시. |
金昌集, 「臨命, 書贈李命龍(二十九日)」, 『夢窩集』 卷4. |
14a-14b |
(삼연운) 님죵의 입으로 블너 삼연제야의간운 거 노라 |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동생인 삼연 김창흡의 시에 차운한 시. |
金昌集, 「次三淵除夜寄島中韻(二十九日)」, 『夢窩集』 卷4. |
14b-15a |
삼가 션고운을노라 |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돌아가신 아버지 김수항의 시에 차운한 시. |
金昌集, 「謹次先考臨終韻(二十九日)」, 『夢窩集』 卷4. |
15a |
막 오신 글이라 |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쓴 시. (말미에 “임인 ᄉᆞ월 이십구일 묘시”라 하여, 시간까지 기록하였음.) |
金昌集, 「絶筆(二十九日)」, 『夢窩集』 卷4. |
15a-29a |
(삼연 글이라) 수뎡경부인박시묘지명 |
-삼연 김창흡이 지는 형수(큰형 김창집의 부인) 반남 박씨의 묘지명. -박씨는 세남(世楠)의 딸로, 1716년(숙종42) 12월 6일에 졸하였으며 향년이 71년임. |
金昌翕, 「伯嫂貞敬夫人朴氏墓誌銘幷序」, 『三淵集』 卷28. |
30a-37b |
디신 신졔문 |
-김창집의 둘째 딸인 안동김씨가 지은 글로, 집안의 액운을 없애기 위해 큰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을 계기로 지신(地神)에게 축원하는 제문. -신임사화로 아버지와 큰오빠를 잃었고, 스물 하나에 아들을 잃은 후 40년을 슬픔 속에서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60세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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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a-40b |
유셔 |
-김창집의 둘째 딸인 안동김씨가 1751년(영조27) 10월 27일에 쓴 글로, 임종에 앞서 남긴 유서. -덕성과 행실이 바르지 못한데다 시부모를 잘 모시지도 못했고 더욱이 신임사화 때 사사된 아버지 김창집을 따라 죽지도 못했다고 자책하며, 자신이 죽은 뒤 제물이나 제사를 간소하게 할 것을 유서로 남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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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a-46a |
미 몸이 초야의 농뷔되니 |
-제목과 작자를 상고할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신임사화 때 사사된 김창집과 관련이 깊음.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하고 죽어서 선군(先君)과 망제(亡弟)를 만나도 부끄럽지 않음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사람들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것이라 확신함. -41a 처음에 “미 몸이 초야의 농뷔되니”로 시작하여 42b에서 “후셰 만년의 니러도 균쇼인이 쳔니치 분별리라”로 끝나며, 바로 아래 주석에 “내 이리 진ᄉᆞ를 주어 고쳐 글을 다라 졔 보내니라” 되어 있음. 곧 이후 이어지는 42b-46a는 앞의 41a-42b를 고쳐 쓴 것이며 내용은 같음. -‘본경어어강호혜여’(42b)와 같이 ‘本耕漁於江湖兮’의 시구를 한글로 적고 토를 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 본래는 한문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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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a-51b |
갑슐초 농암샹소 |
-1694년(숙종20) 4월 농암 김창협이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을 때 쓴 사직 상소. (1694년은 갑술년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노론이 재집권하였음.) |
-金昌協, 「辭戶曹參議疏」, 『農巖集』 卷8. |
52a-57a |
졔문 |
-민백순이 1762년(영조38) 9월에 부인 청송심씨를 여의고 지은 제문.(민백순은 단암 민진원의 손자이며, 어머니가 김창집의 딸인 안동김씨임) -고생만 하다가 병들어 죽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뜻한 정이 담겨 있음. -제문 말미에 시 여섯 편을 부기해 두었는데, 시구마다 아래에 번역문을 달아 놓았음. -본래 한문으로 지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수록해 놓은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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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a-102a |
겸 디경연 단암 민션 슈차 |
-단암 민진원이 영조 연간에 지은 소차 4편. ① 58a-75b: 1727(영조3) 7월 4일에 탕평을 시행하기에 앞서 신임사화의 시비를 먼저 밝힐 것을 청하는 소차. ② 76a-89b: 1733년(영조9) 3월 1일에 영조를 청대(請對)하여, 여러 당마다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는 임금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말함. ③ 89b-97a: 1727년(영조3) 4월 17일에 소회를 아뢴 뒤에 면직(免職)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 ④ 97a-102a: 경슐 오월 초이일 샹소 -1730년(영조6) 5월 2일에 무신년(1728, 영조4)의 변란이 이광좌(李光佐, 1674-1740)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상소. |
①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정미) 7월 4일(무오). ② 『영조실록』 9년(1733, 계축) 3월 1일(임오). ③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정미) 4월 17일(계묘). ④ 『승정원일기』 영조 6년(1730, 경술) 5월 2일(기사). |
㉮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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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몽여션경샹견 교ᄂᆡ긔좌문야하긔즉 효죵이격의 불승쳑연명쵹지감
昨夢與先卿相見, 覺來起坐, 問夜何其, 則曉鍾已擊矣。 不勝悽然, 明燭志感。
어제밤의션경과더부러서로보고셔야니러안자밤이언마나ᄒᆞ얏ᄂᆞᆫ고무ᄌᆞ니새벽북을임의쳣ᄂᆞᆫ디라쳑연ᄒᆞ기를이겨니못ᄒᆞ야촉을ᄇᆞᆰ히고늣기물긔록ᄒᆞ노라
어젯밤 꿈에 선경(先卿)과 서로 만나 보았는데, 꿈을 깨어 일어나 앉아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종이 이미 쳤다고 하였다. 처연(悽然)함을 견딜 수가 없어 촛불을 밝히고 감회를 썼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