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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람(敬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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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50331.OGURA_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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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잡저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105張) : 無界, 10行字數不定 ; 31.6 X 20.0 cm
· 주기사항 表題: 敬覽
書根題: 敬覽 農岩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45032

안내정보

김창집(金昌集), 민진원(閔鎭遠) 등이 한문으로 지은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총 26편의 글 중 김창집의 글이 13편, 민진원이 4편, 숙종이 3편, 김창집의 딸 안동김씨 2편, 김창흡, 김창협, 민백순, 작자 미상의 글이 각각 1편이다. 본문은 한 글자의 한자(漢字)도 없이 모두 궁체로 표기되어 한시 인용의 경우에도 모두 한글 발음만 적고 번역문을 붙였다. 유일본으로서 가치가 높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책은 김창집, 민진원 등이 한문으로 지은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엮은 것인데, 편역자(編譯者)는 확실하지 않다. 김창집과 그의 사돈인 민진원이 지은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김창협․김창흡․안동김씨(김창집의 딸이자 민진원의 며느리), 김창집의 외손이자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순(閔百順, 1711-1774) 등 두 사람과 관련된 인물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글과 표제가 '경람(敬覽)'인 것을 보면, 김창집이나 민진원 가문에서 후손들에게 읽히기 위해 한글로 번역하여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김창집과 민진원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한다.
김창집은 노론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다.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수항(壽恒)이다. 1672년(현종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84년(숙종10)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연간 빈번하게 일어난 환국(換局)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였으며, 1717년(숙종43) 영의정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뒤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우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소론에 의해 탄핵되어 거제로 유배되었고, 아들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722년(경종2) 목호룡(睦虎龍, 1684-1724)의 무고로 김창집은 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어 사사되었으며, 아들 김제겸은 이배된 부녕(富寧)에서 사사되었다. 저서에 『몽와집』이 전한다.
민진원은 본관이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이다. 민기(閔機)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유중(維重)이며, 숙종의 비(妃)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다. 신임사화(1721-1722)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1725년(영조1)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 유배시켰다. 1727년(영조3)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민진원은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났다. 그 뒤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영조6) 기로소에 들고, 1733년(영조9)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로는 『연행록(燕行錄)』·『단암만록(丹巖漫錄)』·『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전한다.
구성 및 내용
필사본 1책으로 전체가 103장이다. 1장에는 '敬覽一'이라 적혀 있으며, 본문은 2장부터 시작된다.
전반부 2-51장은 김창집과 관련된 글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서두에 숙종이 김창집에게 내려준 시와 화상찬이 있고, 이후 김창집이 1722년(경종2) 4월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친척들에게 보낸 시와 편지가 다수 보인다. 다음에는 김창흡이 지은 큰형수(김창집의 아내)의 묘지명이 있다. 이어서 김창집의 둘째 딸인 안동김씨가 지은 제문과 유서가 들어 있는데, 안동김씨는 민진원의 아들인 민창수(閔昌洙, 1685-?)에게 시집을 갔으며 민백순의 어머니이다. 이어서 김창집의 동생인 농암 김창협이 지은 상소문이 있다. 후반부 52-102장은 김창집의 외손이자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순이 지은 제문과 민진원이 영조 연간에 올린 소차 4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마지막 103장에는 초서로 칠언절구와 오언절구가 각각 1수씩 쓰여 있는데, 본문과는 상관이 없으며 후인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칠언절구는 중국 당나라 전기(錢起)가 지은 「모춘귀고산초당(暮春歸故山草堂)」이며, 오언절구는 당나라 유중용(柳中庸)이 지은 「강행(江行)」이다.
본문에 수록된 글의 제목, 작자, 저작시기, 내용 개요, 관련 자료 등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장수

제목

작자, 저작시기, 내용 개요

관련 자료

2a-2b

(어졔) 임오 졍월 이십팔일

-1702년(숙종28) 1월 28일 숙종이 김창집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문집(『문곡집(文谷集)』)을 읽고 어제시를 지어 김창집에게 내림.(김수항은 1689년(숙종6) 기사환국 때 유배지에서 사사됨.)

『숙종실록』 28년(1702, 임오) 2월 10일(임술).

3a-3b

(슉어졔) 좌의정 김□□화샹찬

-1713년(숙종39) 김창집이 청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자, 숙종은 좌의정에 임명하고 화사(畵師)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화상찬을 지음.

金信謙(1693-1738), 「伯父夢窩府君行狀」, 『橧巢集』 卷9.

3b-7b

(몽와샤뎐) 본월 이십팔의 신이 도총부 딕녀의 업드여

-1702년(숙종28) 김창집이 도총부에 숙직하고 있을 때 숙종이 내려준 어제시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숙종에게 올린 전문(箋文).

金昌協, 「代伯氏謝賜御製詩箋」, 『農巖集』 卷26.

7b-8b

(숙어졔) 샤은겸 동지졍김○○ 부윤지인 셔장노셰하 부연시(연경갈)인견

-1712년(숙종38) 11월 김창집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사신 갈 때, 숙종이 사행(使行)을 보내면서 지어준 시 2수.

金昌集, 「燕行時肅宗大王御製贐章」, 『夢窩集』 卷3.

8b-9a

셩산길 우셔 우연히 단뉼을 읇프니 마 신 명이잇더라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賜死)의 명을 듣고 지은 시.

金昌集, 「星山路上, 偶吟短律, 適聞有賜死之命(四月二十七日)」, 『夢窩集』 卷4.

9a-9b

졔겸의게 브티노라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아들 김제겸에게 보낸 시.

金昌集, 「寄濟謙(四月二十七日)」, 『夢窩集』 卷4.

9b-10a

승지의게 브티노라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아들 김제겸에게 보낸 편지.

金昌集, 「寄濟謙書(二十七日)」, 『夢窩集』 卷4.

10a-11a

단암 민공 신 편지라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사돈인 단암 민진원의 시에 차운하여 보낸 시.

金昌集, 「次閔尙書(鎭遠)四言韻」, 『夢窩集』 卷4.

11a-11b

븡의게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외손자인 민백붕(閔百朋)에게 보낸 편지.

 

11b-12b

슌의게 브티노라

-1722년(경종2) 4월 27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외손이자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순에게 보낸 편지.(『몽와집』에는 28일로 되어 있음.)

金昌集, 「寄外孫閔百順書(二十八日)」, 『夢窩集』 卷4.

12b

모든 손들의게 브티노라

-1722년(경종2) 4월 28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손자들에게 보낸 편지.

金昌集, 「寄諸孫書(二十八日)」, 『夢窩集』 卷4.

13a

문답셔

-1722년(경종2) 4월 28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의 명을 듣고, 종손(從孫) 김문행(金文行, 1701-1754)에게 보낸 답서.

 

13a-14a

명을 님야 니명뇽을 써주노라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유배지에서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이명룡(李命龍)에게 써 준 시.

金昌集, 「臨命, 書贈李命龍(二十九日)」, 『夢窩集』 卷4.

14a-14b

(삼연운) 님죵의 입으로 블너 삼연제야의간운 거 노라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동생인 삼연 김창흡의 시에 차운한 시.

金昌集, 「次三淵除夜寄島中韻(二十九日)」, 『夢窩集』 卷4.

14b-15a

삼가 션고운을노라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돌아가신 아버지 김수항의 시에 차운한 시.

金昌集, 「謹次先考臨終韻(二十九日)」, 『夢窩集』 卷4.

15a

막 오신 글이라

-1722년(경종2) 4월 29일 김창집이 유배지인 성주에서 사사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쓴 시. (말미에 “임인 ᄉᆞ월 이십구일 묘시”라 하여, 시간까지 기록하였음.)

金昌集, 「絶筆(二十九日)」, 『夢窩集』 卷4.

15a-29a

(삼연 글이라) 수뎡경부인박시묘지명

-삼연 김창흡이 지는 형수(큰형 김창집의 부인) 반남 박씨의 묘지명.

-박씨는 세남(世楠)의 딸로, 1716년(숙종42) 12월 6일에 졸하였으며 향년이 71년임.

金昌翕, 「伯嫂貞敬夫人朴氏墓誌銘幷序」, 『三淵集』 卷28.

30a-37b

디신 신졔문

-김창집의 둘째 딸인 안동김씨가 지은 글로, 집안의 액운을 없애기 위해 큰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을 계기로 지신(地神)에게 축원하는 제문.

-신임사화로 아버지와 큰오빠를 잃었고, 스물 하나에 아들을 잃은 후 40년을 슬픔 속에서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60세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됨.

 

38a-40b

유셔

-김창집의 둘째 딸인 안동김씨가 1751년(영조27) 10월 27일에 쓴 글로, 임종에 앞서 남긴 유서.

-덕성과 행실이 바르지 못한데다 시부모를 잘 모시지도 못했고 더욱이 신임사화 때 사사된 아버지 김창집을 따라 죽지도 못했다고 자책하며, 자신이 죽은 뒤 제물이나 제사를 간소하게 할 것을 유서로 남김.

 

41a-46a

미 몸이 초야의 농뷔되니

-제목과 작자를 상고할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신임사화 때 사사된 김창집과 관련이 깊음.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하고 죽어서 선군(先君)과 망제(亡弟)를 만나도 부끄럽지 않음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사람들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것이라 확신함.

-41a 처음에 “미 몸이 초야의 농뷔되니”로 시작하여 42b에서 “후셰 만년의 니러도 균쇼인이 쳔니치 분별리라”로 끝나며, 바로 아래 주석에 “내 이리 진ᄉᆞ를 주어 고쳐 글을 다라 졔 보내니라” 되어 있음. 곧 이후 이어지는 42b-46a는 앞의 41a-42b를 고쳐 쓴 것이며 내용은 같음.

-‘본경어어강호혜여’(42b)와 같이 ‘本耕漁於江湖兮’의 시구를 한글로 적고 토를 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 본래는 한문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됨.

 

47a-51b

갑슐초 농암샹소

-1694년(숙종20) 4월 농암 김창협이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을 때 쓴 사직 상소. (1694년은 갑술년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노론이 재집권하였음.)

-金昌協, 「辭戶曹參議疏」, 『農巖集』 卷8.

52a-57a

졔문

-민백순이 1762년(영조38) 9월에 부인 청송심씨를 여의고 지은 제문.(민백순은 단암 민진원의 손자이며, 어머니가 김창집의 딸인 안동김씨임)

-고생만 하다가 병들어 죽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뜻한 정이 담겨 있음.

-제문 말미에 시 여섯 편을 부기해 두었는데, 시구마다 아래에 번역문을 달아 놓았음.

-본래 한문으로 지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수록해 놓은 것으로 추정됨.

 

58a-102a

겸 디경연 단암 민션 슈차

-단암 민진원이 영조 연간에 지은 소차 4편.

① 58a-75b: 1727(영조3) 7월 4일에 탕평을 시행하기에 앞서 신임사화의 시비를 먼저 밝힐 것을 청하는 소차.

② 76a-89b: 1733년(영조9) 3월 1일에 영조를 청대(請對)하여, 여러 당마다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는 임금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말함.

③ 89b-97a: 1727년(영조3) 4월 17일에 소회를 아뢴 뒤에 면직(免職)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

④ 97a-102a: 경슐 오월 초이일 샹소

-1730년(영조6) 5월 2일에 무신년(1728, 영조4)의 변란이 이광좌(李光佐, 1674-1740)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상소.

①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정미) 7월 4일(무오).

② 『영조실록』 9년(1733, 계축) 3월 1일(임오).

③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정미) 4월 17일(계묘).

④ 『승정원일기』 영조 6년(1730, 경술) 5월 2일(기사).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2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김창집이 지은 글이 13편(김창협이 대신 지은 전문 포함)으로 가장 많으며, 민진원이 4편, 숙종이 3편, 김창집의 딸 안동김씨 2편, 김창흡이 1편, 김창협 1편, 민백순 1편, 미상 1편이다. 김창집과 민진원의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저작 시기를 보면, 김창협이 올린 상소가 1694년(숙종20)으로 가장 앞서며, 민백순이 부인 청송심씨를 위해 지은 제문이 1762년(영조38)으로 가장 나중이다.
이 책에 수록된 26편의 글은 직간접적으로 신임사화 때 사사된 김창집과 관련이 깊다. 김창집의 글은 모두 1722년(경종2) 유배지에서 사사되기 직전에 지은 것이다. 숙종이 지은 3편은 숙종이 김창집을 충신으로 인정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영조 연간에 올린 민진원의 소차는 신임사화의 시비를 분명히 가려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본문에는 한자가 한 글자도 없이 모두 궁체(宮體, 궁서체)의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인용된 한시의 경우도 모두 한글 발음만 적고 번역문을 붙였을 뿐이다. 그러나 위 표의 관련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안동김씨가 한글로 지은 2편(제문과 유서)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글이 본래 한문으로 지은 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경람』은 1762년(영조38) 이후 김창집이나 민진원의 가문에서 신임사화로 대표되는 당쟁의 격랑 속에서 자기 가문의 정당함과 억울함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문으로 지은 글을 한글로 번역한 점, 책 전체가 한자가 없이 궁체의 한글로만 표기된 점, 부녀자인 안동김씨가 한글로 지은 글이 수록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가문의 어린 자제나 부녀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한글로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가치
첫째,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서지적으로 가치가 높다. 국내외 여타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으며,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유일본이다. 다만 표제가 '敬覽一'로 되어 있는데, '一'이라 한 것을 보면 본래 여러 책일 가능성도 있다.
둘째, 책 전체가 궁체의 한글로 표기된 것이다. 우선 18세기 국어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한문으로 지어진 글을 한글로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안동김씨가 지은 2편은 한글로 지은 것이나,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본래 한문으로 지은 것인데 이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조선시대에 유교경전이나 두보시 등을 언해한 경우는 있었으나, 개인이 지은 시문을 한글로 번역한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다. 물론 18세기에 한문으로 지어진 연행록 중에는 한글로 번역되어 읽힌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다. 이 중에서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는 가장 앞선 사례이다. 김창업은 김창집의 동생으로 1713년(숙종39) 형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노가재연행일기』는 국문본 6권 6책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번역자나 번역 시기 등을 알 수 없다. 다만 『경람』과 『노가재연행일기』가 모두 김창집 집안과 관련이 있고,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모종의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다.
내용적 가치
첫째, 현재 여타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김창업이 지은 「븡의게」(11a-11b)와 「문답셔」(13a), 안동김씨가 지은 「디신 신졔문」(30a-37b)과 「유셔」(38a-40b), 작자 미상의 「미 몸이 초야의 농뷔되니」(41a-46a), 민백순이 지은 「졔문」(52a-57a) 등이다. 특히 김창집의 딸인 안동김씨가 지은 두 편의 글은 여성 작자가 한글로 지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높다. 민백순이 아내인 청송심씨를 위해 지은 제문 역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둘째, 한문 원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있어 참고할 점이 있다.

 

㉮-1

 

㉯ 

 

 

㉯-2

 

 

작몽여션경샹견 교ᄂᆡ긔좌문야하긔즉 효죵이격의 불승쳑연명쵹지감

 

昨夢與先卿相見, 覺來起坐, 問夜何其, 則曉鍾已擊矣。 不勝悽然, 明燭志感。

 

어제밤의션경과더부러서로보고셔야니러안자밤이언마나ᄒᆞ얏ᄂᆞᆫ고무ᄌᆞ니새벽북을임의쳣ᄂᆞᆫ디라쳑연ᄒᆞ기를이겨니못ᄒᆞ야촉을ᄇᆞᆰ히고늣기물긔록ᄒᆞ노라

 

어젯밤 꿈에 선경(先卿)과 서로 만나 보았는데, 꿈을 깨어 일어나 앉아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종이 이미 쳤다고 하였다. 처연(悽然)함을 견딜 수가 없어 촛불을 밝히고 감회를 썼노라.

㉮와 ㉯는 『경람』 장2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1702년(숙종 28) 1월 28일 숙종이 김창집의 아버지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을 읽고 김창집에게 내린 어제(御製)의 일부이다. ㉮는 한문 원문의 발음을 궁체의 한글로 적은 것인데 정서체(正書體)로 되어 있으며, ㉯는 ㉮의 번역인데 흘림체로 적혀 있다. ㉮-1과 ㉯-1은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의 『숙종실록』 28년(1702, 임오) 2월 10일(임술)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과 번역문을 옮겨온 것이다. 한문 원문의 끊어 읽기나 번역의 방식에 있어서 참고할 수 있다.
집필자 : 안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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