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물명괄(物名括)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50331.OGURA_180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보록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후강(後崗) : [발행처불명], 1829
· 형태사항 2卷1冊(16張) : 20.8 X 18.3 cm
· 주기사항 表題: 物名括
書根題: 物名括
卷末記: 己丑(1829)二月初六日畢題仲春後崗書
印: 「後崗」, 「[?]齋」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44762

안내정보

이 책은 다른 이본들에 비해 표제어 항목 수가 많은 편이고 그 내용도 충실하여, 종래에 많이 이용되었던 규장각 가람문고본보다 선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약용(丁若鏞)이 편찬한 물명(物名)에 관한 분류 어휘집으로,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 『물명괄(物名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물의 명칭을 18개의 의미 부류로 나누어 제시하였으며, 각 항목은 큰 글씨의 한자명 아래에 작은 글씨로 우리말 이름을 한글로 써 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말 이름 이외에 한문이나 한글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고 한문만으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였다. 『물명고』의 서명을 가진 책은 크게 유희가 편찬한 것과 정약용이 편찬한 것, 기타 19세기나 20세기 초의 여러 사람들이 편찬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중 정약용의 『물명고』가 가장 많이 전하고 있다. 정약용의 『물명고』는 182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수십 종의 이본이 국내외 여러 곳에 필사본 형태로 전하고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책에는 편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내용의 구성으로 보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류의 '물명'류를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이다.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陰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입교 후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사(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목민심서(牧民心書)』의 일표이서(一表二書)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다산의 『여유당전서』에는 「발죽란물명고(跋竹欄物名攷)」 일문(一文)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위의 『죽란물명고(竹欄物名攷)』 1권은 내가 편집한 것이다. 중국(中國)은 말과 글이 일치하므로 한 물건을 입으로 부르면 그것이 바로 글이고, 한 물건을 글로 쓰면 그것이 바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과 실재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표준말과 방언이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마유(麻油 참기름)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방언으로는 참길음(參吉音)이라 하고, 문자(文字)로는 진유(眞油)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진유'라고 하는 것만이 표준말인 줄 알고, 향유(香油)ㆍ호마유(胡麻油)ㆍ거승유(苣蕂油) 등의 본명(本名)이 있는 줄은 모른다. 또 그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 내복(萊葍)은 방언으로 무우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임을 모르고, 송채(菘菜)는 방언으로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白菜)의 와전임을 모른다. 이런 예로 말하자면 중국에서는 한 가지만 배워도 충분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를 배워도 부족하다. 내가 물명(物名)을 편집하는 데 있어서는 본명(本名)을 위주로 하고 방언으로 해석하여, 유별로 나누고 같은 종류끼리 모은 것이 모두 30엽(葉)인데, 누락된 것도 반이 넘는다. 그러나 규모는 이제 정해졌으니, 아마 아이들이 이를 이어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죽란정자(竹欄靜者)는 쓴다."라고 되어 있다. 다산이 여기에서 예로 든 '마유', '내복', '송채'에 대한 설명이 『아언각비(雅言覺非)』의 '호마(胡麻)', '백소(白蘇)', '백채(白菜)', '무후채(武侯菜)'에 각각 나온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죽란물명고』가 『아언각비』의 저본(底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죽란물명고』는 다산이 40세 이전에 작성한 것으로, 후일에 확대보충하여 『아언각비』(58세, 1819년)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발문에서 '누락된 것이 반이 넘으나 아이들이 이어서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其漏者過半. 然規橅旣立. 庶兒曹繼而成之)'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이 이어서 『물명고』를 완성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말의 정치가 겸 학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서 이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 즉, "우리나라는 천문, 지리, 신체, 복용, 궁실, 초목, 조수, 충어 등 일체의 이름을 모두 방언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글을 대하면 어리둥절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실로 책은 책대로, 말은 말대로 따로 논다는 탄식을 하게 되니, 예를 들면 천(天)자에 하날(河涅)이라 주를 단 것과 같은 것이다. 정유산(丁酉山) 학연(學淵)이 물명고(物名考)를 편찬하였는데 불서(佛書) 가운데 당나라 방융(房融)의 『필수(筆受)』와 같아 고반문촉(叩槃捫燭)의 병폐가 없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다산의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이 지은 『물명고』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유당전서』에 전하는 『청관물명고(靑館物名攷)』라 생각된다. 실제로 『죽산물명고』와 『청관물명고』는 기존에 알려진 바와 달리, 항목이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성 및 내용
2권 1책 14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으로, 사물의 명칭을 종류별로 모아서 먼저 한자명을 쓰고 한글로 풀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草木類‚ 鳥獸類‚ 蟲魚類‚ 宮室類‚ 舟車類‚ 服食類‚ 耕織類‚ 工匠類‚ 供奉類‚ 文武類‚ 戱俗類‚ 身體類‚ 事情類‚ 親屬類‚ 雜人類‚ 漁獵類‚ 雜事類‚ 雜物類 등 총 18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이 책의 정확한 필사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책의 형태와 한글의 쓰임으로 보아 19세기말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의 권말에 '己丑二月初六日 仲春後崗書'라는 필사기가 있어, 표기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89년(?)경에 필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필사자는 '後崗'이라는 성(또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으로 생각된다. 현전하는 '물명고' 또는 '물명괄'류의 대다수가 약간의 첨삭이 있을 뿐 이 계열이다.
현재 서울대 중앙도서관 가람문고에 소장된 '가람古 031-M918h'는 표제가 '竹欄物名考'로 되어 있는데, 『죽란물명고(竹欄物名攷)』의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이를 후대에 다시 필사한 것이 규장각 소장의 '규12298'로서, 上‚下 2권으로 분권되어 있으며, 항목수를 줄이고 '物名括'이라는 서명을 붙였다. 진동혁(秦東赫)씨 소장의 『물명괄(物名括)』도 있는데 여기에 '茶山'이라고 묵서(墨書)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물명괄'이라는 명칭을 지닌 책들이 다산의 『죽란물명고』 계열로 추정된다. 연세대 도서관에도 '고서(귀) 704 0'의 도서번호를 가진 『물명괄』이 있다.
일본의 동양문고에도 『물명록(物名錄, 목차에는 '物名括目錄')』이 있는데, 이 책 역시 18부류로 나누었고, 표제어의 수는 1,469 항목이다.
이밖에 홍윤표교수 소장의 『물명고(物名考)』, 같은 동경대 소창문고[L174346]의 『물명고(物名考)』(『物名備考』), 충남대 도서관의 『물명고(物名攷)』, 계명대도서관의 『자류물명수록(字義物名隨錄)』 등이 이 계열에 속하는 『물명고』이다.
내용적 가치
18세기 이후의 유서가 명물(名物)과 도수(度數)를 망라한 데에 비해 이 『물명괄』은 명물만을 표제항으로 하였으며‚ 제도나 정치에 관한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모두 실생활과 연관된 것들이어서 실학 사상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고증적인 태도가 희박해져 전거가 되는 문헌을 거의 밝히지 않고 있으며‚ 물명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명칭의 정확성에 초점을 두지 않고 물명 그 자체를 알아 그것을 이용하려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 책에 수록된 표제어는 모두 712항으로, 상권에는 초목류 97항, 조수류 117항, 충어류 192항, 궁실류 56항, 주거류 101항, 하권에는 복식류 158항, 경직류 46항, 공장류 60항, 공봉류 129항, 문무류 57항, 희속류 44항, 신체류 77항, 사정류 30항, 친속류 34항, 잡인류 16항, 어렵류 18항, 잡사류 22항, 잡물류 9항이다. 총 표제어 수가 다산계의 다른 물명고보다 적다.
이 책에는 현재는 사라진 어휘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어, 국어 어휘 연구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 책에 실린 한자어들과 그에 대응되는 어휘들은 근대 시기의 물명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나타내는 말까지 곁들여 있고‚ 한자어나 우리말에 다른 이름이 있으면 밝혀 놓았다. 사전이라고 하기에는 수록된 어휘가 적은 편이지만‚ 일본식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 우리 한자어의 사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 참고가 되는 귀중한 한자 사전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김언종, 「『여유당전서보유』의 저작별 진위문제에 대하여(上)」, 『茶山學』 9, 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정승혜, 「물명(物名)류 자료의 종합적 고찰」, 『국어사연구』 18, 국어사학회, 2014.
홍윤표, 「十八·九世紀의 한글 類書와 實學; 특히 「物名考」類에 대하여」, 『東洋學』 1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8.
집필자 : 정승혜

이미지

장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