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복문록(復文錄)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50331.OGURA_209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수필류
· 작성주체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 찬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명치 6-8(1873-5)]
· 형태사항 2冊(65張, 38張) : 24.3 X 16.6 cm
· 주기사항 表題: 復文錄
識語(小倉進平): 中村庄次郞翁より寄贈 昭和七年(1932)八月 進平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174712-3

안내정보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가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 1873.10-1880.4)의 어학생으로서 복문을 기록한 책이다. 복문(復文, retranslation)은 한번 모국어로 번역한 것을 원래의 외국어로 재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총 48조목으로 당시 어학소의 복문 과제와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어학소에서 실시한 시험 및 평가 방식, 오답에 대한 첨삭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조목은 시험부(試驗簿)와 일기부(日記簿)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당시 어학소의 교육 활동과 업무 내용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본서의 작성자인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는 1855년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에서 출생하여 조선통사(朝鮮通詞)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1868년 조선어 습득을 위해 일시적으로 부산에 도항한다. 그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세운 이즈하라 한어학소(嚴原韓語學所)에서 수학한 뒤, 1873년 어학소가 초량으로 이전될 때 계고통사(稽古通詞) 자격으로 현지에 파견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및 수신사(修信使)의 일본 파견시에는 교수 및 다른 어학생과 함께 통역을 맡았다(「航韓必携」 참조). 이후에도 한일 외교 현안에 대한 통역을 담당하여, 일련의 외교적 성과에 대한 공로로 순종에게 훈장을 받고, 1910년에 퇴직했다. 이후에도 부산에서 체류하다가 1932년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게 한국어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하고, 같은 해에 생을 마감했다.
구성 및 내용
복문(復文, retranslation)은 한번 모국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원래의 외국어로 재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복문은 에도(江戶) 시대의 한문 교육과 메이지(明治) 시대의 영어 작문교육에서 이미 사용된 용어로서,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어순 불일치와 어휘 오용의 발생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작문 교육의 한 방법이다.
복문 교육을 조선어교육에 도입함으로써 기대되는 효과는 '원문(原文)→역문(譯文)→복문(復文)'의 단계적 번역을 거치면서 조선어와 일본어 사이의 표현 차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점, 조선어의 표현상 특징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복문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범(典範)이 될 만한 조선어 원문, 즉 아문(雅文)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復文錄」에 실린 복문 연습을 위한 1회분의 기록을 한 조(條)로 파악할 때 전체는 148개 조의 기사로 파악된다. 수록된 기사는 어학소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작성된 것과 쓰시마[對馬島]에 전승되는 조선 관계 문헌을 인용한 것으로 대별된다.
우선 전자를 내용별로 분류하면, 어학소 내의 교육 및 일상적 활동과 관련된 기록으로서 수업과 관련된 교재 및 시험에 관한 공지가 7개 조 나오며, 도해선(渡海船) 도착시에 안부를 묻거나, 고향에 서신을 보내는 등의 일상생활이 제시된 것이 7개 조 보인다.
정보 수집과 관련된 기사는 총 29개 조로서 어학소가 위치한 부산포와 동래부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에 관한 정보(13개 조)가 많으며, 조선의 기타 지역에 관한 것(3개 조)도 일부 실렸다. 이와 함께 일본 관련 정보로서 쓰시마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 관한 정보가 총 9개 조 보인다. 더욱이 요동(遼東)과 만주, 중국과 관련된 정보도 4개조 수집되어 있다.
또 통역 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총 69개 조 보인다. 이는 전체 기사 148개 조 중에서 거의 절반(46.6%)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장래 어학생들이 대조선 외교 실무를 담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실제 통역 장면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을 반복 연습시켰던 것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선박의 도항 기록과 표착(漂着) 관련 사건(18개 조)은 물론, 무역에 대한 기사(4개 조)와 함께 조선 측 역관과의 교섭 장면(40개 조)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외적인 업무와는 달리 어학생들이 조선 민중과 접촉한 기록도 11개 조 보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여기에는 대화 상대자로서 조선 양반과 선비, 중년 여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하며 다양한 화제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상의 활동은 민심을 시찰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되며, 그때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자신이 느낀 감흥과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곳도 5개 조 있다.
이상의 기사는 「草梁館語學所の規定」(朝鮮事務書, 권24:33a-35b)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서, 어학소의 학규 4, 5에 따라 당직자는 매일의 사건, 사고 및 어학생의 통역 활동을 일기부에 기록하고, 어학생의 대표인 감좌(監佐)는 그 내용을 보충해서 교수에게 제출하면, 교수가 이를 다시 정리하여 독장(督長)에게 보고했다. 즉 일기부(日記簿)는 어학소의 공식적인 활동 기록으로서, 그 내용 중의 일부가 다시 복문 과제로 제시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쓰시마에 전승되는 조선 관계 문헌을 인용한 기사 중에는 조선의 제도 및 문화에 관련된 것이 총 25개조 수록되어 있다.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조선의 역사적 인물과 연관된 교훈적 내용 및 조선의 설화, 속담, 고사가 인용된 것이 9예([제55, 87, 93, 126, 131, 133, 147, 148조])로서 가장 많다. 그 외에도 관직과 신분제도, 도량형, 공문서 등 제도에 대한 것 8예([제61, 75, 95, 100, 101, 106, 107, 109조]) 보이며, 문화에 관한 것으로서 조선의 풍속과 문물, 관혼상제, 의식주, 연중행사를 다룬 것이 8예([제81, 82, 89, 94, 96, 97, 108, 145조]) 있다.
이상의 기사는 외교 교섭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 정보로 중시되었던 것으로서 쓰시마에서 편찬된 조선어학습서(『전일도인(全一道人)』, 『교린수지(交隣須知)』, 『인어대방(隣語大方)』, 『석음록(惜陰談)』) 및 조선정보서(『어심조선각서(御尋朝鮮覺書)』, 『북경노정기(北京路程記)』)로부터 채록한 경우와, 문학 작품 혹은 역사서에서 발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는 달리 전거서(典據書)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에 대한 정보는 주로 조선측 통역관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와의 대화로부터 직접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가치
본서의 서지에 대해서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자필 기록 「中村庄次郎 寄贈書目錄」이 참조된다. 이에 따르면 '復文錄(L174712), 一冊, 寫本'과 가제로 등록된 '復文錄(L174713, 假名), 一冊, 寫本'의 두 책이 소장되어 있다. 권1과 권2는 책의 크기(24.3 × 16.6 cm)가 같고, 본문의 기술 형식 및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은 책으로 파악되며, 작성 시기 상으로 볼 때, L174713이 권1로 설정된다.
[제6조]의 모두(冒頭)에 기록된 서명(署名) 「中村庄次郎」을 통해 본서는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개인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본서의 권말에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친필로 「中村庄次郎翁より寄贈/昭和七年八月 進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1932년 본서가 나카무라 쇼지로에 의해 기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권 모두 필사 시기에 관한 지어(識語)가 달려 있지 않으므로 「復文錄」의 성립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수록된 기사를 통해 「복문록」이 작성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바, 날짜가 기재된 첫 번째 기사는 [제6조] 1873년 11월 12일이며, 마지막 기사는 [제143조]의 1876년 4월 18일이다. 따라서 복문의 기록은 1873년 나카무라 쇼지로가 초량왜관에 도착한 전후부터 시작되어, 계고통사로 활동하던 1876년 4월 18일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본서의 성립은 1873년부터 1876년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내용적 가치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에서 실시한 복문(復文) 교육과 관련된 과목은 편문(編文)으로서 초기의 학규에 의하면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876년 1월 30일에 개정된 학규에서도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실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소호여록(朝鮮帰好餘錄)」, 권5:2a)
초량관어학소에서 실시한 편문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시험과 그 결과에 대한 첨삭 교육이다. 우선 시험에 관해 살펴보면, 학과(學課)에 관한 규정에 의해 매달 10이 붙는 날인 10, 20, 30일에는 10시부터 12시까지 독장(督長)의 참관 하에 편문 시험을 치렀다. '시험(試験)' 혹은 '업(業)'으로 기록된 기사가 그것으로서, 특히 모두(冒頭)에 보이는 권점(●)은 복문 결과가 오답으로 판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복문 시험이 끝나면 그 답안과 원문을 상호 대조해서 정오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정오 표시가 달려 있는 기사를 보면, 정답으로 표시된 곳은 2회(1874년 1/20, 2/10)뿐이며 나머지는 5회는 모두 오답(1873년 12/10, 12/20, 1874년 1/31, 2/20, 2/28)으로 처리되어 있다.
오답에 대한 첨삭 교육에 관해서는 「草梁館語學所の規定」(조선사무서, 권24:33a-35b)의 학규 7, 8이 참조되며, 총 2차에 걸쳐 첨삭이 이루어졌는데, 우선 감좌는 시험부(試験簿)를 기록하는 한편 답안에 대해 정오를 판정하고, 그 과정에서 틀린 부분에 대해 묵서(墨書)로 일차 수정을 가했다. 차후에 교수는 감좌가 빠트린 부분을 보충하고, 주서(朱書)로 이차 수정을 했는데, 본서의 기사 중에 우라세 유타카(浦瀨裕) 교수와 스미나가 유스케(住永友輔) 조교의 실명이 확인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감좌와 교수에 의한 첨삭은 중선을 그어 수정 혹은 삭제하거나, 빠진 어구를 삽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교정을 거친 복문은 어학생에게 되돌려졌으며, 어학생들은 자신이 틀린 부분과 첨삭된 내용을 확인하면서 이를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는 연습을 실시했다. 이처럼 본문 중에는 조선어뿐만 아니라 일본어가 교정된 부분도 확인되므로, 첨삭 교육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치밀하게 실시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復文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선어교육에 있어서 시험과 평가, 첨삭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서 인정된다. 특히 첨삭된 내용은 조사와 어미의 교정과 함께 경어법, 문장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 있었고, 실제 회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교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어 원문의 인용 태도로부터도 확인되는데, 전거서(典據書)의 원문 일부는 문어체가 구어체로 개편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요컨대 「복문록」의 분석을 통해 초량관어학소에서는 구어체를 중심의 의사소통 능력을 중시한 조선어 및 실제 외교 상황을 염두에 둔 전문적이고 실무적인 조선어가 교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통역 현장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는 조선어 통변(通弁)을 확보하고자 했던 외무성의 요구에도 부합하는 교육 방식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박진완, 「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의 조선어 교육방식 연구-『復文錄』의 분석을 통해」, 『한국어교육』 26-2, 국제한국어교육학회, 2015.
사카다 모로토오(坂田諸遠編), 『航韓必携』 卷1-18, 釜山市立市民圖書館所藏本, 1876.
이시바타 사다(石幡貞), 『朝鮮帰好餘錄』, 日就社, 1877.
일본외무성, 『對韓政策關係雜簒 宮本大丞朝鮮理事始末』 卷1-10,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所藏本.
재부산일본총령사관, 『朝鮮事務書』 卷1-29, 釜山市立市民圖書館所藏本, 1867.
후쿠이 레이(福井玲), 「小倉文庫의 특징에 대하여―중세어 자료와 대마도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奎章閣』 39,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1.
집필자 : 박진완

이미지

장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