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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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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160331.NS_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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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유가류
· 작성주체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박주수(朴珠壽, ?-?) 교감
· 판종 필사본(인찰공책지)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3卷2冊 : 揷圖 ,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9.6 × 13.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中黑口, 無魚尾 ; 31.5 X 21.2 cm
· 주기사항 表題: 居家襍服
書根題: 居
校勘記錄(各卷末): 仲弟[朴]珠壽藻卿較勘
專用印札空冊表示(版下口): 自然經室藏(徐有榘, 1764-1845), 楓石庵書屋
圖版(卷1의 24張, 卷3의 9張)은 楓石庵書屋의 전용인찰공책지(半郭 19×13.6cm)를 사용
序: 辛丑(1841, 憲宗 7)仲冬旬有五日朴珪壽題
揷圖: 外服圖 等 24張(卷1首), 童子服圖 等 9張(卷3首)
表: 外內長幼禮服燕服同異表(3張). -- 玄端居九服之外爲九服之本而爲士之家服表(3張). -- 宵衣居六服之外爲六服之本而爲士妻之家服表(3張). -- 目錄(5張)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5-16

안내정보

1841년(헌종 7) 실학자 박규수(朴珪壽)가 쓴 3권 2책으로 된 복식연구서(服飾硏究書)이다. 집에 있을 때 입는 성인남자, 성인여자, 남자어린이와 여자어린이의 영·유아시절 복식을 그림과 함께 수록하였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박규수(朴珪壽, 1807-1876)는 『연암일기(燕巖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박종채(朴宗采)이고, 어머니는 통덕랑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이다. 이들 부부는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가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옥판을 선물 받는 꿈을 꾸고, 어머니는 혼수품으로 데려온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꿈을 꾼 후 박규수를 잉태하였으므로 처음에는 규학(珪鶴)이라고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하였다.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瓛卿), 정경(鼎卿)이고, 초호(初號)는 환재(瓛齋)이며, 호는 환재거사(瓛齋居士), 환재(桓齋)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박규수의 일생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에 해당하는 1기는 출생해서 1830년까지로 7세에 한시를 짓고, 15세경에 조종영(趙鐘永) 등과 망년지교(忘年之交)할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특히 효명세자와의 친분을 통해 『연암집』을 정리하고 실용적 학문에 눈을 뜬 시기이면서 왕실과의 관계를 맺었던 시기이다. 2기는 1831년부터 1848년까지로 세자의 급서이후 계속하여 부모까지 사별하게 되자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칩거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당대 일류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그의 실학적 학문성향이 성숙되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 후반기에 해당하는 3기는 1848년(헌종 14) 마흔 살이 되어 처음으로 과거시험을 보고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한 시기이다.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이후 병조정랑,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62년(철종 13) 진주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가 되었으며, 임무를 마친 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64년(고종 1) 고종이 즉위하자 사헌부대사헌, 홍문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특히 두 번에 걸쳐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중국내 문사(文士)들과 널리 교유하면서 학문적 유대를 맺고 견문을 넓힌 시기이다. 4기는 1872년 정사(正使)의 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온 이후 우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강화도 조약 체결과 같은 민족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 사건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개국론을 적극 주장하고 개화파를 등장케 하였다. 그 결과 원로 지도자로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시기이다.
박규수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외종조 유화(1779-1821)를 비롯하여 외사촌형제인 이정리(1783-1843)와 이정관(1792-1854),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1800-1879), 효명세자(1809-1830)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효명세자는 박규수보다 두 살 연하였지만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효명세자의 처소인 경우궁(景祐宮)의 후원에 잇대어 있던 계동(桂洞) 박규수 집에 자주 방문하여 늦게까지 담론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우의는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더욱 두터워져 효명세자가 승하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정신적인 타격을 입고 과거도 포기한 채 은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박규수는 정약용(丁若鏞)·서유구(徐有榘)·김매순(金邁淳)·조종영(趙鐘永)·홍석주(洪奭周)·윤정현(尹定鉉) 등은 선배로서 사숙하였고, 남병철(南秉哲)·김영작·김상현(金尙鉉)·신응조(申應朝)·윤종의(尹宗儀)·신석우(申錫愚) 등과 교유하였다.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연결시킨 중심인물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김윤식(金允植)·유길준(俞吉濬)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다.
『거가잡복고』를 완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의 동생인 조경(藻卿) 박주수(朴珠壽, 1816-1835)이다. 박주수의 역할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잡복고는 이미 1832년에 탈고를 마쳤으며, 을미년인 1835년 여름 장산(章山:경산의 옛 이름)에서 등서(謄書)하고 교감(校勘)하였는데 마침내 그의 마지막 필적이 되었다."고 하면서 박주수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이에 『거가잡복고』를 탈고했지만 상자에 담아 꺼내보지 않다가 『거가잡복고』의 실체를 알던 몇몇 지인들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자 6년이 지난 1841년(헌종 7)에 비로소 서문을 쓰고 세상 밖으로 내 놓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규수는 박주수가 교감한 사실을 서(序)의 마지막뿐만 아니라 각권이 끝나는 곳에 '중제주수조경교감(仲弟珠壽藻卿校勘)'이라고 씀으로써 동생이 『거가잡복고』를 완성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구성 및 내용
『거가잡복고』는 2책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거가잡복고』는 오사카부립나카노시마도서관〔大阪府立中之島〕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이 있다. 이 둘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편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나카노시마도서관본은 상·하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제목은 "거가잡복"이다. 이 본의 목차를 보면 1책 서(序) 바로 다음에 「외복도(外服圖)」 23면과 「내복도(內服圖)」 22면이 나오고, 다음에 거가잡복고 목록이 있으며, 다음으로 「외복」이 있다. 2책에서는 「내복」이 있고 다음으로 「동자복도」 11면과 「여자복도」 4면이 있으며, 「유복」에 이어 「동자지복」, 「여자지복」이 있고 다음에 「외내장유예복연복동이표(外內長幼禮服燕服同異表)」 5면이 있으며, 「현단거구복지외위구복지본이위사지가복표(玄端居九服之外爲九服之本而爲士之家服表)」 5면이 있으며, 「소의거육복지외위육벽지본이위사처지가복표(宵衣居六服之外爲六服之本而爲士妻之家服表)」 5면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국립중앙도서관본은 1책의 서문 뒤에 거가잡복고 목록이 있으며, 그 뒤에 「외복도」와 「외복」이 있고 2책에는 「내복도」와 「내복」이 있으며, 「동자복도」와 「여자복도」 뒤에 「유복」이 있다. 그 뒤에 「외내장유예복연복동이표」, 「현단거구복지외위구복지본이위사지가복표」, 「소의거육복지외위육벽지본이위사처지가복표」가 있어 목차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본에 수록된 목록을 보면 두 본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오사카부립나카노시마도서관본의 목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卷之一

外服圖: 玄冠, 玄冠側形, 深衣, 玄端, 爵鞸, 革帶, 緇帶, 組, 緇帶約紐用組式, 黑屨, 笏, 玄冠作辟式六, 屈指量寸式, 深衣裁袵式 二, 深衣方領式 五, 服玄端式, 服深衣式, 服緇帶約組式, 服事佩式(23면)

外服: 士以玄端爲家居禮服

      玄冠: 服玄端者冠玄冠 玄冠原委 玄冠制度

      中衣: 玄端必有中衣 中衣卽是深衣 深衣制度 附深衣廣義

      玄衣: 玄衣制度

      黃裳: 黃裳制度

      爵鞸: 爵鞸制度

      革帶: 革帶制度

      緇帶: 緇帶制度 組制度 緇帶結紐約組之法

      黑屨: 黑屨制度

      笏  : 士居家禮服亦有笏 笏制度

      服玄端次第

      燕居服深衣次第

      左右佩用: 綬制度

卷之二

內服圖: 纚, 纚側形, 總, 笄, 宵衣, 絲帶, 帶, 紛帨, 刀, 礪, 今擬香團, 小觽, 今擬小觿, 今擬火鏡 箴管線纊縏, 今擬搔子, 今擬石燧, 今擬蔮, 今擬髻樣, 作髻式, 服纚笄宵衣觽式, 著蔮式, 服裙襦式, 服裙襦加裙束帶式(22면)

內服 : 士妻以宵衣爲禮服

       纚: 纚諸家說同異, 纚制度

       笄: 笄制度

       總: 總制度

       服纚笄總次第: 作笄之法,   附屈氏髻制, 新擬?髻制, 新擬蔮制

       宵衣: 宵衣制度

       帶: 帶制度

       雜佩: 雜佩制度, 附新擬佩譜

       絲帶: 絲帶制度

       黑屨: 黑屨制度

       平居服裙襦: 襦制度, 裙制度

       服宵衣次第

卷之三

幼服童子服圖: 緇布衣, 錦紳錦組, 黑屨, 四揆衫, 長襦, 今擬卷幘, 雙紒式, 著纚服緇布衣式, 服四揆衫式, 服長襦式, 著卷幘式, 服裙襦加裙束帶式

幼服女子服圖: 雙紒式, 雙紒著纚總服衣紳式, 著卷幘式, 服裙襦加裙束帶式

幼服

       童子之服: 雙紒纚總緇布衣錦紳制度, 革帶佩容臭, 屨制度

       女子之服: 雙紒纚總制度, 衣紳存疑, 絲帶佩容臭, 구制存疑

       童子常服: 四揆衫長襦之制

       女子常服: 裙襦之制, 附新擬童子女子卷幘

外內長襦禮服燕服同異表

玄端居九服之外爲士之家服表

宵衣居六服之外爲士妻之家服表

한편 나카노시마도서관본의 큰 장점은 판심의 하단부분에 소장처가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림이 있는 부분은 '楓石庵書屋'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自然經室藏'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자연경실은 풍석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수원유수로 재직하던 1837년경 서울 동쪽 교외의 경치가 아름다운 번계(樊溪)에 작은 별장을 짓고 서실을 마련한 후, 서유구를 중심으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던 곳이다. 따라서 『거가잡복고』를 서유구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연경실장으로 소장처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에서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풍석암서옥'은 서유구가 10대 후반에 할아버지 서명응(徐命膺, 1716-1787 )을 시봉하며 지낼 때 자신만의 서재이자 장서고인 풍석암서옥을 지었으므로 선후관계를 따진다면 풍석암서옥이 자연경실장보다 앞선 시기의 서재였음을 알 수 있다.
『거가잡복고』의 내용은 크게 「외복」, 「내복」, 「유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책의 1권에는 사대부 남성의 복식을 논한 「외복」편이고, 제 2책의 2권과 3권에는 사대부 여성의 복식을 논한 「내복」편과 남녀 아동의 복식을 논한 「유복」편이 있다.
「외복」편은 집안의 각종 행사 때 입는 예복으로서 현의(玄衣)와 황상(黃裳)으로 구성된 현단(玄端)과 평상시에 입는 상복으로서의 현단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현단을 입을 때 중의에 해당하는 심의를 중심으로 제작법과 착용법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사대부는 관직의 유무나 고하를 막론하고 현단을 예복으로 착용하는데 그것은 '사(士)'란 특정 신분이나 작위가 아니라 '도(道)'를 지닌 사람의 통칭이며, 현단은 도를 지닌 사람의 복식이라고 하여 천자로부터 하사(下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근본은 도를 실천하는 '사'이며 천자에서 하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식의 근본이 되는 것이 현단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으로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방도의 하나로 현단과 심의를 착용하도록 의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내복」편은 예복인 소의(宵衣)와 상복인 군유(裙襦)의 제작법과 착용법 뿐 아니라 사(纚)·계(笄)·총(總) 등과 같은 수식(首飾)에도 치중하여 기술하고 있다. 박규수는 부인의 변발·대체·낭자두·족두리·가계·화관과 같은 수식, 저고리·납의·원삼·당의·배자와 치마를 뒤에서 여미고 속치마를 여러 벌 껴입는 방식 등은 몽고의 제도를 따른 것이거나 고례와 어긋나므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 소의와 군유, 사·계·총과 같은 고제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그가 우암과 그 문인들의 설을 크게 참작하고 있는 점이다. 박규수는 종래의 변발 대신 머리 중앙에 속발하는 작계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암과 최신·송문흠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구체적인 작계제도로서 우암이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 궁녀 굴씨로부터 배워 집안에서 실행했다는 제도를 소개하고 이것과 고제를 참작한 자신의 개선안을 제시하고 있다.
「유복」편은 남녀 아동의 수식인 쌍계(雙紒)와 동자의 상복인 사규삼등을 중심으로 비교적 간략하게 논하고 있다. 「유복」편에서는 남녀 아동의 변발을 쌍계로 바꿀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로 유명한 정온이 청과 화의가 이루어진 데 항의하여 사직하고 덕유산에 은거했을 때나 우암이 만년에 화양동에 은거했을 적에 도무 자제와 문동들로 하여금 변발을 풀고 쌍계를 하도록 했던 고사를 든다. 그리고 "아마도 양현의 뜻은 비단 시속을 바꾸어 옛날로 돌아가자는 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깊은 통한과 지극한 치욕을 느끼어 이 세상이 그같이 비루한 풍속을 답습하는 것을 차마 잠시라도 볼 수 없었던 때문일 것"이라 하면서 이러한 선현의 유지가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가워하고 있다.
서지적 가치
나카노시마도서관본의 가치는 소장처가 판심의 하단부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두 곳의 소장처가 있는데, 도설부분에는 '풍석암서옥'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자연경실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자연경실장'과 '풍석암서옥'은 모두 풍석 서유구의 서재로, 자연경실장은 1837년 경 풍석이 번계(樊溪)에 지은 서실이며, 풍석암서옥은 자연경실장이 마련되기 이전 10세경에 조부 서명응을 시봉하면서 만든 서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카노시마도서관본과 국립중앙도선관본 모두 전용인찰공책지에 필사한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나카노시마도서관본은 한 면이 10줄로 이루어졌으며, 국립중앙도서관본은 12줄로 구성되었다. 두 본의 서지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장처

오사카부립나카노시마본

국립중앙도서관본

표제

居家襍服

居家雜服攷

책수

2책 3권

2책 3권

분권표시

上·下

乾·坤

판본

筆寫本(印札空冊紙 10줄)

筆寫本(印札空冊紙 12줄)

專用印札空冊表示

(版下口)

自然經室藏, 楓石庵書屋

 

인장

상단:大阪府立圖書館藏書之印

상단:朝鮮總督府圖書館藏書之印

하단:東方一士宋秉璿章

목차비교

外服圖

內服圖

居家雜服攷目錄

居家雜服攷 卷之 一 外服

居家雜服攷卷之 일 內服

童子服圖

女子服圖

居家雜服攷 卷之 三 幼服

內外長幼禮服燕服同異表

玄端居九服之外爲九服之本以爲士之家服表

宵衣居六服之外爲六服之本以爲士妻之家服表

居家雜服攷目錄

外服圖

居家雜服攷 卷之 一 外服

內服圖

居家雜服攷 卷之 二 內服

童子服圖

女子服圖

居家雜服攷 卷之 三 幼服

內外長幼禮服燕服同異表

玄端居九服之外爲九服之本以爲士之家服表

宵衣居六服之外爲六服之本以爲士妻之家服表

내용적 가치
『거가잡복고』는 조선시대 복식사를 전공하는 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거론되어 왔으나 『거가잡복고』를 집필하면서 참고한 다양한 문헌을 통해 당시 의관제도의 실상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사대부사회의 풍조를 혁신하고자 하는 강한 문제의식과 종래의 예설(禮說)에 대한 치밀한 검토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저술이므로 조선시대 예학사·경학사·사상사의 학제간 연구가 요구된다.
서유구는 『거가잡복고』를 집필하면서 『의례(儀禮)』, 『예기(禮記)』, 『서의(書義)』, 『가례(家禮)』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이 외에도 『예서(禮書)』, 『예기집해(禮記集解)』, 『의례도(儀禮圖)』, 『예기집설(禮記集說)』, 『의례집설(儀禮集說)』, 『주례(周禮)』, 『춘추(春秋)』, 『후한서(後漢書)』, 『구당서(舊唐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회전(大明會典)』, 『석명(釋名)』, 『설문편방고』, 『주자어류』가 원용되었다.
또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환봉사(東還封事)』, 『우암선생어록』, 『사례편람(四禮便覽)』, 『부인복식고(婦人服飾攷)』, 『반계수록(磻溪隧錄)』, 『체결의(髢結議)』 등 다양한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고례와 부합하는 이상적인 의관제도를 논하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2)-은둔기의 박규수 상」, 『민족문학사연구』,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1994.
배은석·조효순, 「『거가잡복고』의 복식비판 요소연구」, 『한복문화』 4-3, 한복문화학회, 2001.
이완재, 「박규수의 생애와 사상」, 『사학논지』,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1975.
조효순, 「『居家雜服攷』에 나타난 朴珪壽의 服飾觀(Ⅱ)-外服攷를 중심으로」,, 『한복문화』 4-3, 한복문화학회, 2001.
집필자 : 이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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