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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언사(萬言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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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99.1100-20120608.TOYO_0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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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사곡류
· 작성주체 안조환(安肇煥) 찬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경성(京城) : [발행처불명], 1899
· 형태사항 2卷2冊 : 無界, 11行字數不定 ; 23.8 X 18.6 cm
· 주기사항 한글 貰冊本임
表題: 萬言詞
卷首題: 만언사
裝訂: 四針眼
備考: 각 冊의 장수와 筆寫記는 다음과 같음. 冊1(29張), 긔해(1899)졍월일향슈동셔. -- 冊2(25張), 筆寫記없음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4-227

안내정보

조선 정조 때 안조원이 추자도에 유배당해 지은 장편 국문가사이다. 유배지에서 겪는 곤궁 및 원주민으로부터 당한 멸시와 조롱, 가족에 대한 그리움, 해배에 대한 간절한 바람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동양문고본 『만언사』는 필사본으로서 조선후기에 세책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만언사』의 작가명은 이본에 따라 안도은(멱남본), 안도안(설태본), 안됴원(가람본), 안도원(가람본·동양문고본), 안조원(가람본), 기타 안도환, 안됴환, 안조환 등으로 편차를 보이나 안조원으로 획정할 수 있다.
안조원(?-?)은 정조 때 대전별감을 지냈다. 그의 신상은 ‘후기’(특히 가람본)와 「만언사」 앞부분 내용을 미루어 재구성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작가는 비교적 학식 있는 중인계급으로 11세에 모친상을 당한 후 어진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10년간 외가에서 생활했는데, 9세대가 동거하는 대가족의 가장은 백부였다. 한때 경박하게 놀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작가는 용모와 풍채, 문장과 필법, 언변과 총명 등을 두루 갖추어 임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상총(上寵)을 믿고 어인(御印)을 도용(盜用)한 죄로 인해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정치적 이념이나 당파적 소신과는 상관없는 잡범에 해당되지만 워낙 죄질이 나빠 귀양길에 오른 것이다. 이때의 모진 고초를 작품화한 것이 『만언사』인데, 궁녀들 사이에서 널리 읽힘으로써 마침내 임금의 눈에 띄어 방면되었다.
구성 및 내용
동양문고본 『만언사』는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작가의 출생 및 성장과정과 유배 경위, 유배지에서의 고생을 하소연하는 「만언사」(권1 1장a 1행-권2 8장b 11행)가 작품을 이끈다. 다음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부모」(권2 9장-12장a 5행)·「부」(권2 12장a 6행-13장a 1행)·「쳐」(권2 13장a 2행-15장a 8행)·「자」(권2 15장a 9행-16장b 1행) 네 편이 연작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섬 주민이 작가를 위로하는 형식의 「만언답셔」(권2 16장b 2행-25장a 5행)로 마무리된다. 그 끝에 간단한 ‘후기’(권2 25장a 6행-권2 25장b 7행)를 덧붙였다.
구성의 순차는 이본마다 서로 달리 짜여 있다. 또 일부는 ‘사친’류나 ‘후기’ 중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모두 빠진 작품들이 있다. 이 네 가지 구성요소를 다 갖춘 이본은 가람본과 동양문고본 둘뿐이다. 또 ‘사친’류가 실린 이본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사부모」·「사백부」·「사처」·「사자」의 순차가 다른 경우도 있고, 예외적으로 「사우곡」이 함께 실린 경우도 나타난다. 한편 동양문고본의 「만언답서」가 다른 이본에서는 「만언답사」로 표기되어 있다.
「만언사」에서 작가는 죄를 짓고 34세에 귀양길에 오른다. 추자도에 이르기까지의 유배노정기를 서술한 후 유배지에서 주민들의 비아냥과 작가의 곤궁한 처지를 핍진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에서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자조·자탄이 이어진다. 보리밥에 소금장 식사, 여름의 물과 더위, 겨울의 굶주림과 추위로 인한 괴로움 등이 그것이다. 원주민 풍속의 예의 없음을 희화화하며 비판한 대목도 눈에 띈다. 생활의 강박으로 동냥까지 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조소한 ‘귀양다리’ 대목은 그 고단함의 절정을 이룬다.
이어지는 ‘사친’류 연작에서는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재회를 바라는 간절한 심회를 차례로 표출하였다. 「사부모」에서는 이별할 때의 안타까움과 불효에 대한 자책을 그렸다. 「사백부」에서는 백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은덕을 기렸다. 「사처」에서는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을 토로하였다. 「사자」에서는 어린 아들에 대한 회상과 어질고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었다.
「만언답서」는 작가의 슬픈 하소연에 대한 답으로 섬 주민이 작가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자연히 3인칭 시점이 쓰였다. 섬 주민은 길흉화복도 순환되는 바 지금 유배의 고통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며, 불효와 불충 두 가지 큰 죄를 들어 작가의 자살을 말린다. 이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작가의 귀로를 가상하여 그려내었다. 마지막으로 식구들과의 해후를 그림으로써 작품은 해피엔드로 마무리되었다.
덧붙은 ‘후기’에서는 시대배경(정조 때)과 작가명(안조원) 및 직책(대전별감), 귀양 사유(死罪), 작품 창작(만언사), 해배 사유(연민 동정), 그리고 복직 결정(옛 구실 인준)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더불어 필사의 동기(문장 유식)와 필사시기(1899년 1월) 및 세책점(향수동)도 명기하였다. 맨 마지막에는 상업적 이득과 관련된 자기변명을 곁들이고 있어, 세책 유통과 관련된 세태 인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가람본 ‘후기’에서는 작가의 사죄(死罪)가 어인(御印)을 도용(盜用)한 것임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후 유배지에서 『만언사』를 지었고, 이것이 대전상궁인 작가의 숙모와 사촌누이에 의해 궁녀들 사이에 널리 읽히면서, 이를 계기로 임금의 눈에 띄어 극적으로 풀려나 복직되었음을 적어놓았다. 반면 규호소적본 ‘후기’(「만언 셔」)에서는 작가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어 후회와 각성의 심정을 적은 뒤, 슬픈 심회를 꾸짖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지적 가치
『만언사』는 시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소설처럼 세책으로 유통되었다. 이 작품이 노래로서의 기능보다는 이야기로서 기능이 앞선 바, 텍스트의 얼개 자체가 세책으로서 유리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 동양문고본 외에 가람본과 규호소적본도 ‘후기’를 싣고 있어, ‘만언사’류 자체가 세책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을 더해준다.
동양문고본 『만언사』는 1899년 1월(셰긔 졍월일)에 향수동 세책점에서 두 권으로 필사되었다. 모두 2책으로 이루어졌으며 크기는 가로 18.6cm×세로 23.9cm이다. 표제는 ‘萬言詞’이고 그 구성은 「만언사」와 「부모」·「부」·「쳐」·「자」, 그리고 「만언답셔」의 순으로 짜여 있다. 이들 각 편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어올리는 한편 장편화에 기여한다.
본서는 동경의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며 권1은 29장, 권2는 25장으로 총 54장 108쪽이다. 다른 이본들이 대개 2단 또는 3단 종서(縱書)로 쓰인 데 반해, 죽 이어 쓴 줄글 종서의 형태를 띤다. 순국문이며 궁체(宮體)로 필사되었다. 한 쪽은 정연하게 11줄씩 배열되었다.
이본마다 편차가 있지만, 동양문고본 『만언사』는 4음보 1행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 전체 993행의 분량이 된다. 세부적으로 「만언사」 724행, 「부모」 52행, 「부」 13행, 「쳐」 38행, 「자」 18행, 「만언답셔」 148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만언사」에는 2음보행이 하나, 6음보행이 다섯 들어 있으며, 「부모」에는 6음보행이 하나, 「만언답셔」에는 2음보행이 하나 끼어 있다. 이를 2음보 1행으로 환산하면 총 1990행이 된다. 율격은 4·4조가 우세한 가운데 3·4조와 함께 4음보격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어 2·3조와 2·4조가 그 뒤를 받치고 있으며, 드물게 4·5조와 4·2조도 나타난다.
‘후기’는 작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명은 ‘안도원’으로 적혀 있으나 안조원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미루어 『만언사』의 창작시기는 정조(1777-1799) 때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만언사’의 이본은 모두 10종이다. 국립도서관본 『만언』와 『샤고향』, 가람본(서울대 규장각) 『만언』, 연세대본 『謾言辭』, 閨壺消寂본(연세대) 『만언』, 남가본(한중연) 『젹거긔』, 雪苔본(박요순) 『만언』, 覓南본(김일근) 『안도은가』, 교토대본(京都大) 『萬言辭』, 동양문고본 『萬言詞』가 그것이다. 가람본과 국립도서관본 두 종이 한 계열이고, 동양문고본과 멱남본이 같은 계열을 이룬다.
이들 이본은 구를 생략하거나 건너뛴 경우가 많고, 첨가와 변형은 필사과정에서의 실수 외에 의도적인 면까지 보인다. 먼저 쓴 구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써 순서가 틀리는 경우가 있으며, 단순 필사과정에서 오자와 결자가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필사자 고유의 개작, 텍스트의 오기를 그대로 필사한 것도 많다. 애초에 순국문으로 필사되었다가 후대의 이본에 이를수록 표기어휘의 한자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판본이 이루어진 시기는 국립도서관본, 가람본, 연세대본 등과 견주어 동양문고본이 비교적 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소설 『청년회심곡』에도 『만언사』의 일부분이 삽입되었다.
내용적 가치
『만언사』는 조위의 「만분가」, 김진형의 「북천가」와 더불어 유배가사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사실적 필치로 유배지 추자도의 삶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조선후기 장편 국문가사로 우뚝 섰다.
작가의 신분이 중인이라는 점 또한 작품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만언사」의 앞부분 출생과 성장 대목 및 「만언답사」, 그리고 「사처」 등에서는 사대부식의 관념적 언설이 드러나지만, 「만언사」 뒷부분 유배지에서의 삶 대목에서는 사뭇 달라진다. 섬 주민의 구박과 작가가 겪는 모멸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서민문학적 성격에 접근한 것이다. 이로써 『만언사』는 우리 가사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안조원은 유배가사의 작가 가운데 신분이 가장 낮다. 보통 정치적 패배로 인해 귀양길에 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작가는 어인을 도용한 죄로 겨우 죽음만 면하고 추자도로 유배를 당했다. 그렇기에 당당한 태도와 소신을 표방한 여느 유배가사 작가와는 달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대목이 자주 전개된다. 눈물로 참회하는 그 진정성이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 마침내 임금의 마음까지 움직인 것이다.
『만언사』는 한편으로 당시 문학지식의 보물창고 구실을 맡기도 하였다. 993행이라는 장편의 덕을 보기도 하였지만 작가는 임금을 포함한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한 정황은 몇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중국 고전으로 요(堯)와 장자 및 도연명·이백·두보·소동파에 이르기까지 망라된 바, 고대민요를 비롯하여 서(序)·부(賦)·사(辭)·시(詩)가 차용되었다. 우리 쪽으로는 고려 때의 「어부가」와 정몽주·이방원의 시조, 정철의 「장진주사」 및 사설시조들, 그리고 「상사별곡」·「춘면곡」·「어부사」·「백구사」 등 12가사에 이르기까지 궁중악장과 시조·사설시조·가창가사를 끌어들였다. 그밖에도 많은 전고를 인용함으로써 독자가 작품에 쉽게 몰입하게끔 돕고 있다.
더하여 다채로운 수사기법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덕분에 자칫 서사성에 함몰되어 건조해질 수 있는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결과를 낳았다. 『만언사』에는 반복법보다는 열거법이, 대조법보다는 대구법이, 또 직유법보다는 은유법이 많이 쓰였다. 그밖에도 상징법과 과장법, 점층법, 반어법 및 중의법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작품 전개에 묘미를 더해주었다.
대신에 당대의 정치 및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 약해졌다. 하지만 양반작가 일변도의 유배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공이 크다. 공연히 불필요한 힘을 쓰거나 멋져 보이려고 헛된 분칠을 하지 않은 점은 이 작품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다. 『만언사』는 이런 강점들을 작품 내에서 최대한 융화시켜 세책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윤형덕, 「만언사 연구」 ,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6.
이재식, 「만언사 이본연구」, 『건국대학교 대학원 논문집』32, 건국대학교 대학원, 1991.
김유경, 「만언사 연작 연구」, 『연민학지』4, 연민학회, 1996.
윤성현, 「동양문고본 만언사 연구」, 『열상고전연구』21, 열상고전연구회, 2005.
집필자 : 윤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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