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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원류(歌曲源流)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Z.1929.1100-20150331.OGURA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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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사곡류
· 작성주체 박효관(朴孝寬, 1800-1880)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안민영(安玟英, 1816-?)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유인본
· 발행사항 경성(京城) : 경성대학조선문학회(京城大學朝鮮文學會), 소화 4(1929)
· 형태사항 不分卷1冊(105張) : 26.5 X 18.9 cm
· 주기사항 表題: 歌曲源流
書根題: 歌曲源流 女唱類聚
歌曲源流小敍: 己巳(1929)中伏前 二日 崔南善(1890-1957)
識語: 崔南善氏 藏本에셔 謄寫
四針眼訂法. 국한문혼용체. 女唱類聚 合編. 등사본(필사본)이지만 여창유취에는 판심에 ‘女唱類聚’ 있음. (新) L174550(사본)도 같은 책임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174549

안내정보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 1800-1880)이 문생(門生)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제작한 가곡(歌曲) 가집(歌集)이다. 20여 종의 이본이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1929년 최남선 소장본을 저본으로 유인본의 형태로 간행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가곡원류』의 대표 편자는 박효관(朴孝寬)이지만, 편찬과정에서 박효관의 문생인 안민영(安玟英)의 역할이 컸다. 박효관(1800-1880)은 19세기를 대표하는 가객이다.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이다. 유명 가객이었지만 생애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생애 초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이는 그가 중인 계층이었던 것과 관계되는 것 같다. 박효관은 서울 오군영(五軍營) 소속 수군(守軍)이었는데, 고종 초에는 경복궁, 경희궁의 위장(衛將)을 지냈다. 동시에 가객으로 활동을 했다. 구전에는 호조의 요직에 이른 적이 있다고도 하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생애 후반에는 동지중추(同知中樞) 벼슬을 얻었다.
박효관의 집은 인왕산(仁王山) 아래 필운대(弼雲臺) 근방 우대 지역에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이라는 풍류방을 열어 운영했다. 운애산방에는 많은 남녀 가객들이 음악 풍류회를 열거나 노래를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또한 그는 우대 지역의 유명한 풍류회 '노인계(老人稧)', '승평계(昇平稧)'의 수장이기도 했다. 이런 가객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시 여항 음악인들은 그를 존경해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박효관의 가객 활동에서 가장 큰 좌상객(座上客)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다. 박효관은 제자 안민영을 비롯한 음악예능인들과 함께 대원군의 주 거처인 운현궁(雲峴宮)을 비롯해 별장이 있는 삼계동 석파정(石坡亭), 공덕리 아소당(我笑堂), 양주 곧은골 산장(山莊) 등을 중심으로 많은 가곡 연주회를 가졌다.
安玟英(1816-1885 경)의 자는 성무(聖武)·형보(荊寶)이고, 호는 주옹(周翁)·구포동인(口圃東人)이다. 안민영 생애 전반기 역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생애 후반은 흥선대원군을 모시는 겸인으로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민영이 박효관을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다. 안민영은 스승 박효관을 매우 존경하고 따랐으며, 스승의 거의 모든 활동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다수의 가곡 작품과 글로 남겼다. 이 글들은 그의 개인 가집인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실려 있다. 안민영은 가곡에 해박해서 노래가사를 잘 지었으나, 그 자신이 노래를 잘 불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워낙 가사를 잘 짓고, 다수의 작품을 남겼기에 후세에 가객으로 알려졌다. 그는 스승을 도와 『가곡원류』를 편찬했는데, 이 가집 편찬 이후 『가곡원류』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되 약간의 변화를 가미한 『해동악장(海東樂章)』(1876)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가집에 스승 박효관은 서문(序文)을 써주었다. 이 외에 소규모 가집 『승평곡(昇平曲)』을 남겼는데, 이 역시 스승과 함께 한 가곡 풍류회를 위해 만든 가집이다.
『가곡원류』 편찬은 흥선대원군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박효관과 흥선대원군의 만남에는 안민영의 역할이 컸다. 안민영이 흥선대원군을 모시기 시작한 것은 1867년(고종 4)부터인데, 대략 이 즈음부터 대원군은 박효관이 가집을 만들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원군은 가집 제작을 위해 인왕산 아래 만리장성집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구성 및 내용
육당 최남선이 소장했던 『가곡원류』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재는 1929년에 만든 이 유인본이 그 모습을 대신 전해주고 있다. 이에 이 유인본을 학계에서는 육당본 『가곡원류』라고 부른다.
육당본은 총 101장으로 되어 있다. 표지는 사침(四針)의 철장(綴裝)으로 되어 있고, 표제는 『가곡원류(歌曲源流)』라고 붓글씨로 쓰여 있다. 내 표지부터 등사 글씨가 시작된다. 내 표지는 왼쪽 상단에, 네모 상자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가곡원류(歌曲源流)' '경성대학(京城大學) 조선문학회(朝鮮文學會)'라 쓰여 있다. 내 표지를 넘기면 여백으로 된 첫 면에 '동경대학도서(東京大學圖書)' '소창장서(小倉藏書)' 2개의 도장이, 다음 면에 '「가곡원류(歌曲源流)」소서(小序)'라는 글 상단 왼쪽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학부(文學部) 언어학연구실(言語學硏究室)'이라는 좁고 긴 직사각형 도장이 찍혀 있다.
이 가집의 구성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歌曲源流 小序
② 歌曲源流, 論曲之音
③ 四聲, 平調 羽調 界面調
④ 歌之風度形容十五條目
⑤ 梅花點長短, 長鼓長短
⑥ 男唱 28악곡, 女唱 19악곡
⑦ 등인에 대한 기록
①은 육당 최남선이 쓴 서문이다. 이 글에서는 당대까지 전승되는 여러 『가곡원류』 이본들의 제첨이 이렇게 붙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한 이 가집은 자신의 일람각(一覽閣)에 있던 장서를 대본으로 제작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가집의 표제는 『가곡원류(歌曲源流)』인데, 본문에는 『청구악장(靑邱樂章)』이라 제첨되어 있다고 한다.
②~⑤까지는 가곡관련 음악정보들이다. 이들 내용은 『가곡원류』 계열 이본 대부분에 공히 등장하는 것들이다.
⑥은 가곡 본문에 해당한다. 『가곡원류』계 가집들이 대개 남창 30곡, 여창 20곡인데 반해 육당본 악곡수는 조금 적다. 악곡과 작품에 대한 것은 아래에 다시 설명한다.
⑦에는 "일구이구년(一九二九年) 칠월(七月) 일(日). 최남선씨(崔南善氏) 장본(藏本)에셔 등사(謄寫)"라 기록되어 있다.
작품 본문인 ⑥은 총 804수로 되어 있는데, 전체 구성과 악곡별 작품 수는 다음과 같다.

羽調    初中大葉        1-3(3수)

        長大葉  4(1수)

        三中大葉        5-6(2수)

界面調  初中大葉        7(1수)

        二中大葉        8(1수)

        三中大葉        9(1수)

        後庭花  10(1수)

                      11(1수)

        二後庭花        (0수)

羽調    初數大葉        12-22(11수)

        二數大葉        23-60(38수)

        中擧            61-77(17수)

        平擧            78-97(20수)

        頭擧            98-120(23수)

        三數大葉        121-141(21수)

        搔聳            142-153(12수)

栗糖數大葉              154-158(5수)

界面    初數大葉        159-162(4수)

        二數大葉        163-231(69수)

        中擧 附平頭     232-355(124수)

        頭擧            356-417(62수)

        三數大葉        418-438(21수)

        蔓橫            439-463(25수)

                      464-518(55수)

        羽樂            519-537(19수)

        旕樂            538-562(25수)

        編樂            563-569(7수)

        界樂            570-595(26수)

        編數大葉        596-616(21수)

        旕編            617-626(10수)

女唱類聚 

羽調    중한닙  627(1수)

界面調  二中大葉        628(1수)

        後庭花  629(1수)

                      630(1수)

        將進酒  631(1수)

                      632(1수)

羽調    長數大葉        633-645(13수)

        中擧            646-655(10수)

        平擧            656-661(6수)

        短數大葉        662-673(12수)

栗糖數大葉              674-675(2수)

界面調  數大葉  676-691(16수)

        中擧            692-709(18수)

        平擧            710-733(24수)

        短數大葉        734-742(9수)

                      743-756(14수)

        羽樂            757-773(17수)

        界樂            774-787(14수)

        編數大葉        788-804(17수)

수록작품 수는 남창 29개 악곡에 626수, 여창 19개 악곡에 178수, 총 804수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체제는 남창, 여창 순이고, 여창에는 '여창류취(女唱類聚)'라 밝혀주고 있다. 악곡 '이후정화(二後庭花)'의 부기에는 "금실기조사설부상(今失其調詞說不上)"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후정화 악곡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악곡명의 'ㄱ'표, 작품 서두부의 '△'표 등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작품의 시작은 한 자 내려씀으로써 작품간 구분을 밝혀주고 있다. 표기는 국한문을 혼용하고 있다. 또한 모든 작품은 가곡 오장법에 따라 장과 장 사이를 한 자씩 띄어 쓰되, 사장과 오장은 띄지 않고 이어 쓰고 있다.
서지적 가치
근대 초 국학자, 국문학자들은 가집에 대한 관심으로 몇 종 가집을 등사본 혹은 연활자본으로 출간했다. 『가곡원류』, 『청구영언』, 『해동가요』가 대표적인 가집이다. 그리고 이것들 대부분은 최남선 소장본을 대상으로 제작되었다. 등사본 『가곡원류』도 역시 최남선 소장본을 대상으로 했다. 그런데 이들 출간 가집들 중 유일하게 『가곡원류』만이 최남선의 '자서(自序)'가 들어있다.
육당본 『가곡원류』는 등사본으로 제작되었기에 비교적 널리 유통되었다. 오구라 신페이가 이 책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32년까지는 경성대학에 그리고 1933년부터는 도쿄대학에 근무하면서 경성대학 교수도 겸임하였으니, 이 가집을 구득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특히 향가를 해독하면서 더욱 깊어진 그의 조선 시가에 대한 관심은 가곡 가집에까지 미쳐 『청구영언』을 비롯한 몇몇 가집을 소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곡원류』에 이르러서는 필사본인 오구라본 『가곡원류』(동양문고본과 동일 내용)와 등사본인 육당본 『가곡원류』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조선 시가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을 알 수 있게 한다. 오구라문고의 육당본 『가곡원류』에는 어떤 가필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하다. 이는 필사본인 오구라본 『가곡원류』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때 도쿄에서 활동한 마에마 교사쿠가 자신의 소장 조선 가집에 수많은 가필 흔적을 남긴 것과 대조가 된다. 언어학을 전공한 오구라 신페이에게 조선 가요에 대한 관심은 당시까지는 아직 연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용적 가치
박효관·안민영 그룹의 『가곡원류』 제작에는 수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구백 수에 육박하는 큰 규모였고, 여기에 당시 음악적 상황을 온전히 담아내고 나아가 성악보로까지 제작하려는 큰 기획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수 년 동안 여러 개의 가집이 계속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제작된 가집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필사 유통되며, 당시 대표적인 가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육당본 『가곡원류』는 이 계열 가집들 중 초기본에 해당한다. 기획 후, 첫 단계에서 만들어진 가집이라는 것은 이 가집 구성 체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악곡 분류와 순서이다. 우선 악곡 분류에서 거의 대부분 다 당대의 현행대로 잘 분류하였는데, 오직 계면조의 '중거와 평거' 두 악곡은 미처 분류를 못하고 이를 묶어 '중거부평두(中擧附平頭)' 안에 배치하였다. 이는 편찬자들의 악곡 분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부분에서 수십 수 가곡의 '사설과 악곡' 사이 고민을 안은 채 가집 편찬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런 고민을 그대로 담아낸 결과가 육당본인 것이다.
또한 악곡의 가창 순서에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나타난다. 이는 장형 시조들을 얹어 부르는 일부 악곡에서 보인다. 당시 가창 순서로는 '계락→우락→얼락→편락' 순으로 되어야 하는데, 육당본에서는 '우락→얼락→편락→계락' 순으로 되어 있다. 29개나 되는 악곡을 가창순서대로 잘 배열해 오다가, 바로 이 뒷부분에서 이러한 오류가 발생했다. 이는 초기 가집 편찬에 큰 참고가 되었던 가집 『지음』을 악곡 배열의 영향이다. 『지음』의 악곡 배열은 가창 순서가 아닌 악조(우조·계면조) 순서인데, 육당본은 이를 전면 수정하여 가창순서에 맞게 대대적인 재배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바로 거의 뒷부분에 이르러 『지음』의 악곡순서를 그만 그대로 가져왔던 것이다. 바로 초기본이 겪는 쉽지 않은 작업의 흔적이다. 이처럼 육당본은 『가곡원류』 초기의 모습을 잘 간직한 가집이다.
최남선은 1929년 등사본보다 더 이른 1913년에 신문관에서 『가곡선』을 발간했다. 이때 『가곡선』의 저본이 바로 육당본 『가곡원류』였다. 이는 근대초 활자본과 등사본으로 항간에 널리 알려진 『가곡원류』가 바로 초기본인 육당본 『가곡원류』였음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강경호, 「가곡원류계 가집의 편찬 특성과 전개양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신경숙, 「『가곡원류』 초기본 형성과정과 의미」, 『한민족문화연구』 36, 한민족문화학회, 2011.
심재완, 「가곡원류계 가집연구」, 『청구대학논문집』10, 청구대학교, 1967.
황인완, 「가곡원류의 이본 계열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집필자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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