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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도감극각본(山臺都監劇脚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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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930.1100-20160331.OGURA_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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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예술 | 자부-예술류
· 작성주체 조종순(趙鍾洵) 구술
김지연(金志淵) 채록
· 판종 유인본
· 발행사항 경성(京城) : 경성제국대학조선문학연구실(京城帝國大學朝鮮文學硏究室), 소화 5(1930)
· 형태사항 1冊(52張) : 27.0 X 19.3 cm
· 주기사항 表題: 山臺都監劇脚本
書根題: 山臺都監劇
刊記: 一九三○年春三月十七日 京城帝國大學朝鮮文學硏究室
假綴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174856

안내정보

1930년 3월 17일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의 주관 아래 연희자 조종순(趙鍾洵)의 구술을 김지연(金志淵)이 필사한 양주별산대놀이의 대본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29년 9월 경복궁 조선박람회에서 열린 공연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는 놀이패의 우두머리인 조종순을 연구실에 초빙하여, 극의 유래·전수·조직 등에 관하여 3일 여에 걸쳐 조사하고 대본을 채록했다. 이것이 곧 『산대도감극각본』으로 본 대본은 대사의 표현이 예스럽고 경기 지역의 사투리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양주별산대놀이의 옛 모습을 잘 전해 주고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양주별산대놀이는 1929년 9월 경복궁 조선박람회에서 열린 공연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매일신보』 1929년 12월 8일자 신문에 의하면 양주별산대놀이패가 이 공연을 끝으로 그 도구 전부를 모두 팔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총독부박물관에서 이를 구입하는 동시에 활동사진으로 촬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의 가면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활동사진은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당시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는 놀이패의 우두머리인 조종순을 연구실에 초빙하고, 극의 유래·전수·조직 등에 관하여 3일여에 걸쳐 조사하고 대본을 채록했다. 이것이 바로 '山臺都監劇脚本'으로서 조종순의 구술, 김지연의 채록이다. 김지연은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있었다고 한다. 조선문학연구실에서는 학부생으로 김재철(金在喆)과 조윤제(趙潤濟) 등이 채록을 도와주었다.
조종순(趙鍾洵)은 탈놀이의 전 과장을 출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꾼이었는데, 놀이의 공연이 점차 없어지게 되자 탈을 팔기 위해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양주의 관아가 폐쇄되자 양주를 떠나 서울 근교인 이태원으로 이사하여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양주별산대놀이의 대본은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 채록되었다.
(1) 조종순 구술, 김지연 채록, 『산대도감극각본』,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 1930. 3. 17.
(2) 김재철, 『조선연극사』, 청진서관, 1933.
(3)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산대잡극(山臺雜劇)에 대하여」, 『조선(朝鮮)』 261호, 조선총독부, 1937.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에 번역 수록.
(4)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산대희(山臺戱)」, 『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 동경: 六三書院, 1954.
秋葉隆, 심우성 옮김, 『조선민속지』, 동문선, 1993 ;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번역 수록
(5) 임석재, 「양주별산대희」, 『협동』 44·45호, 대한금융조합연합회, 1954.
(6) 조동일 소장, 『양주산대놀이』(1957년본).
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홍성사, 1979. 수록
(7) 이두현, 「양주별산대놀이 대사」,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8) 김성대 구술·채록, 「양주별산대놀이 연희본」
심우성, 『한국의 민속극』, 창작과 비평사, 1975.
(9) 서연호, 「양주별산대놀이」,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10) 정형호, 『양주별산대놀이』, 화산문화, 2000.
(1)은 1930년 3월 17일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에서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교수의 지도하에 작성된 대본으로서, 본 '山臺都監劇脚本'이다.
(2), (3), (4)는 모두 조종순의 구술과 증언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이 조사·연구들은 20세기 초반 양주별산대놀이의 모습을 전해 주는 매우 귀중한 성과이다.
(5)는 (1)과 같은 시기에 조종순을 대상으로 양주별산대놀이의 대본을 채록한 것이다. 당시 경성제국대학 민속학참고실의 책임자였던 사회학 교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조종순을 불러 양주별산대놀이를 조사·연구하였는데, 조선어를 못하는 아끼바는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수료하고 졸업논문을 준비 중이던 임석재(任晳宰)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임석재 선생이 이 대본을 채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복궁에서 박람회가 개최된 1929년 9월에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학생이었던 임석재는 같은 대학의 사회학 교수였던 아키바 다카시가 경복궁에서 가면극 공연이 있으니 와보라고 연락해 양주별산대놀이를 구경했는데, 얼마 후 그의 요청으로 조종순(趙鍾洵)으로부터 대사를 채록했다고 한다.
(6)은 양주의 연희자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대본을 그곳 홍갑표(洪甲杓)가 조동일(趙東一) 교수에게 전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나온 대본 가운데 가장 충실한 연희본으로 평가된다.
(7)은 박준섭(朴俊燮)·김성태(金星泰) 구술, 이두현 채록(1958.1 녹음)의 대본이다.
(8)은 양주별산대놀이의 후원자이며 연희자였던 김성대가 구술·채록한 대본이다.
(9)는 현지조사를 통해 양주별산대놀이의 성립, 놀이의 환경, 놀이패와 놀이꾼, 탈, 기본춤, 놀이의 방식, 연희 내용, 등장인물의 성격 등에 대해 충실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10)은 문화재청이 국가에서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들의 원형을 보존·계승하기 위한 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 기록화사업은 모든 중요무형문화재들에 대하여 기록영화를 촬영하는 것과 책자를 발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0)은 이런 취지를 살려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와 전승 배경, 연희 내용, 탈, 춤사위, 노래, 연희자, 연희 내용, 전승의 문제점과 과제 등에 대해 현지조사를 통하여 충실하게 정리하고 있다.
구성 및 내용
『산대도감극각본』은 27.0 X 19.3 cm의 크기이며 1책 46장으로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첫 장에 '山臺都監劇脚本'이라는 제목이 있고, 둘째 장에 '一九三0年春三月十七日 京城帝國大學朝鮮文學硏究室'이라고 대본의 출판 시기와 채록 주관 기관을 밝혔다. 셋째 장에 '趙鍾洵 口述 金志淵 筆寫'라고 되어 있고, 이어서 산대도감극의 유래를 설명하고, 부록으로 연희시기, 연희 지역, 연희자의 신분, 연희자의 거주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서막의 고사부터 시작하여 연희 내용을 과장 별로 채록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유양리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 송석하와 아키바 다카시는 애오개본산대놀이의 영향, 조동일 소장의 양주별산대놀이대본(1957년본)에서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영향, 본 대본의 제보자인 조종순은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대체로 19세기 초·중엽에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을 본떠 성립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29년 9월 경복궁 조선박람회에서 열린 공연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30년대 초에 다시 놀다가 일제강점기 말에 크게 약화된 후 명맥만 유지했다. 1951년 11월 김성대의 후원에 힘입어 김성태가 기억을 더듬어 가면을 복원하고 남은 소수의 인원으로 놀이를 복원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8명의 연희자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고, 사단법인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현재 연행되는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32명이지만, 하나의 탈을 다른 배역에 겸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탈은 22점이다. 첫째상좌(도련님 겸용), 둘째상좌(서방님 겸용), 옴중, 먹중⑷, 연잎, 눈꿈쩍이, 완보, 신주부, 왜장녀(해산모·도끼누이 겸용), 노장, 취발이, 원숭이, 첫째소무(애사당 겸용), 둘째소무, 말뚝이(신장수·도끼 겸용), 샌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미얄할미 등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의 옛 가면은 1929년 9월 박람회 이후 판매한 가면들 22점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대도감극각본』은 우선 맨 앞에서 산대도감극의 유래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중국 고대 은(殷)나라 최후의 왕인 주(紂)가 달기(妲己)라는 미희에 빠져 충신들을 죽였기 때문에, 원통하게 죽은 원혼들이 요귀가 되어 작란(作亂)이 막심했다. 그래서 강태공이 이를 제어하기 위해 천살성과 지살성을 만들어 놀이로써 요귀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본 『산대도감극각본』의 고사를 지내는 장면에 "연잎과 눈꿈쩍이가 중요한 자이기 때문에 가운데 둔다"라는 설명과, 연잎은 천살성(天殺星), 눈끔적이는 지살성(地殺星)이라는 설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고려 말 승려 신돈이 도승이 되려할 때, 호사자들이 신돈을 비방하며 여색으로 시험하여 그 공부를 파하려고 했다. 그래서 소무당(小巫党)으로 하여금 신돈을 유혹케 하니, 그가 방탕하게 되었다. 또 소무당들이 신돈을 유혹하여 소무당은 달기의 행세를 하고, 도승은 주의 행세를 했다. 이상 두 유래는 사실과 거리가 먼 유래담이다. 다만 강태공이 요귀를 제어하기 위해 가면극을 만들었으니, 이를 존중하면서 없애지 말고 잘 전승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재 양주별산대놀이는 제1과장(科場) 상좌춤, 제2과장 상좌·옴중놀이, 제3과장 옴중·먹중놀이, 제4과장 연잎·눈꿈쩍이놀이, 제5과장 염불놀이, 제6과장 침놀이, 제7과장 애사당법고놀이, 제8과장 파계승놀이, 제9과장 신장수놀이, 제10과장 취발이놀이, 제11과장 의막사령놀이,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 제13과장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산대도감극각본』은 제1과정(科程) 상좌춤, 제2과정 옴 등장, 제3과정 묵승(墨僧)과 옴, 제4과정 연잎과 눈꿈쩍이 등장, 제5과정 팔목과정(염불놀이, 침놀이), 제6과정 애사당놀이, 제7과정 노장과정, 제8과정 말뚝이과정(말뚝이가 신장수역으로 등장: 필자 주), 제9과정 취발이과정, 제10과정 샌님과정(현재의 의막사령놀이와 포도부장놀이를 합친 내용: 필자 주), 제11과정 신할아비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본 『산대도감극각본』은 1930년 3월 17일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의 주관 아래 연희자 조종순(趙鍾洵)의 구술을 김지연(金志淵)이 필사한 양주별산대놀이의 대본으로서, 당시 등사했던 원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용이 시작되는 첫 면에 '東京帝國大學 文學部 言語學硏究室'이라는 붉은색 직인이 찍혀 있다.
당시 등사했던 원본은 몇 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조윤제 선생의 도남문고에도 원본이 있다. 이 도서관에는 이것을 다시 등사해 "國立서울大學校 中央圖書館 所藏인 山臺都監劇(謄寫本)의 寫本임"이라는 것도 있다.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도 후자와 같은 사본이 있다.
본 『산대도감극각본』은 비록 등사본의 형태로 출판되었지만, 한국 가면극의 대본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이다. 정인섭은 1928년 8월 14일 진주오광대의 대본을 채록했지만, 발표는 1933년 1월 『조선민속』1(조선민속학회)을 통해 이루어졌다
.
내용적 가치
첫째, 이 대본은 대사의 표현이 예스럽고 경기 지역의 사투리를 잘 반영하고 있어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둘째, 이 대본은 양주별산대놀이의 옛 모습을 잘 전해 주기 때문에, 현재 연희와의 비교를 통해 그동안의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대본에서는 할미의 죽음 후에 신할아비가 장고를 끼고 앉아 넋타령으로 가망청배를 부른다. 그러나 양주별산대놀이 1957년본과 이두현 채록본에서는 이 장면에서 할미의 딸인 도끼누이가 무가를 부른다. 현재도 이 장면에서 도끼누이가 무당굿(진오귀굿)을 한다. 이 장면의 연희 내용이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능보유자 노재영은 1967년에 16밀리 영화를 찍을 때는 할미의 죽음 후에 신할아비가 넋타령을 했는데, 최근에는 그것이 빠지고 대신에 무당굿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요즘 신할아비의 넋타령(넋걷이무가) 대신에, 도끼누이가 무당굿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셋째, 이 대본은 현재의 '과장'이라는 명칭 대신 '과정(科程)'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그래서 가면극의 연희 단위의 옛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 대본은 현재 먹중이나 목중이라고 부르는 파계한 중을 한자로 墨僧, 한글로는 목중이라고 표기했다. 연희자 유한수는 우리가 흔히 목중 또는 먹중이라고 부르는 명칭에 대해, "먹중이라 그래요. '먹중'. 순수한 '먹중'이라 그러더라구요. 왜 '먹중'이냐 그러면, 검은 중이라 그래요. 검은 중. 요즘 '목중'이라 그러는 데, '팔목'이 나눠서 '팔목'이 아니라. '먹중'이라 그래요. '검을 먹'. …… 자신 있게 말하는 건 우리는 '먹중', '먹승' 이렇게 두 가지로 불러요. 그러나 '목중'은 아니다 이거야."라고 제보한다.
본 대본(1930), 임석재 채록본(1954), 1957년본, 김성대본 등 옛날 대본에서는 모두 파계한 중을 '墨僧'이라고 표기했다. 묵승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먹중이다. 묵승이나 먹중은 타락한 중, 즉 속이 검은 중이라는 뜻이다. 1950년대 채록한 최상수 채록본(『산대·성황신제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5)에서도 먹중으로 표기했다. 그러므로 목중·먹중 가운데 먹중이 예전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양주별산대놀이의 연희자는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이 대본의 부록에서도 연희자를 '양주 이배(吏輩)'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 애오개본산대놀이의 연희자는 성균관의 노비인 반인(泮人)들이었고, 봉산탈춤의 연희자는 하급관속이 많았으며, 강릉관노가면극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층관속, 즉 하급이속인 관노들이었다. 그러므로 『산대도감극각본』은 일찍이 가면극 연희자의 계층에 대해 정확하게 밝히고 있었다. 현재 가면극 연구자들 사이에 가면극 연희자의 계층에 대해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데, 이 자료는 가면극의 연희자에 대한 논의에 중요한 제보를 하고 있다.
참고문헌
서연호, 「20세기 양주별산대놀이의 전승과정」, 『한국가면극연구』, 월인, 2002.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92.
전경욱, 「양주별산대놀이의 지속과 변화」, 『한국가면극과 그 주변 문화』, 월인, 2007.
전경욱 역주, 『민속극』,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조동일,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 지식산업사, 2006.
집필자 : 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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