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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6월 왜관 대관 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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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E.0000.2626-20180331.KY_X_1084_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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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공인문기 | 경제-상업-공인문기
· 작성지역 동래부
· 작성시기 병신
· 형태사항 24.8 X 37.1 | 1
· 인장서명 3 (흑색, 원형)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1084

안내정보

병신년 6월 24일 왜관의 대관이 병신년에 지급해야 할 공작미 중 500석을 지급받았다는 내용으로 작성한 각서이다. 문서 말미에 동래부 훈도(訓導)인 첨지(僉知) 이성오(李聖五)와 별차(別差)인 주부(主簿) 현자술(玄子述)에게 발급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진상과 공무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목면이나 쌀은 역관인 훈도와 별차가 대마번의 대관에게 수표로 주었다가, 훈도와 별차가 교체되는 연말에 한꺼번에 지급하였다. 즉 매달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연말에 모아서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이 문서는 500석을 지급하겠다는 의미로 작성된 수표이며, 실제 지급은 12월 29일에 이루어졌다.

상세정보

병신년 6월 24일 왜관의 대관이 병신년에 지급해야 할 공작미 중 500석을 지급받았다는 내용으로 작성한 각서이다. 문서 말미에 동래부 훈도(訓導)인 첨지(僉知) 이성오(李聖五)와 별차(別差)인 주부(主簿) 현자술(玄子述)에게 발급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진상과 공무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목면이나 쌀은 역관인 훈도와 별차가 대마번의 대관에게 수표로 주었다가, 훈도와 별차가 교체되는 연말에 한꺼번에 지급하였다. 즉 매달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연말에 모아서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이 문서는 500석을 지급하겠다는 의미로 작성된 수표이며, 실제 지급은 12월 29일에 이루어졌다. 문서에는 대관의 것으로 보이는 흑색 인장이 3 군데 있는데, 제목, 공작미 수량, 날짜에 해당하는 부분에 차례로 찍혀있다. 이 각서는 공작미를 지급받으면 다시 훈도에게 반납하였다.
공작미는 일본과의 공무역(公貿易)에서 수입품에 대한 댓가로 지급된 쌀을 말한다. 공무역은 대마번에서 수출한 물건을 조선 정부가 구입하는 무역이다. 본래 공무역에서 일본수입품에 대한 결제수단은 공목(公木), 즉 목면이었다. 처음에는 품질이 좋은 8승 40척의 무명으로 양끝에는 청사(靑絲)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면의 품질이 떨어졌고, 17세기 이후 일본 국내 목면 산업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은 공목 품질의 저하와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 생산 발달에 따라 일본은 목면으로 결제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게다가 대마도에 쌀이 부족해지면서 공목 중 일부를 쌀로 지불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 이후 공목 중 일부를 쌀로 지급하였는데, 이것이 공작미이다. 공작미를 처음 허용했던 1651년(효종 2)에는 공목 중 일부 즉 300통(1통=50필)을 미(米) 12두로 환산하여 미 12,000석을 지급하였다가, 1660년(현종 1) 5년을 기한으로 400통 즉 16,000석으로 증가시켜 주었는데, 이후 그것이 항례가 되었다. 그리고 1811년 역지통신을 실시하면서 1812년부터 공작미의 교환 비율을 공목 1필 당 쌀 10두로 결정하여 공작미의 지급량을 줄였다. 따라서 전보다 2,666석 10두가 줄어든 13,333석 5두를 해마다 일본(대마번)에 지급하게 되었다.
진상과 공무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목면이나 쌀은 역관인 훈도와 별차가 대마번의 대관에게 수표로 주었다가, 훈도와 별차가 교체되는 연말에 지급하였다. 즉 매달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연말에 모아서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공작미는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전근대적 조일무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왜관을 통해 대마도로 건너간 조선의 공목과 공작미는 일본 대마도 경제의 기초를 이루었다.
집필자 : 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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