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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면주전(綿紬廛) 상인 유진순(劉鎭淳) 단자(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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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E.1882.0000-20160331.KY_X_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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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전문서 | 경제-상업-시전문서
· 작성주체 발급 : 유진순(劉鎭淳)
수취 : 대방(大房)
· 작성시기 1882
· 형태사항 1張 | 종이 | 한자
· 인장서명 1 (흑색, 장방형)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1210

안내정보

1882년(고종 19) 8월 일 면주전 상인 유진순(劉鎭淳)이 자신의 영업 장소인 후2방 남문 내 동쪽 제4방에서 자기 아들 유태신(劉泰信)과 함께 영업하게 해달라고 대방(大房)에 청원하는 단자이다. 대방에서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상세정보

1882년(고종 19) 8월 일에 면주전 상인인 劉鎭淳이 자신의 점포에 아들과 함께 영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면주전 대방에 청원하는 문서이다. 대방에서는 같은 해 8월 4일, 그의 청원을 허가하고 있다.
유진순이 영업하던 점포는 "후2방 남문 내 동쪽 제4방"이다. 면주전은 현재 영풍문고가 있는 부근에 총 5동의 건물이 있었다. 종로 큰길가 쪽으로 제1방․제2방․제3방의 건물이, 그 뒤쪽으로 난 피맛길 건너편에 후1방․후2방이 있었다. 이외에 남대문 근처에도 1동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사사방남문(私私房南門)이라고 불렸다.
제1방은 중앙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5방, 동쪽으로 5방 등 모두 10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2방과 제3방 역시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한편 후 1방은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8개의 방이 있고, 거기에 다시 남쪽으로 5개의 방이 있어 모두 21개의 방을 갖추고 있었다. 후2방은 동쪽으로 4개의 방, 서쪽으로 9개의 방이 있었다. 사사방남문은 동쪽으로만 4개의 방이 있었다. 이처럼 건물을 지칭하는 방 안에 요즘 개념으로 점포라고 할 수 있는 방이 총 68개가 있었고, 그 방에 면주전 소속 상인이 점포를 내고 있었다. 유진순의 점포는 후2방 동쪽의 맨 끝 쪽 4번째 방에서 점포를 내고 있었다.
다음은 유진순의 아들 유태신의 영업에 관한 내용이다. 이 문서에서는 아들의 "移接"을 허가해달라고 하고 있다. "移"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유태신이 어딘가에서 이미 영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들 역시 면주전 소속 상인이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의 영업점을 폐쇄하고 자신의 영업점과 합치려고 한 것이다. 아마도 영업 부진으로 이윤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대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면주전 상인들의 집합체이면서 최고 의사 결정 기구는 도중이었다. 도중은 크게 간부들의 모임인 大房과 일반 조합원들의 모임인 裨房(혹은 卑房, 群衆)으로 구분되었다. 즉 대방은 면주전 전체를 통괄하는 조직이었다. 대방에는 면주전 전체를 대표하는 대행수 1명과 도영위, 부영위, 삼영위가 각 1명, 상공원, 하공원이 각각 1명씩 두어졌다. 대행수와 공원은 2개월마다 교대했지만, 영위는 상위자가 퇴임하면 그 자리를 채우는 형태로 승진해서 장기간 영위 직책을 담당했다. 이들 6명은 면주전의 책임 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로, 관청의 물품 수주와 관련된 장부나 각 조직의 자금 운영을 기록한 『전장등록』의 모든 기사 말미에 이들 6명의 서명이 기재되어 있다. 또 업무의 필요에 따라 군중행수, 난전차지 등의 직위도 마련되어 있었다. 임원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수당이 지급되었다.
집필자 : 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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