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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면주전(綿紬廛) 여사(轝士) 주의(周衣) 하기(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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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E.1890.0000-20160331.KY_X_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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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전문서 | 경제-상업-시전문서
· 작성주체 발급 : 유태응(劉泰膺) , 홍성준(洪成濬) , 김영식(金寧植)
수취 : 비방(裨房)
· 작성시기 1890
· 형태사항 1張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1784

안내정보

1890년(고종 27) 5월 27일에 국휼에 면주전(綿紬廛) 비방(裨房)에서 상여꾼이 입는 두루마기 옷값으로 지출한 내역을 정리한 하기(下記)이다. 총 49명의 옷 값 중 절반인 428냥 7전 5푼을 지출하였다.

상세정보

1890년(고종 27) 5월 27일에 국휼에 綿紬廛 裨房에서 轝士가 입는 周衣 값으로 지출한 내역을 정리한 下記이다. 시전상인의 조직인 都中은 크게 간부들의 모임인 大房과 일반 조합원들의 모임인 裨房으로 구분되었다. 이 下記는 裨房이 지출한 금액을 정리한 것이고, 임원인 次知 劉泰膺, 洪成濬과 曹司 金寧植이 裨房에 보고하고 있는 형식이다.
1890년 4월부터 6월은 神貞王后의 장례가 있었다. 신정왕후는 翼宗의 비이자 憲宗의 어머니였다. 이 국휼에서 綿紬廛은 상여꾼인 轝士가 입는 두루마기 옷[周衣]의 값으로 비용을 지출했는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우선 轝士의 수효는 住戶元軍 41명, 旗軍 2명, 預備軍 3명, 聽令 3명, 합 49명이었다. 그리고 周衣의 값은 1명당 17냥 5전으로, 총 857냥 5전이었다. 이 가운데 大房이 반을 제해 주고 실제 납부한 것은 428냥 7전 5푼이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후기 市廛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 현실』 44, 한국역사연구회, 2002.
고동환, 「개항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 綿紬廛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 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집필자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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