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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함흥부 가평사(加平社) 통문(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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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F.1891.0000-20180331.KY_X_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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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 사회-조직/운영-통문
· 작성주체 발급 : 함흥부 가평사(咸興府 加平社)
수취 : 함경도 각사(咸鏡道 各社)
· 작성지역 함경도 함흥부
· 작성시기 1891
· 형태사항 26.6 X 67.6 | 1張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942

안내정보

1891년(고종 28) 4월 8일 함흥부 가평사(加平社)에서 함경도내 각사(各社)의 첨존僉尊)에게 보낸 통문(通文)이다.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이나 관련된 인물들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는 형식의 문서이다. 통문에 수록된 내용은 대체로 통지, 문의, 선동, 권유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 편지와는 달리 개인이나 모임이 자신들의 주장을 통문을 받는 다수와 공개적으로 공유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수평적 대화를 통해 여론을 형성시키고 이를 통해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상세정보

통문은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이나 관련된 인물들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는 형식의 문서이다. 통문에 수록된 내용은 대체로 통지, 문의, 선동, 권유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 편지와는 달리 개인이나 모임이 자신들의 주장을 통문을 받는 다수와 공개적으로 공유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수평적 대화를 통해 여론을 형성시키고 이를 통해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본 통문은 일반적인 통문이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통문의 내용은 보면 다음과 같다. 의리(義理)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이륜(彛倫)이고 나라의 상강(常綱)인데 백성들에게 의리가 없다면 그것은 부자(父子)의 이륜이 사라지는 것이고 나라에 의리가 없다면 군신의 강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 북도(北道)는 궁궐과 멀고 법을 지키는 것이 해이하며 패륜으로 습속이 좋지 않아 한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미산(眉山) 한장석(韓章錫)이 북도에 계셔서 먼저 풍속이 좋지 못한 지역에 향약을 설치하고 도솔(導率)하는 방법으로 삼으셨다. 위로는 화성(化成)하게 되고 아래로는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삼강이륜(三綱二倫)가 다시 분명해지게 되었다. 지금 백성들의 마음을 모두 요나라 백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개과천선하게 되었다. 수백 년간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어 있었으나 명화(明化)가 새롭게 된 것이 이와 같다. 이외에도 학교를 흥하게 하고 농사를 성하게 하여 선화(宣化)가 14개 주에 모두 미쳐서 하나같이 되었다. 치적이 이와 같으니 읍내와 각사에 1인을 보내어 복합(伏閤)하게된 연유도 여기에 있다.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위와 같다.
본 문서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중심인물은 바로 한장석이다. 그는 1832년에 태어나 1894년에 사망한 문신이다. 정필교의 아들로 1872년(고종 9)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에 홍문관 부수찬, 교리, 부응교를 거쳐서 1881년(고종 18)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협판군국사무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예조, 형조, 이조, 예조의 판서를 거치고 함경도 관찰사와 경기도 관찰사의 외적을 지냈다. 김윤식, 민태호와 더불어 당대 문장가로 이름을 얻기도 하였으며 고종의 묘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한장석의 이력 중에서 본 통문과 관련된 것은 바로 그가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통문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북도는 바로 함경도를 가리킨다. 宣化의 대상이 된 14개 주는 바로 함경도관찰사가 관할하는 함경남도 14개 군현의 의미한다. 또한 '各社'라는 표현은 다른 군현의 각 면을 지칭하는데 함경도만 면(面)이 아닌 사(社)를 사용한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 한다.
실록에 따르면 한장석은 1890년(고종 27) 3월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91년(고종 28) 9월 경기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기재된 함경도관찰사로서 한장석의 역할은 많은 위민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구휼에 많은 정책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함경도관찰사가 소재하는 함흥부의 한 면이었던 가평사가 주도하여 한 장석과 관련된 그의 치적에 대한 공로를 위로학 위한 움직임 중 하나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이 선정비의 건립 등으로 아직 표출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공론을 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충분하게 읽을 수 있다.
집필자 : 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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