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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면주전(綿紬廛) 황태후 귀정 경하 방물 초책(皇太后歸政慶賀方物草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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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G.1889.0000-20170331.KY_X_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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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차하기 | 경제-회계/금융-차하기
· 작성시기 기축 정월 이십일일(1889)
· 형태사항 8張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721

안내정보

이 장부는 1889년 면주전에서 청나라 서태후가 다시 집권한 것을 경하하면 보낸 사신의 方物로 進獻한 綿紬 2통 20필에 대한 정부의 지급 액수 및 그에 따른 지출 내역을 1차로 정리한 것이다. 겉표지에는 "己丑正月二十一日皇太后歸政慶賀方物一起草冊"이라고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의 '一起'는 중국 사신편에 보내는 세폐와 방물의 양과 그에 대한 정부의 지급 단가를 결정하는 단위이다.
본문에는 정리 과정에서 잘못되어 고치거나 지운 부분이 있다. 또 군데군데 지출액 부분에 붉은 색으로 표시하거나 지출 내역에 점을 찍은 부분이 있다. 계산의 오류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부는 크게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앞부분은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한 부분이고, 중간에 각종 인정 등으로 지출한 부분을 정리한 후록이다. 마지막은 정부로부터 쌀을 지급받은 내역과 그것을 화폐로 전환하여 처리한 내역이 첨부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면주전이 1889년 진헌한 綿紬 2통 20필에 대해 화폐 1,600냥, 米 80석을 지급하였다. 면주전에서는 정부로부터 받은 돈과 쌀을 방매하여 얻은 돈을 합쳐 총 2,761냥 2전 6푼의 수입을 얻었다. 그리고 진헌 면주 원가나 각종 인정, 잡비 등으로 총 2,389냥 7푼을 지출하여 372냥 1전 9푼이 남았다. 이 돈은 1889년 9월의 수가책자로 이송하였다. 이는 수가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장부상으로 남은 돈들을 특정연도에 한꺼번에 회계처리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각종 인정으로 사용한 비용을 기록한 후록이다. 제용감 分文, 房納, 前例房執吏, 井間色, 公事掌務, 支調色計士, 兩郞廳色驅, 使喚 등에게 지급한 비용 등이 들어있다. 아울러 이 비용을 마련한 방법과 지불한 상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인정으로 총 171냥 5전 2푼을 지출하였다.
마지막은 '己丑五月日進獻米與染藍水紬米放賣成冊件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1889년 5월 진헌한 면주에 대해 정부에서 쌀로 지급한 것을 방매하여 얻은 소득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미곡을 총 80석을 지급받았는데, 전례방집리, 정간색, 공사장무, 별영집리와 사환, 고직 등에게 인정으로 5석 1두 여를 지급하고, 실제로는 74석 여를 지급받았다. 이를 미곡 1석당 15냥 5전의 가격으로 방매하여 총 1,161냥 2전 6푼의 화폐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수가책은 면주전 등이 정부에 면주를 진배한 이후 그 대가를 받은 시점에서의 입금액과 목적별 지출을 기록한 것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이전의 장부가 초책이다. 장부에서 수입은 上下(차하로 읽음), 지출은 上用으로 표현했다.
수가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가와 지출에 관한 절차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용되는 용어도 알아야 한다. 수가책의 기재내용에 따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수가 절차가 진행되었다.
① 대가의 수취(受價) : 납입 품목별로 1필당 공정납입가격이 정해져 있어, 그 가격에 따라 돈, 무명, 쌀을 지급받았다. 면주 1필에 대한 무명, 쌀의 교환비율은 시세와는 별도로 공적으로 정해진 가격이 있었다. 그리고 대가를 지급받을 때는 관의 창고 관리에게 人情米 몇 석을 건넸다. 이렇게 해서 수취한 동전, 무명, 쌀 등의 종류와 수량을 적었다. 무명과 쌀을 판매해서 현금화하고, 시세에 따른 作錢 비율과 현금화된 입금 총액을 기입하였다. 여기에서 사전에 들어간 잡비를 공제하고, 다시 세폐 납입과 관련된 관리, 군인 등에게 지급하는 인정을 대략 수가총액의 10% 정도 공제한다. 이외에 염색과정에서 들어간 공전이나 인정도 제외하며, 세폐 납입이나 대가를 수취할 때의 짐꾼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역시 공제하였다. 또 大房이나 영위, 수가차지와 같은 면주전 임원들에게 할당되는 추가이익 부분도 공제하였다. 이와 같은 다양한 비용을 공제한 실수입을 확정해서 기재하였다. 통상 인정이나 운반 금액의 상세한 내역은 항목별로 명기해서 후록에 기재하며, 앞부분에는 합계만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② 면주의 조달 : 납입용 면주 1필의 구입가격을 결정한다. 품질, 시가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다. 면주 조달에 드는 비용을 本色이라고 한다.
③ 분배 : 수가하면 면주전 소속 상인들에게 이익을 분배한다. 통상 대가는 화폐와 면포로 지급되었는데, 화폐의 지출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면포는 화폐로 바꾼 다음, 면주전 소속 상인들에게 분배한다. 면주전에 정식으로 출전한 상인뿐만 아니라, 사망한 시전 상인, 공깃(空衿: 구체적으로 어떤 상인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음)으로 표현된 시전 상인, 시전 소속 상인은 아니지만 면주전의 점포에서 영업을 하는 출시인에게도 이익의 일부를 배분하였다. 이들에게는 모두 동일한 액수를 지급하였다. 1깃이나 반깃도 같은 액수를 분배하였다. 반면 未參人, 즉 세폐 진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시전상인의 경우는 이들보다 훨씬 작은 액수만 분배받았다.
이렇게 분배가 끝나고 남은 액수와 공깃 몫으로 분배된 액수를 합하여, 세폐를 진배하는 데 들어간 원가를 보상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는 돈은 보용소의 수입으로 기록하였다.
수가책에 나오는 보용소는 면주전 전체의 주요한 운영 자금을 관리한 재무담당 조직이다. 왜단소는 왜인 예단을 조달, 납품하는 조직이다. 명치유신 이후 왜인 예단은 폐지되지만, 재무조직으로 존속했다.
이 장부는 1889년 면주전에서 청나라 서태후가 다시 집권한 것을 경하하면 보낸 사신의 方物로 進獻한 綿紬 2통 20필에 대한 정부의 지급 액수 및 그에 따른 지출 내역을 1차로 정리한 것이다. 겉표지에는 "己丑正月二十一日皇太后歸政慶賀方物一起草冊"이라고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의 '一起'는 중국 사신편에 보내는 세폐와 방물의 양과 그에 대한 정부의 지급 단가를 결정하는 단위이다. 면주전에서는 원래 1년에 6기, 1기에 면주 2통 20필로 되어 있어서, 매년 진헌하는 면주 14통 20필에 대해서는 시가보다 10배 가까운 가격으로 후하게 지급하였다. 그리고 사신 파견이 늘어나 이보다 많은 양을 진헌할 경우에는 거의 시가 수준이나 그보다 못한 가격으로 책정된 액수만 지급하였다. 게다가 영조대 이후에는 6기에서 4기로 줄어들어 면주전이 세폐, 방물 진헌에서 거두는 이윤이 크게 줄어들었다.
제목 왼쪽에는 제용감 分文을 지급한 내역이 적혀있고 숫자 부분에 붉은 색으로 확인한 흔적이 있다. 오른쪽에는 다른 사신 행차의 사신 방물과 관련한 인정 내역을 정리하고, 시전 상인 오좌 이○榮을 통해 전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이 장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인지, 지우라는 의미의 꺽쇠가 그려져 있다. 또 '謄書'라고 붉은 글씨가 적혀있다. 이는 베껴 적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본문에는 정리 과정에서 잘못되어 고치거나 지운 부분이 있다. 또 군데군데 지출액 부분에 붉은 색으로 표시하거나 지출 내역에 점을 찍은 부분이 있다. 계산의 오류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부는 크게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앞부분은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한 부분이고, 중간에 각종 인정 등으로 지출한 부분을 정리한 후록이다. 마지막은 정부로부터 쌀을 지급받은 내역과 그것을 화폐로 전환하여 처리한 내역이 첨부되어 있다.
① 1889년 면주전에서 청나라 서태후가 다시 집권한 것을 경하하면 보낸 사신의 方物로 進獻한 綿紬 2통 20필에 대한 정부의 지급 총액과 지급 방식, 그리고 지출 내역을 정리한 부분이다.
가. 정부의 지급 방식 및 지급 총액 : 정부에서는 면주전이 1889년 진헌한 綿紬 2통 20필에 대해 바로 지급하지 않고 15년이 지난 1896년에야 지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면주 1필당 下地木 8疋씩 계산하여 19통 10필을 지급하되, 다시 하지목 1필 당 돈 2냥씩 계산하여 총 1,920냥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실제 지불은 5/6은 화폐 1,600냥, 1/6은 화폐 4냥을 米 1석으로 환산하여 80석을 지급하였다. 면주전에서는 정부로부터 받은 돈과 쌀을 방매하여 얻은 돈을 합쳐 총 2,761냥 2전 6푼의 수입을 얻었다.
나. 지출 내역
1. 진헌 면주 원가 지불 : 면주전에서 진헌했던 면주에 대한 가격을 지불했다. 2통 20필과 함께 각종 인정 등으로 사용된 4 을 합한 총 2통 24필에 대해, 1필 당 16냥씩 총 1,984냥을 지불했다.
2. 후록에 정리된 각종 인정 : 171냥 5전 2푼
3. 수가 이전에 다양한 지출로 사용한 돈 : 200냥
4. 수가시 그리고 수가 이후 정부와 교섭 과정에서 지출한 돈 : 33냥 5전 5푼 등 총 2,389냥 7푼
다. 결산 후 남은돈 처리 : 총 372냥 1전 9푼이 남아 1889년 9월의 수가책자로 이송하였다. 이는 수가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장부상으로 남은 돈들을 특정연도에 한꺼번에 회계처리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② 각종 인정으로 사용한 비용을 기록한 후록이다. 제용감 分文, 房納, 前例房執吏, 井間色, 公事掌務, 支調色計士, 兩郞廳色驅, 使喚 등에게 지급한 비용 등이 들어있다. 아울러 이 비용을 마련한 방법과 지불한 상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인정으로 총 171냥 5전 2푼을 지출하였다.
③ '己丑五月日進獻米與染藍水紬米放賣成冊件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1889년 5월 진헌한 면주에 대해 정부에서 쌀로 지급한 것을 방매하여 얻은 소득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미곡을 총 80석을 지급받았는데, 전례방집리, 정간색, 공사장무, 별영집리와 사환, 고직 등에게 인정으로 5석 1두 여를 지급하고, 실제로는 74석 여를 지급받았다. 이를 미곡 1석당 15냥 5전의 가격으로 방매하여 총 1,161냥 2전 6푼의 화폐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집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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