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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행사가 청국 관원과 병인년 프랑스의 선교와 조선 침공을 주제로 나눈 문답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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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J.0000.0000-20180331.KY_X_0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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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외교문서류-외교문서 | 정치/행정-외교-외교문서
· 작성시기 [1866]
· 형태사항 24.5 X 214.8 | 1張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977

안내정보

1866년 조선에서 청국으로 파견되었던 연행사 일원이 청국 관원과 프랑스의 선교와 조선 침공을 주제로 나눈 문답을 기록한 문서이다.

상세정보

두 주체 간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인데, 주체가 글 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한쪽은 정사와 부사, 책봉 등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에서 청국에 파견되었던 연행사(燕行使)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른 쪽은 조선에 책봉 건으로 사절을 다녀온 적이 있으며, 현재 조선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오랑캐 업무(戎務)'가 통상아문대신 관할에 속한다는 발언을 통해서도 청국 측 관원임을 알 수 있다.
두 문답 주체의 주요 화제는 프랑스의 선교와 조선 침공에 관한 일이었다. 조선 사절은 먼저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말을 배우고 복장을 바꾸어 입은 채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사도에 물든 부류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 국왕은 올 봄에 이들을 토벌하였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군함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핍박하고 인민을 약탈한 것이 이달 초 열흘 전에 발생했다고 언급한 점을 고려하면, 병인양요가 발발했던 병인년(1866) 10월 이후에 이루어진 문답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측은 프랑스가 일으킨 소요에 대해 상황이 위태롭고 굴욕적이라고 인식했다. 조선 측의 상황을 전해들은 청국 인사는 일단 소요 자체는 고금에 없었던 일대 변란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다만 주전과 주화는 애초에 자주로 조선 국왕이 결정하는 사항이라고 하면서, 프랑스의 주된 목적은 통상과 선교(傳敎)에 있다고 발언하였다. 중국 측에서 애매하게 발언함에 따라 조선 측에서는 천조(중국)가 조선을 비호하며, 조선은 천조를 믿고 의지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책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국 인사는 조선이 사절을 파견하고 조약의 예로 화약을 체결하면 좋겠다고 했다. 아울러 청국 측에서 알고 있는 정보를 조선 국왕에게도 전하겠다고 했다. 일단 전쟁과 화친 두 가지의 결정은 청국도 방치해 둘 수 없는 사항인 만큼 신속하게 조선 국왕이 자문을 보낼 수 있도록 조처해 줄 것도 요청하였다.
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시점을 감안해 보았을 때, 이 때 조선에서 청국으로 파견했던 사절은 동지사(冬至使)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지사는 10월 말에 고종을 소견하고 청국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듬해 4월에 복명하였다. 정사(正使) 이풍익(李豊翼), 부사(副使) 이세기(李世器), 서장관(書狀官) 엄세영(嚴世永)으로 구성된 사절이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청국 측 인사와 문답한 기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인양요 발생을 두고 조선과 청국 측 인사들의 인식과 대응이 당시에 어떠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절의 문답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집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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