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관리가 청국 사신과 12일에 주고받은 문답을 등사한 문서이다. 문답을 한 주체는 두 명이 나오는데, '馬'는 마건충(馬建忠)을 가리킨다. '我'로 등장하고 있는 조선 측 관리는 아마도 김홍집(金弘集)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문답을 실시한 일시는 1882년 5월 12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건충이 남긴 기록 『東行續錄』의 5월 12일자 내용을 확인해 보면 조영하(趙寧夏), 김홍집과 만났다는 사실을 교차로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만나서 나누었을 문답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건충의 경우 소략하게 사실 관계만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 측에서 남긴 이 문답 기록이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이 문답 기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 『各國交涉文字』(奎27392)의 5월 12일 기사 「往淸船問答」과 비교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는 중강, 회령, 경흥 지역에서 조청 간에 이루어지는 개시(開市)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마건충의 발언을 통해 조선정부가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하여 청국 측에서 유지해 온 해금(海禁)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고, 청국 측에서도 이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청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서의 육로통상 문제에 대해서도 조선 측에서 제거해야 할 폐단을 이홍장(李鴻章)에게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육로와 수로 양쪽에 걸쳐 통상 문제를 청국과 논의하면서 조율을 시도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한편으로 마건충은 조선이 사용할 국기(國旗) 문제도 거론했다. 그는 청국의 용기(龍旗)를 사용하라고 한 이홍장의 지시가 있었음을 전하였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용기를 국기로 사용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조선 측에서는 국왕에게 보고한 후에 답하겠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조선 측에서 마련한 조약 초고에 거친 부분이 여러 곳에 걸쳐 있는 만큼 마건충에게 검토해 보고 수정할 사항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에 따라 통리아문에서 속히 수정한 후에 봉정하겠다는 조선 측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