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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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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는 쓰시마의 전통적인 조선통사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의 일본인 한일통역자이다. 그는 1855년(철종6/安政2)에 쓰시마의 이즈하라(嚴原)에서 태어나 어려서 조선 통사(通事)의 가문이자 친척인 나카무라 요시노스케(中村芳之助)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이때 처음 조선어 학습을 위해 부산을 방문하였다. 그의 나이 14세였다. 쓰시마 번정(藩政) 기간에는 근심통사(勤番通詞)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웠다.
그는 1872년(고종9/明治5) 10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이즈하라의 고세이지(光清寺)에 어학소(語學所)를 설치하자 그곳에서 조선어를 공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873년 이즈하라 어학소가 폐지되었고 그는 계고통사(稽古通詞)로 선발되어 10월 16일 이즈하라를 출발 22일에 부산 초량(草梁)에 도착하였다. 부산 초량에서는 공관에 있던 센칸야(僉官屋, 지금의 大谷派本願寺) 어학소에서 조선어 교육을 받았다. 초량관어학소(1873~1980)가 개설된 뒤에는 부산을 비롯한 조선 각지 사정을 외무성에 보고했다. 나카무라는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은 후 이즈하라 어학소, 부산 초량 어학소 등에서 조선어를 공부하였다.
초량관어학소(구 東本願寺, 현 大覺寺)
1875년(고종12/명치8)에 운양호사건이 일어나자 나카무라는 학생 신분으로서 통역자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인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특명부전권변리대신(特命副全權辨理大臣)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대표로 한 일행에 외무성(外務省) 고어학생(雇語學生)으로 참가하여 강화부(江華府)로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기까지 2주일 이상을 보낸 뒤 부산으로 돌아와 부산 관리청(管理廳)에서 근무하였다. 1879년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公使)를 따라 경성에 갔다가 이듬해인 1880년 원산항개항담판(元山港開港談判)을 위해 원산으로 이주하여 원산항(元山港) 일본영사관의 서기생(書記生)으로 근무하면서 1894년까지 원산에 머물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 인천으로 옮겨온 듯하다.
그 후 10여 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06년에 경성이사청(京城理事廳)에서 근무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 때 사직하고 부산으로 전임한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는 일련의 외교적 성과에 대한 공로로 1905년 특서훈육등(特敍勳六等) 팔괘장(八卦章)을 받았으며, 1910년 한일병합 때 사직했다. 이후 부산에서 체류하다가 1932년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를 만나 한국어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하고, 그 한 달 후인 8월에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31년 3월 나카무라 쇼지로는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에게 『교린수지(交隣須知)』에 관한 문의를 받았다. 그 해 여름 이 책은 마에마에게 우송되어 있었다. 시라이(2015)에 의하면, 마에마 교사쿠가 이것들을 필사하고 그 해 11월 6일에 경성제국대학에 있던 오구라 신페이에게 전달했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대학교 소장의 『교린수지(交隣須知)』 3권(貴387011)과 『조선향각서(朝鮮向覺書)』(420011)라고 한다. 이듬해인 1932년 8월, 나카무라는 마에마의 소개를 받고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게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기증했다. 이 자료가 현재 도쿄대학 오구라문고에 있는 나카무라 쇼지로 기증본이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4일에 부산의 복전별장(福田別莊)에서 나카무라는 오구라와 처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후인 12월 17일에 그는 급성 폐렴으로 복전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카무라 쇼지로의 한국어학습서 필사와 기증
도쿄대학 오구라 문고(小倉文庫)에 소장된 나카무라 쇼지로의 기증서 31종은 형태별로 볼 때, 간본 5종과 사본 26종으로 대별된다. 후자는 그가 조선어 학습 과정에서 직접 필사한 것으로서 1876년의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별로는 크게 어학, 문학 및 역사 및 기타로 나뉜다. 가장 많은 수효를 차지하는 것은 어학 관련 텍스트로서, 회화서로서는 「인어대방(隣語大方)」, 「정정 인어대방(訂正 隣語大方)」과 함께 「일선일상회화(日鮮日常會話)」(가제)가 확인된다. 문법서로서는 「한어(韓語)」와 「대의론(代疑論)」, 어휘집으로서는 「왜어류해 상(倭語類解 上)」(寫本)과 「재간 교린수지(再刊 交隣須知)」가 있다. 그 밖에도 어휘 습득을 위한 「조선어휘(朝鮮語彙)」(가제)와 「의학어휘(醫學語彙)」(가제), 문자 습득을 위한 「언문(諺文)」, 그리고 작문 연습의 기록인 「복문록(復文錄)」이 보인다. 통사로서 습득해야 할 조선사정에 대해서는 「고래고린사고(古來交隣事考)」 , 「북경로정기(北京路程記)」, 「조선책략(朝鮮策略)」, 「조선연혁론(朝鮮沿革論)」, 「조선복제법(朝鮮服制法)」, 「건국연혁(建國沿革)」 등 역사, 지리, 문화와 관련된 서적이 확인된다.
그 외에도 한글로 표기된 천주교 관련서로 「천부십계(天主十戒)」와 「성교(聖敎)」가 있고, 상급 교재로서 활용된 문학서로서는 소설류 「고금기관(今古奇觀)」, 「임경업전(林慶業傳)」, 「별숙향전(別淑香傳)」, 「최충헌전(崔忠傳)」과 함께, 설화집 「유년공부(酉年工夫)」, 가사집 「거창별곡(居昌別曲)」도 찾을 수 있다.
나카무라 쇼지로가 이 서적을 어디에서 어떻게 수집하였는지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만 필사 시기가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나카무라의 생애와 대조함으로써 그 유래를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사 시기가 확실한 것은 『복문록(復文錄)』・『언문(諺文)』・『한어(韓語)』 등 어학 3종, 『최충전(崔忠傳)』・『별숙향전(別淑香傳)』・『금고기관(今古奇觀)』・『유년공부(酉年工夫)』 등 문학 4종, 『고래교린사고(古來交隣事考)』・『조선연혁론(朝鮮沿革論)』・『건국연혁(建國沿革)』・『조선관품 및 이성으로부터의 역사(朝鮮官品並李姓ヨリノ歴史〔記〕)』 등 역사 4종, 『천주십계(天主十戒)』・『성교(聖敎)』 등 천주교 2종, 모두 13종이다.
이 서적은 1873년부터 1881년까지 특히 1873년부터 1876년까지 4년 동안 필사를 마친 것이 대부분이다.(『천주십계』・『성교』・『한어』를 제외한 10종) 이 시기는 나카무라 쇼지로가 부산의 어학소에서 계고통사, 고어통사 등 외무성의 학생으로서 조선어 공부에 힘을 쏟던 시기였다. 필사에 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즈하라 어학소에서 공부하던 시절 당시 교원이 교재로 보여준 것을 필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학소에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이래 전통적으로 학습하던 책과 함께 조선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의 연혁뿐만 아니라 천주교 등의 지식도 학습하였던 것이다. 서적은 대부분 교원들이 교과서로 보여준 것을 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카무라가 학생신분 이전이나 통역원으로 활동을 한 시기에도 조선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그때 사용한 학습서가 이 기증서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자료적 가치
나카무라 쇼지로의 기증본 중에는 「인어대방(隣語大方)」(사본)과 같이 현전본과는 상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으므로, 해당서에 관한 이본의 존재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그가 남긴 어학 관련 교재의 내용 분석을 통해, 메이지(明治) 초기 초량관어학소에서 실시했던 조선어교육 방식과 어학생들의 조선어학습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으므로, ‘일본인에 의한 조선어교육사’의 기술에 큰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한국어〉
・정병설(2005), 「18・19세기 일본인의 조선소설 공부와 조선관― 「최충전」과 「임경업전」을 중심으로―」, 『韓國文化』35,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문화연구소.
・정승혜(2008), 「소창문고 소장 나카무라 쇼지로 자료의 국어학적 고찰」, 『일본문화연구』26, 동아시아일본학회.
・정승혜(2011), 「오구라문고(小倉文庫) 所藏 韓國語 學習書에 대한 一考察―『今古奇觀』을 中心으로―」, 『어문연구』39-3,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후쿠이 레이[福井玲](2006), 「나카무라 쇼지로가 남긴 한국어 학습서에 대하여」, 『李秉根先生退任紀念國語學論叢』, 太學社.
〈일본어〉
・마츠바라 타카토시[松原孝俊], 조진경(1997), 「厳原語學所と釜山草梁語學所の沿革をめぐって―明治初期の朝鮮語敎育を中心として」, 『言語文化論究』8, 九州大學言語文化部.
・미노와 요시츠구[箕輪吉次](2010), 「『朝鮮語訳』と『[諺文語彙備忘]服部元喬筆』―底本識語と南郭識語」, 『日語日文學研究』73-1, 韓國日語日文學會.
・시라이 쥰[白井順](2015), 『前間恭作の學問と生涯―日韓協約の通訳官, 朝鮮書誌學の開拓者』, 風響社.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1934), 「釜山における日本の語學所」, 『歴史地理』63-2, 日本歴史地理學會.
・오마가리 미타로[大曲美太郞](1935), 「釜山に於ける日本の朝鮮語學所と『交隣須知』の刊行」, 『ドルメン』4-3(通卷36号), 岡書院.
・오마가리 미타로[大曲美太郞](1936), 「釜山港日本居留地に於ける朝鮮語敎育」, 『青丘學叢』24, 青丘學會.
・후쿠이 레이[福井玲](2012), 「中村庄次郞筆寫本『酉年工夫』の語學的特徴」, 『韓國朝鮮文化研究』11, 東京大學大學院人文社會系研究科韓國朝鮮文化研究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