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수집가
홈 > 해외소장기관 > 개인수집가

애스턴(W.G. Aston, 1841-1911)

가+ 가-

1. 서론
애스턴은 아일랜드 출생의 영국외교관으로 1864년 이후 주일영국공사관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애스턴은 일본어에 정통하여 『일본서기(日本書記)』를 처음으로 영역하였으며, 일본어문법 등을 영어로 저술하였고, 1879년에는 「일본어와 조선어의 비교연구」라는 저술하기도 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애스턴은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쳐 조선주재 영국총영사를 역임하였다. 애스턴이 조선주재 영국영사로서 활동하였던 시기는 청국과 일본 등이 개입하였던 갑신정변(1884.12), 그리고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4)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간에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영국의 조선주재 일선 외교관으로 그가 수집하였던 조선에 관한 국내외의 동향 및 정보는 당시로서는 조선에 관한 가장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정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스턴은 조선에 부임하기 이전 일본에서 활약하던 시기에도 당시 조선의 근대화정책을 수립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들과 일찍부터(朝英條約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던 1883년 이전)부터 폭넓게 교류를 가졌던 인물이었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면서 그가 수집하였던 자료는 다방면에 걸치는 방대한 것이었다. 애스턴이 한국과 일본에서 수집한 고서들은 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경매에 부쳐졌으며, 당시 러시아의 영사관에서 이를 구매하여 소장하다가 10월 혁명 이후 극동위원회에서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2.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상트-페테르스부르그지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상트-페테르스부르그지부(이하 러시아 동방학연구소로 지칭)는 제정 러시아 시대 이래 동방학 연구의 중심지로서, 방대한 양의 한국학 및 동방학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1818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아시아박물관으로 출발한 러시아 동방학연구소는 1720년대 이후 수집된 각종 문헌과 자료 약 100만여 권의 장서와 10만여 종의 고문헌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에서 최대이며 세계적으로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한국본 고도서가 1400여 권 포함되어 있으며, 한국에 없는 희귀한 자료도 다수 남아 있다.
동방학 연구소 소장 문헌들 가운데 韓國本 古圖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네 경로를 통해 수집한 것들이다.
첫째, 제정 러시아 외무성 아시아局에서 수집하여, 1864년 이후에 아시아박물관에 수장된 것들이다.
둘째, 주 중국 상해 러시아 영사였던 파벨 아드레이비치 드미트리예프스키가 수집한 것으로, 1907년에 아시아박물관에서 구입한 것이다.
셋째, 주한 초대 영국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 1841.4.9-1911.11.22)이 수집하였던 것으로, 이른바 ‘애스턴장서(阿須頓藏書)’로 불린다. 애스턴이 수집한 장서를 구소련의 극동위원회가 인수하여 아시아박물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넷째, 개별적으로 수집되어 개인이나 기관에서 소장하였던 것들이다.
3. 주요자료
앞으로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일차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를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소설 관련 자료
고전소설은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가가 밝혀져 있지 않으며, 유통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윤색, 개작되어 수많은 이본을 파생하였다. 따라서 고전소설 연구에서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특정 작품의 이본(異本)을 비교 검토하는 것과 이본간의 계열을 확정하고 선본(善本)을 선정하는 것이다. 동방학연구소 소장 한국문헌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는 한국 소설 관련 자료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자료는 크게 보아 『화정선행록(和靜善行錄)』(15권 15책, 770장), 『하진양문록(河陳兩門錄)』(25권 25책, 801장), 『쌍천기봉(雙釧奇逢)』(22권 22책, 1231장), 『보은기우록(報恩記偶錄)』(18권 18책, 566장) 등의 장편가문소설, 『숙영낭자전』, 『쇼대성전』, 『됴웅전』,『심쳥전』 등의 방각본 소설, 『최충전』, 『수사유문(隋史遺聞)』 등의 소설류로 나누어진다. 양적으로 풍부하여 한국고전소설 연구에 있어 異本으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에는 선본(善本)이 상당수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화정선행록』, 『하진양문록』, 『쌍천기봉』, 『보은기우록』 등의 장편가문소설은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되거나 본격적으로 이본 대비 등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들 자료들은 모두 애스턴 소장본으로 분류되어 있는 바, 애스턴이 서울에 머물러 있을 때 낙선재본 장편 소설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진양문록』은 비교적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다. 현재 확인된 이본으로 동방학연구소 소장본을 제외하고, 25책의 낙선재본, 29책의 일본 동양문고본 등의 필사본이 있으며, 1925년 동양대학당에서 간행한 30책의 활자본과 1954년 공동문화사에 간행한 31회의 활자본이 있다. 이 가운데 필사본 3종은 모두 무신년(1848년 혹은 1908년)에 필사되었으며, 이 가운데 낙선재본과 동방학연구소 소장본은 필사지와 필사 시기 및 책수가 동일하다. 글씨체는 물론이고 ‘세재무신뇽호필셔’라는 필사기가 8권의 끝에 있는 것도 일치한다. 또한 25권으로 분권된 것도 같으며, 분권된 위치나 분량도 거의 일치하므로, 이 두 이본은 같은 모본을 가지고 필사된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그런데 낙선재본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1권과 16권이 다른 형태를 가진다. 낙선재본의 1권과 16권은 활자본과 일치하는 바, 이는 활자본을 보고 다시 베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낙선재본 16권은 다른 권과 글씨체가 다르며 중간 부분에 ‘22회’라는 회장(回章)과 회장(回章)의 제목(題目)이 갑자기 나타나 연구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동방학연구소 소장본과 대조한 결과 국내 소장된 낙선재본은 본래 1권과 16권이 결권(缺卷)으로 있다가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활자본을 보고 보충해 넣은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들 장편가문소설 자료들에는 그것을 필사한 시기를 추정케 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진양문록』에는 “셰재무신 칠월초사일 뇽호필서”이라는 필사기가 적혀 있으며, 『쌍천기봉』에는 권3의 첫째 장에 “승장병오십팔쟝”이라고 쓰여 있으며, 둘째 장에 “甲申正月日雙釧奇逢” 및 “甲申正月十二日雙釧奇逢”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보은기우록』의 경우 14책 마지막 장에 후대인의 글씨로 “을유졍월쵸오일모동셔”로 적혀 있다. 앞으로 장편가문소설의 필사 시기를 추정하고 소설의 유통과 향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익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방각본 계열 국문소설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어 고전소설 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보은기우록』은 1책과 2책의 경우 책을 뒤집은 면에 낙서가 되어 있고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책주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젹혀 있다. 그 중에서는 외설스러운 내용을 담은 그림이나 글도 보이며,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지은 한시 등도 적혀 있다. 이들은 당시 장편소설이 유통되던 분위기의 일단을 제공해 준다.
(2) 어학 관련 자료
동방학연구소에는 사서삼경의 언해류를 비롯하여 『훈몽자회』, 『천자문』, 『유합』 등의 한字 교재, 『삼운성휘』, 『전운옥편』 등의 운서와 자서가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언간독』, 『간독정요』 등의 편지 교본과 『중간노걸대』, 『화음계몽』, 『화어유초』 등 중국어 학습 교재가 있는데, 그 중에 『역가필비』는 사역원의 역학서로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이다.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된 어학 관련 자료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문헌으로는 『교린수지(交隣須知)』, 『표민대화(漂民對話)』, 『한어훈몽(韓語訓蒙)』, 『일한선린통어(日韓善隣通語)』 등은 애스턴의 수장본으로 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원래 애스턴이 일본에서 수집하였던 것으로, 후에 구소련의 극동위원회에서 구입하여 현재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되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애스턴이 이 자료를 수집하였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같은 시기에 영국인 Ernest M. Satow가 일본의 묘대천(苗代川)을 방문한 일이 있으며, 그가 수집한 것이 애스턴에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애스턴은 1884년 4월 26일 영궁의 주한 총영사로 부임하여 1886년 10월 22일까지 2년 동안 서울에 체류하였다.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 썼던 「일본어와 조선어의 비교연구(A Comparative study of the Japanese and Korean, 1879)」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비교한 최초의 논문으로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은 그가 주중국의 영국 공사관에 근무할 때 그의 동료인 메이어(W. F. Mayer)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교린수지』, 『표민대화』, 『한어훈몽』, 『강화』 등은 일본 대마도 역관과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되어 살마번(薩摩蕃)의 묘대천에 정착한 조선 도공들의 후예가 모국어를 학습하기 위해 만든 교재이다. 1920년대 일본 경도대학 언어학과의 신촌출(新村出) 교수에 의해 수집되어 경도대학 문학부 열람실에 소장되었던 것과 같은 계통이며, 일본 녹아도(鹿兒島) 심수관씨가(沈壽官氏家)에도 이와 유사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동방학연구소에는 러시아의 한국 진출과 함께 한국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수집한 책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역가필비(譯家必備)』, 『한어입문(韓語入門)』, 『왜한의담(倭韓醫談)』, 『한어훈몽(韓語訓蒙)』 등의 어학서들이 주목된다.
(3) 역사 관련 자료
동방학연구소 소장 고서 중 한국 역사 관련 고도서들은 대체로 러시아가 1860년 중국과 북경조약체결을 계기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한 이래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러시아 정부가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하였던 것들이었다. 1956년 동방학 연구소에서 자체 조서 간행하였던 목록 상에서도 역사관련 목록은 100종을 훨씬 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번 현지조사에서 일차적으로 목록자료를 검토하였고, 목록 작성시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자료들은 현대 동방학 연구소 소장 자료 도서카드를 조사하여 보완하였다.
동방학연구소 소장 고도서의 수집 경로를 조사한 결과 러시아 정부는 조선과 국교를 체결(1884년)하기 이전 시기부터 조선관련 수집 자료를 꾸준히 수집 정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이번 조사가 구한말 이전 고도서를 1차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고도서 이외에 러시아인이 쓴 조선 관련 2차 연구문헌도 추가로 조사 대상에 포함시켜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최초의 조선관련 연구문헌은 동방학연구소 소재재인 뻬제르부르그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1884년) 이전부터 간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방학연구소 소장 고도서의 수집 경로를 조사한 결과 러시아 정부는 조선과 국교를 체결(1884년)하기 이전 시기부터 조선관련 수집 자료를 꾸준히 수집 정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이번 조사가 구한말 이전 고도서를 1차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고도서 이외에 러시아인이 쓴 조선 관련 2차 연구문헌도 추가로 조사 대상에 포함시켜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최초의 조선관련 연구문헌은 동방학연구소 소재재인 뻬제르부르그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1884년) 이전부터 간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본 고도서 가운데는 조선에서 간행되었던 자료 이외에 명치유신 이전 일본에서 간행되었던 조선관련 자료들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어로 간행된 이들 자료들은 한국역사, 지리 등 일반적인 내용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관련자료 및 고대 이래 한일관계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저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자료 가운데는 임진왜란 중 일본인 조선에서 약탈해 갔던 자료들 중 일부가, 명치유신 이후 동경 주재 러시아를 비롯한 영미 외교관들의 손에 들어갔고 이것들을 러시아정부가 다시 수집하였던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 자료 가운데는 추후 일본내 서지문헌을 조사 검토를 통하여 유일본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나 일본 국내에서도 희귀본일 가능성이 높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역사 관련 문헌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소위 ‘아수돈장서(阿須頓藏書)’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고서류 가운데는 1403년 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활자 출판본 『삼국사기』를 들 수 있다. 현재 동방학 연구소 소장 『삼국사기』는 전체 8권 중 4,7,8권이 활자본이며, 1,2,3,5권은 필사본, 6권은 목판본이었다. 동방학 연구소 소장 『삼국사기』 4,7,8권은 활자본 『삼국사기』로서는 최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애스턴 장서 가운데는 개항기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세력(예를 들면 일본과 미국 프랑스 등)들이 수집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신문 형태로 부산에서 일본인이 간행하였던 『조선신보』를 예로 들 수 있다. 『조선신보』는 1881년 10월 부산 주재 일본인들이 간행하였던 것으로 현재까지 일본에서 명치시대 일본정기 간행물의 최대 소장처로 알려진 동경대학 명치신문문고에 5호부터 12호까지가 소장되어 있다.
이번 현지조사 결과 일본에서조차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2호(1882.2.5), 3호(1882.2.15), 4호(1882.2.25) 가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신보』는 구한말 1881년 12월 20일 당시 일본국 통상단체인 부산항상법회의소에서 창간된 신문으로, 순간(旬刊)으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간한 일본신문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간주되는 한성순보보다 1년 10개월 앞서 발간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신문이기도 하다. 이 신문의 지면체제는 제 1호(창간호)만이 1 枚擢(1枚印刷)일 뿐, 제 2호부터는 조선용지를 사용한 半紙刊의 綴本으로 4號活字 一段制이며, 세로 17.8cm, 가로 12.6cm의 책자형 비슷한 신문으로 매호 10장, 18면을 갖추고 있다. 기사문은 대체로 純漢文記事와 混漢日文記事로 혼용되고 있으나, 제 7호에는 혼한일문기사를 한글로 번역한 한 건의 기사가 유일하게 게재되어 있다.
한편 내용면에서 보면 표지 이면에는 매호마다 例言(창간취지)과 목차를 게재하고 있는데, 창간 취지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조선신보』로 경제론설을 게재하며, 이로서 일본과 조선 양국 사람들이 널리 읽도록 하며 내외에서 일어난 기사이문 즉 새로운 소식을 알림으로써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을 모두 게재하니 사방제군자들이 이 취지를 널리 양해해 달라는 것과 高論新說을 기고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신보』는 단순히 재부산 일본거류민만을 독자 대상으로 하여 발간된 것이기 보다는 일본거류민뿐 아니라 조선국 사람들까지도 독자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조선신보』의 목차는 영사관록사(領事館錄事), 조선신보 잡보(雜報), 부산상황, 원산통신, 奇書, 물가표 등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수출입물가표와 광고도 게재하고 있다. 광고는 본국 광고(본지광고료 및 본지정가)와 상품 광고로 분류되어진다. 여기에서 영사관록사는 제 7호까지 게재되고 있는데, 영사관록사란 일본인 거류지에 있어서 일본 영사의 관할권인 행정권과 사무권에 관련된 사항으로 여기에는 주로 일본인거류지 내에 있어서 일본거류민들의 범법에 대한 죄목을 규정한 위경죄목이 게재되어 있다.
「잡보」란은 여러 가지 기사이문(奇事異聞)을 총망라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단편적인 개화당 동정소식, 한국인들의 풍속, 거류민동정, 행정개편소식, 화폐제도개혁 등 당시 한말에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잡다한 소식들을 게재하고 있다. 또한 「한전매일상장(韓錢每日相場)」란은 외환시세에 대한 보도이며, 「기서(奇書)」는 일본민간인들에 대한 두고 내지 기고형식을 빌어 한말정부에 대하여 국제적 여건하에서 일본과의 수교 및 개화의 필연성, 그리고 개화에 따른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고 전파하려는 일종의 계몽적인 소론 내지 요망사항 등을 게재하고 있다.
잡보 말단에는 전날의 일기를 보도하고 있다. ‘부산상황’과 ‘원산통신’은 당시 개항지역에 대한 경제사정 즉 무역의 경기, 상황의 성패, 금융사정 등의 이른바 경제 기사라고 할 수 있으며, 매호의 말미에 보도하고 있는 수출입물품 및 그 물가표는 당시의 한일의 무역사정을 고찰하는데 유익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또한 「한전매일상장(韓錢每日相場)」란은 외환시세에 대한 보도이며, 「기서(奇書)」는 일본민간인들에 대한 두고 내지 기고형식을 빌어 한말정부에 대하여 국제적 여건하에서 일본과의 수교 및 개화의 필연성, 그리고 개화에 따른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고 전파하려는 일종의 계몽적인 소론 내지 요망사항 등을 게재하고 있다.
끝으로 광고란은 이미 앞에서 살표본 바와 같이 본국광고와 일반상품광고로 나눌 수 있는데, 본국광고는 이 신문의 광고료와 신문 정가에 대한 내용이며, 제 9호부터는 「천금단(千金丹)」이라는 약판매 광고가 처음으로 게재되고 있다.
『조선신보』는 상인들의 집회소인 재부산항상법회의소에서 발행하는 것이기에 당시의 경제적인 정보를 비롯하여, 열강의 동향과 그밖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다룰 잡보도 아울러 다루었다. 『조선신보』의 기록은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특히 당시 한일관계 양국인의 인식 및 양국관계 연구의 일차적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관련 고서 가운데는 조선에서 간행되었던 자료 이외에 명치유신 이전 일본에서 간행되었던 조선관련 자료들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日本語로 간행된 이들 자료들은 한국역사, 지리 등 일반적인 내용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관련자료 및 고대 이래 한일관계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저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키자토 리토(秋里蘺島)가 1635년에 저술한 『회본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경도서림, 1800년 간행) 10 책과 이사리네 히코이치로(鶴峰彦一郞)이 1853년에 간행하였던 『회본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등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는 저작이다.
또한 명치유신 이후 명치 정부의 외교관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일본정부 내의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하였던 인물이었던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1832.12.10.-1907.10.4.)의 『조선문견록(朝鮮聞見錄)』上下卷 (1875,3) 또한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자료이다. 『조선문견록』은 사다 하쿠보가 1869년 12월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고 부산에 도착한 이래, 1870년 3월 귀국할 때까지 부산에서 겪고 들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명치유신 이후 조선을 공식 방문하였던 사절의 기록이며, 현지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간행되었던 최초의 저술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문견록』은 사다 하쿠보가 1869년 12월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고 부산에 도착한 이래, 1870년 3월 귀국할 때까지 부산에서 겪고 들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명치유신 이후 조선을 공식 방문하였던 사절의 기록이며, 현지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간행되었던 최초의 저술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문견록』은 사다 하쿠보가 1869년 12월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고 부산에 도착한 이래, 1870년 3월 귀국할 때까지 부산에서 겪고 들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명치유신 이후 조선을 공식 방문하였던 사절의 기록이며, 현지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간행되었던 최초의 저술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문견록』의 상권은 교제(交際), 관(冠), 홈(婚), 상(喪), 제(祭), 잡지(雜識)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권은 조선약도, 무비(武備), 형벌(刑罰), 산천(山川), 호적(戶籍), 관제(官制)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의 첫 장인 교제편은 조선 정부와의 외교 교섭 과정을 기술한 역사적 자료의 성격을 갖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조선문견록』은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조선에 대한 상황 인식 및 조선 정책의 큰 틀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방학 연구소 소장 자료 중 개항기 자료로서는 당시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의 서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을 위한 한국어 교습서 등이 그런 종류의 자료라고 할 것이다. 그 외 동방학 연구소 소장 필사본중에는 다양한 내용의 텍스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역사적 성격을 띠는 행정 편람으로 『명의록(明義錄)』의 번역본(1777년 한문본)과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