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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정조와 ‘공거문’ 모음집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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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못하는 것을 귀머거리, 보지 못하는 것을 소경이라 하는데, 이것은 천벌[天刑]이지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면 귀머거리나 소경과 뭐가 다르겠는가?……옛날에 아주 큰 귀머거리와 소경이 있었으니 걸(桀)과 주(紂)란 자이다.(이익, 『성호사설』 권10, 인사문 간직(諫職))
위 내용은『성호사설』에 나온다. 조선후기 실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이익(1681∼1763)이 사간원을 폐지하고 관원들에게 겸직시키자고 주장하면서 한 말이다. 걸・주는 동양에서 가장 폭군으로 꼽히는 왕이다. 군주로서 간언을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못들은 체하다가는 나라를 망친 걸이나 주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조선의 국왕들은 공의를 거론하면서 언로를 틔우라고 주장하는 신료들 앞에서 늘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왕세손으로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正祖)는 이전 국왕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오히려 정조는 왜 지금은 고요할 정도로 간언하는 신하들이 없느냐고 타박하면서, 역대 중국왕조와 조선의 명신(名臣)들이 남긴 간언(諫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그런가하면 영조 시대의 상소문들을 모아 책자로 묶어 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본인의 재위 시절에 올라온 상소문들도 빠짐없이 모아 두었다. 그렇다면 왜 정조는 집요하리만큼 상소문 수집에 관심을 쏟았을까?
1천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공거문’ 모음집
공거문(公車文). 이 생소한 단어는 상소문을 뜻한다. 중국 한(漢) 나라에 공거부(公車府)라는 관청이 있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접수하고, 임금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일을 맡았다. 공거문은 바로 이 공거부라는 관청이 담당한 업무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에서 ‘공거’ 또는 ‘공거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실록』에 한나라 때에 조심성 없는 태자를 탄핵한 공거령(公車令)의 사례가 처음 등장한다.(1431년 12월 5일) 그 후『성종실록』에 대사간 등의 차자에 “공거에 글을 올리고”라는 말이 나온다.(1488년 4월 12일) 이때부터 공거는 상소를 접수하는 승정원 또는 상소문의 의미로 드문드문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17세기 후반 이후이며, 숙종 연간에 ‘공거문’이라는 말도 등장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공거 또는 공거문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상소’나 ‘상서’, ‘차자(箚子)’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용어를 더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오늘날 ‘공거’라는 단어가 서명에 들어있는 자료집들이 방대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공거문』, 『공거록(公車錄)』, 『공거문총(公車文叢)』, 『공거회문(公車會文)』, 『공거유선(公車類選)』, 『공거유집(公車類集)』, 『공거유휘(公車類彙)』, 『공거유람(公車類覽)』, 『공거휘편(公車彙編)』 등의 서명을 띤 자료집들이 많은 분량으로 전한다.

1989년 최승희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공거문’ 유형의 자료는 국내에만 총 67종 924책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28종 543책, 국립중앙도서관에 11종 146책, 연세대 도서관에 8종 10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4종 40책이 있다.

공거문 자료들은 해외에도 있다. 최근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해외에 11종 55책이 있다. 일본 교토대학교 도서관에 5종 36책, 일본 동양문고에 2종 7책, 대만 국가도서관에 1종 1책,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1종 6책이 있다. 오사카부립 도서관에도 2종 3책이 있다. 따라서 현재 국내외에 현전하는 공거문 유형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78종 979책이나 된다. 거의 1천 여 책에 달하는 셈이다.

이 자료집들에 수록된 글들은 대체적으로 영조 이후부터 1883년(고종 20)까지의 상소, 상서, 차자 등이다. 편집은 연월일 순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론 관서별·주제별·인물별 등으로 분류한 다음 그 안에서 다시 시기 순으로 편집한 책들도 적지 않다.
국왕 정조가 모으기 시작한 상소문들
그렇다면 이렇게 방대한 상소문 모음집들은 언제부터 편찬되기 시작했을까? 조선시대에 상소문들을 모아 책자로 엮기 시작한 사람은 놀랍게도 국왕 정조였다. 대표적인 결과물이『장차휘편(章箚彙編)』과 『공거문총(公車文叢)』이다. 정조는 이 두 종류의 자료집들에 직접 서문을 지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장차휘편』은 1788년(정조 12) 『승정원일기』에서 영조 재위 53년 동안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들을 뽑아 편집한 것이다. 상소문 내용 중 중요한 말은 자세히 쓰고 지엽적인 말은 삭제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였다. 이 책의 분량에 대해서는 『홍재전서』 「군서표기(羣書標記)」에는 60권이라 하였다. 그런데 『홍재전서』 「일득록(日得錄)」에는 정조가 “모두 128책이나 된다.”고 직접 밝혔다. 참고로 오늘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장차휘편』 83책이 남아 있다.

『공거문총』은 정조가 재위 기간 동안 올라온 상소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정조는 “『장차휘편』을 편찬하고 나서 다시 내가 즉위 한 이후에 신하들이 올린 차자와 상소를 연도별로 모아 기록했다. 올린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요약하지 않고 전문을 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1776년 즉위한 해부터 1800년까지 총 93권이라 하였다.(『홍재전서』「군서표기」)

그런데 「일득록」에는 2백 여 책이라 하여 『장차휘편』과 마찬가지로 분량이 다르다. 조선시대에 권(卷)과 책(冊)의 개념은 다르다. 그러므로 60권 128책(『장차휘편』)과 93권 200책(『공거문총』)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권 수가 책 수에 비해 현저하게 적어 이 문제는 향후 자료조사와 연구가 더 필요하다.
국왕 정조가 상소문들을 모은 이유는?
원(園 ; 사도세자 묘)을 열자, 임금이 옹가(甕家)로 나아가 사초를 부여잡고 어루만지면서 지나치게 울부짖고 가슴을 쳤다. 이에 약원(藥院)의 제조와 각신·승지 및 여러 대신들이 번갈아 곡을 멈추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이미 시각이 많이 흘렀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다시 심해져 곡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다 구토 증세까지 있었다.(『정조실록』 1789년 8월 12일)
위의 내용은 1789년(정조 13) 8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영우원]를 이장하기 위해 영우원을 여는 의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이다.

같은 해 8월 20일에 다시 영우원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신하들이 가마 앞에서 거둥을 만류하자 “잠시나마 슬픈 마음을 쏟아내고 싶으니 경들은 물러가라."고 하면서 강행하였다. 계속 신하들이 만류하자 "경들에게 시달리다보니 답답한 증세가 다시 치밀어 오르려고 한다."면서 기어코 옹가에 들어가 곡을 하며 슬픔을 터트렸다. 결국 “정신이 점점 더 혼미해지고 또 구역질을 하려는 증세”를 보이고서야 곡을 멈추었다.

정조가 영조 시대의 상소문들을 모아 책자로 만든 해가 1788년이다. 그리고 이 이듬해에 영우원을 이장하였다. 필자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결정에 반드시 원인이나 배경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장차휘편』을 만든 이듬해에 영우원 이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뭔가가 느껴진다.

그래서 『장차휘편』을 엮은 1788년을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정조는 1788년 1월에 외척의 위협 속에서 왕의 호위부대로 출범시킨 장용위(1785년 창설)를 정식 군영인 장용영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789년 7월에 숙원사업 하나를 시행하였다. 당쟁의 와중에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묘를 경기 양주에서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한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정조가 아버지 묘를 화산으로 옮기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묘를 옮기기로 결정한 화산에는 이미 수원의 읍치가 자리하고 있어서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그래서 정조는 기존 읍치에서 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읍치를 옮기고, 여기에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주민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민폐를 없게 하고 신도시 발전 방안도 모색하였다.

정조의 특별 배려로 신도시에 인구가 늘고 도시의 면모도 갖추어지자 1793년 1월에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쳤다. 행정책임자도 종2품인 유수(留守)로 승격시켰다. 신도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정조는 1794년 2월 28일부터 도시를 감싸는 성곽을 구축했다. 이 성곽이 바로 오늘날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이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장차휘편』의 편찬은 장용영 승격 및 현륭원 조성 그리고 화성 조성과 맞물려 있다. 마치 정조가 해낸 이 모든 일들이 『장차휘편』의 편찬에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장차휘편』은 단순히 선왕 영조 대에 올라온 상소문들을 편집한 책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정조는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영조시대를 되짚어보기 위해 『장차휘편』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정조는 『장차휘편』의 서문을 이렇게 끝맺었다. “앞으로 억만년 이후에라도 내가 지금 눈물을 삼키면서 이 책을 엮어 우리 후손들에게 보이려고 한 이 슬픈 심정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나의 이 말 못할 너무나 원통한 처지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홍재전서』 「군서표기」)
정조의 반격 : 공론은 신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왕조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왕권이 강력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조는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어떤 양반도 개인적으로 국왕의 권력을 능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양반 관료들이 뭉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형성하면서 국왕을 견제하고 감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료들이 국왕의 독단을 견제하기 위해 강조한 정치적인 장치가 공론 또는 공의(公議)였다. 그런데 공론은 뒤집어보면 개인 또는 개인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은연중에 대변하였다. 정조는 공론의 이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누가 말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이익을 위해 말을 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였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직언하는 신하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불만을 자주 표출하였다. 정조는 『장차휘편』을 엮기 전인 1780년(정조 4)에 『명신주의요략(名臣奏議要略)』 16권을 편찬하였다. 정조는 자주 바른 말을 구한다는 교서를 내렸지만 말하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하였다. “오늘날 임금의 덕이나 조정의 정사가 참으로 말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말할 것은 있지만 꺼려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꺼리는 이유를 내가 듣기 싫어할 것이라 생각해서일까?”라고 하면서, 솔직한 간언을 해주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이 책을 편찬한다고 밝혔다.

또 정조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추시(秋試)에서 대책(對策)의 문제로 ‘언로(言路)’를 냈다. “어쩌다 근래에는 이 길이 협소해져서 벙어리 노릇이 풍속처럼 되고, 침묵으로 능사를 삼으며, 모두가 입을 꾹 다물어 말 한마디 없이 적적하게 되었는가?”하고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언로가 뻥 뚫린 듯이 관통하여 해맑은 태평 세대에 오를 수 있게 하겠느냐?”고 그 대책을 물었다.(『홍재전서』 권48)

이처럼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집요하리만큼 언론 문제를 파고들었다. 『장차휘편』은 정론과 공론을 늘 거론하는 신하들을 향해 같은 방식으로 언론 문제를 거론하면서 펼친 역공과도 같다. 정조는 공론을 앞세워 여론몰이를 하는 관료들을 향해 시위하듯이 수많은 상소문들을 모아 증거로 들이댄 것이었다. 1796년(정조 20) 이조판서 심환지가 사직 상소를 올리자, 혐의에 연연해 관직에서 물러나 침묵하면 되겠느냐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수백 편에 달하는 『장차휘편』과 『공거문총』을 경도 한 번 살펴보도록 하라. 수십 년 동안에 그 주장의 경중과 긴요한 정도는 따지지 않더라도 권력가의 정수리에 손 댈 생각을 한 자가 어디에 있는가? 이른바 수백여 책에 적힌 깨알 같은 글자들은 견강부회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정조실록』)
수많은 상소문들이 “견강부회하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정조의 지적은 상소문들을 모아 자료집으로 엮은 정조의 진짜 속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조시대에 공론과 정론은 더 이상 국왕을 압박하는 신료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정조가 거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공거문 모음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조가 시작한 공거문 모음집 편찬은 순조 대 이후로 확산 일로를 걸었다. 군신 모두 성찰하고 경계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편집한 공거문들은 순조 대 이후 다양한 목적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979책에 달하는 거질로 남게 되었다.

필자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자들을 모두 조정에서 편찬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정조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은 후대 국왕들이 계속 편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반들도 여기에 가세해 공거문 모음집들을 베끼고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편집하면서 다양한 공거문 모음집들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질은 아니지만 소소한 분량의 공거문 모음집들도 출현하게 되었다. 예컨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가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 중에 『공거문초(公車文抄)』(1책 72장, 필사본)가 그 사례다. 1842년(헌종 8)에 엮은 이 책은 32건의 상소문이 들어 있는데 누가 엮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상소문들을 모아 편집한 모음집들이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필사자도 여기에 힘입어 관심 있는 상소문들을 뽑아 필사했다고 보인다.
『공거문초(公車文抄)』(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현재 전하는 ‘공거문’ 유형의 자료집에 들어있는 각종 상소문들은 거의 전문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는 상소문들은 전문이 아닐뿐더러 축약이 심하며, 실리지 않은 상소문들도 많다. 그래서 ‘공거문’ 유형의 모음집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공거문 모음집은 학계나 일반인의 주목받지 못했다. 전문이 실려 있긴 하나, 연대기사료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상소문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분량은 많지만 귀한 자료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 하나의 텍스트로 접근해보면 18세기 후반 이후부터 19세기 전반까지 1천 여 책에 가까운 공거문 모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꽤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래서 왜 이렇게 공거문 모음집들이 방대한 양으로 남게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그리고 공거문 모음집들의 행간을 읽어내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헤쳐본다면 조선후기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서사(敍事)’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정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