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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의 조선어 교육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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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관어학소와 「복문록(復文錄)」
도쿄대학(東京大學) 언어학연구실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는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가 쓴 「復文錄」 2책이 전한다. 이 책은 당시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의 교육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량관어학소는 1873년 10월부터 1880년 4월까지 일본의 외무성에서 조선어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메이지 유신 후 번(藩)이 폐지되고 현(縣)이 설치됨에 따라 대외 관계를 직접 관할하게 된 외무성은 쓰시마 번의 조선어 교육 체제와 인재를 인수하는 형태로 1872년(고종 9) 10월 25일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외무성 이즈하라한어학소를 설치하였다. 이즈하라한어학소는 이듬해인 1873년(고종 10)에 당시 일본 공관이 있던 부산 초량관으로 이전되었고, 이에 외무성 초량관어학소가 개소하였다.

초량관어학소의 조선어 교육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작문 교육에 복문(復文)을 도입한 점이다. 어학소의 복문 교육은 주로 조선 어원문에 대한 일본어역문이 제시되면, 그것에 대응하는 조선어로 복원하는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초량관어학소의 어학생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가 작성한 「복문록」에 수록된 148개조의 기사는 모두 복문 과제와 그 결과의 기록물로서, 본서를 통해 어학소에서 실시한 시험 및 평가 방식은 물론 오답에 대한 첨삭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다. 감좌(監佐)는 복문의 결과를 원문과 대조하여 일차적으로 수정하였고, 이를 다시 교수에게 보내어 이차에 걸친 교정을 실시하였다. 첨삭 결과는 어학생에게 돌려졌으므로, 피드백(feedback)에 의한 첨삭 교육이 19세기말에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복문록」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선어교육에 있어서 시험과 평가, 첨삭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서 인정된다. 「복문록」을 통해 초량관어학소의 조선어 교육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복문 교육
「복문록」은 조선어에 대한 일본어번역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서에 수록된 일본어문장은 원문(原文)에 대한 역문(譯文)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고, 조선어문장은 역문을 조선어로 재번역(=복원)한 문장, 즉 복문(復文)을 가리킨다. 이 관계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준비 실시
담당자 교수 학생
내용 원문(原文) 역문(譯文) 복문(復文) 번역문
기술언어 ① 조선어 ② 일본어 ③ 조선어 ④ 일본어

<표 1> 복문 교육의 개요

복문 교육은 크게 준비 단계와 실시 단계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교수에 의한 준비 단계는 29엽과 30엽 사이에 삽입된 괘선(罫線) 용지 1매를 통해 그 대략을 추정할 수 있다.
<도판 1> 복문(復文) 과제의 원안과 탈초문
<도판 1>은 복문 과제의 원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서 본문의 글자체와는 판연히 다르며, ‘十九日 教授’라는 서명(署名)이 있음을 통해 볼 때 이는 초량관어학소의 교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판 1>의 오른쪽 면을 통해 복문 교육의 실시 과정을 추정해 보면, 우선 교수는 하루에 학습할 만한 분량으로 약 80자 정도의 원문을 추출한 뒤 이를 번역한 역문을 준비한다. 그다음 별도의 용지에 문제를 기입해서 어학생에게 배부하면, 어학생들은 일본어역문을 보고, 조선어로 복원하는 연습을 시행했을 것이다.

한편 <도판 1>의 왼쪽 면에는 조선어원문과 일본어역문이 동시에 쓰여 있으므로, 이상과는 다른 방식, 즉 교사가 역문을 읽는 사복문(射覆文)의 방식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복문은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영어학습법에도 채용되어, 실제로 Standard Choice Readers(1904) 제3권에는 매과마다 복문 연습이 있어서, 교사의 일본어 번역을 듣고, 학생이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조선어교육에도 사복문이 채용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복문록」을 통해 교수의 준비 단계로서 원문(① 조선어)과 역문(② 일본어), 실시 결과로서 어학생이 작성한 복문(③ 조선어)과 번역문(④ 일본어)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바, 복문 교육의 실시는 역문을 보거나 혹은 음성으로 실현된 역문을 듣고 이를 다시 원어로 복원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도판 1>에 대한 나카무라의 복문 결과도 실려 있어 원문, 역문, 복문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면서 실제로 복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도판 2> 나카무라의 복문 결과
나카무라의 복문 ―― 川口ニ マイリ テ 其ママヱズ ―ニ サマヨウテ ――ナル

今日 洛江의 가고 逢變여 그저 還家도 못고 山谷의 바자니다가 奇異

仙人ニ アイ 路ノホトリ 座シテ ダンダン トウ 言ノ中ニ 孫吳ノ 妙策ト 諸葛亮ノ 言ヲ

신션을 만나 길거리의 안자  믓 말 듕의 손오의 묘착과 져갈량 말을

云ニヨリ ソ\ノ 微笑シテ曰 汝モ 将師ノ後裔 ト云ウタ

니 그 神仙이 미쇼 왈 네도 쟝슈의 후예라 엿다

<도판 1>의 탈초문과 위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원문과 복문 결과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을 들면, 밑줄 친 부분과 같이, 2인칭 대명사 ‘너도→네’ 연결어미 ‘逢變야→逢變여’ 선어말어미 ‘얏다→엿다’의 세 군데이다. 원문과 복문에 쓰인 조사와 어미 표현은 당시 모두 교체 가능한 형태로서 어느 쪽을 써도 문맥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결국 위의 복문 결과는 <도판 1>의 원문과 거의 흡사한 내용으로 복원되어 있으므로, 이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때 <도판 1>의 일본어역문과는 다른 제2의 일본어 번역이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카무라의 복문 과정에서 부기(附記)된 일본어는 복문 결과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최종적으로 또 한번의 번역 연습을 시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카무라 복문의 일본어는 <표 1>의 ④, 즉 복문 교육의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시험과 평가
초량관어학소의 복문(復文) 교육은 편문(編文: 작문) 시간에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과(學課)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수업을 받고, 또 매달 10이 붙는 날인 10, 20, 30일에는 10시부터 12시까지 독장(督長)의 참관 하에 편문(編文) 시험을 치렀다. 아래는 실제 시험에 관한 내용이다.
a. 六月十五日 浦瀬 試験 掩耳偸鈴이란말은 可笑로운 말이올쇠

b. 同二十五日 松間明月長如此 君再遊兮復何時 이글은

[墨書] 松間明月은 언제라도 다치 아니거 예셔 혼자 긋보면 와도 미가 大端치 아니온 구치 여러 사과 보와치면 오 滋味 더 가 다 이제 구 예 더난 後 언제 보치 아지 못다 고 섭섭믈 이긔지못여 짓 글이라

[朱書] 어대 如此리니 卽今 離別고 뉘로 더브로 보리요 그과 다시 놀기  어고 섭섭 기 이 업라

(a)는 사자성어 ‘掩耳偸鈴(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다)’을 풀이하는 문제로서, 이에 대한 나카무라의 답안은 ‘可笑로운 말이올쇠’로 되어 있다. (b)에도 시험문제와 답안이 실려 있는 바, 唐의 송지문(宋之問, 656?~712)이 지은 「下嵩山歌」‘下嵩丘兮多所思, 攜佳人兮歩遲遲, 松間明月長如此, 君再遊兮復何時’(「萬首唐人絶句」所收)에서 후구만 출제된 것이다.

(b)에서 교정된 부분을 보면, 행간에 ‘다 이제’가 묵서(墨書)로 쓰였고, 이와는 별도로 2행에 걸쳐 주서(朱書)로 조선어 문장이 기재되어 있다. 전자는 누락된 표현을 삽입하라는 지시이고, 후자는 한시의 의미에 보다 부합하는 해석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어학생의 일기부(日記簿)가 교수를 거쳐 최종적으로 독장에게 제출되고, 그 기사를 다시 복문(復文)의 소재로 사용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초량관어학소의 복문 교육은 통사(通詞) 양성교육의 일환으로서 통역 현장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조선어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던 것이다. 「復文錄」에 초량관어학소의 대내외 활동을 보여주는 기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본서의 기사 전체를 내용별로 나누면, 표류민 송환, 공무역, 구청(求請) 등 교섭과 요청에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많고, 조선 국내외의 정세와 사건·사고를 조사·보고한 내용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첨삭 교육
복문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답안에 대한 첨삭(添削) 교육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학생이 작성한 복문 결과는 적어도 2회 이상에 걸쳐 교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복문록」에서 대치 가능한 표현이 제시되는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서 ‘四五日/又 數三日’, ‘急히 飛船을 보내시고/ 或 急送飛船시고’, ‘긋치아닛게/ 긋챠일이 업개’와 같이 ‘又…/ 或…/ (무표시)…’로 달리 나온다. 더욱이 같은 기사 내부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형식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통해 첨삭은 적어도 두 명 이상에 의해, 특히 감좌(監佐)와 교수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감좌(監佐)는 시험 결과에 정오 판정을 하는 과정에서 틀린 부분에 대해 중선을 그어 삭제하거나, 빠진 어구를 삽입하는 등의 기초적인 수정을 가했다. 이에 대해 교수는 감좌가 빠트린 부분을 보충하고, 틀린 부분을 재수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수에 의한 수정은 기본적으로 주서(朱書)로 표시되므로, 이에 대한 감좌에 의한 수정은 묵서(墨書)로 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학소의 첨삭 교육에 대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표 2>와 같이 표현된다.
담당자 감좌 조교·교수
내용 1차 수정 2차 수정
표시 방법 묵서(墨書) 주서(朱書)
대상 언어 조선어 및 일본어

<표 2> 첨삭의 개요

이차에 걸친 조선어 교정을 거친 복문은 어학생에게 되돌려졌으며, 어학생들은 자신이 틀린 부분과 교정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이를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는 연습을 실시했다.

박진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