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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한 장의 문화사적 의미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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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명세(沈命世)가 김홍원(金弘遠)에게 여종 1명을 주며 작성한 명문(明文)
고문서는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료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는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매체 형식으로 새롭게 가공하거나 재창조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이는 콘텐츠 전략이다.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정본화와 역주가 필요하다. 그 일례로 1629년(인조 7) 심명세(沈命世, 1587~1632)가 김홍원(金弘遠)에게 여종 1명을 주면서 작성한 명문(明文)의 예를 들기로 한다.
『원본 자료 : 1629년(인조 7) 심명세 명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 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을 위한 기초 연구』(2015.6)에
1629년 심명세 명문의 원본 자료, 정본화 예시, 한글화 예시가 소개되어 있다.
심명세는 인조의 종모제였으니,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의 처남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용(德用)이다. 영의정 연원(連源)의 현손 강(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의겸(義謙) 아버지는 현감 엄(㤿)이며, 어머니는 좌찬성을 지낸 능성부원군 문의공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구사맹은 인조 생모 인헌왕후의 부친이다. 심명세는 심엄과 구씨 소생 7남 4녀 가운데 셋째이다. 부인은 완산이씨[李惟淸 딸]로, 1621년(광해군 13)에 15세된 딸을 잃고, 1623년(광해군 15)에 또 15세된 아들을 잃었다.

심명세는 유생으로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운군(靑雲君)에 봉하여졌다. 『일월록』에 “구굉(具宏)의 생질인 유학 심명세는 그 아버지 심엄이 광해에게 미움을 받아 비명으로 죽었고, 형 정세(挺世)도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의 사위라는 이유로 매를 맞아 죽었으므로 몸을 떨쳐 일을 일으켜 구굉과 서로 함께 모의했고 신경진ㆍ구굉ㆍ심명세는 모두 임금 인조의 척당이었으므로 곧 추대할 뜻을 정했다.”고 했다.

한편,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의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해옹(海翁)이다. 1588년(무자, 선조 21, 萬曆 16) 진사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조부 상을 당하고 부친이 위독하여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의곡(義穀) 1백석을 의주(義州)의 행재(行在)에 보내었다. 정유재란 때 호남관찰사 추포 황신(黃愼, 1560~1617)을 도와 변산(邊山)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옥구(沃溝)부터 고군산(古群山)까지 일대를 지켰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8년(무술, 선조 31) 남원에서 명나라 유정(劉綎)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1599년(기해, 선조 32) 금산군수에 제수되었는데, 이후 무부인 청도 김씨를 잃고 황신의 질녀 양천 허씨를 계실로 맞았다. 1605년(을사, 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에 책봉되었다. 1606년(병오, 선조 39) 원주목사, 1615년(광해군 7) 나주목사, 1617년(정사, 광해군 9) 담양부사를 지냈으며 인조반정 초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있었다. 이후 고향 졸래곡(茁萊谷) 대산(臺山) 남쪽의 서실에 해옹(海翁)이라 편액하고 소요했다. 아들은 김명열(金命說, 1613~?)이다. 목면 10동(同)으로 부안 우반동의 땅을 사들여 손자 김번(金璠, 1639~1689)이 1678년 우반동에 자리 잡는 기반을 마련했다.
崇禎二年十二月初五日, 前府使金弘遠令前明文. 右文爲, 古阜婢愛香, 乃吾賜牌永給婢子, 而令之家畜久矣. 恩賜婢子, 永許於人, 似爲未安, 而吾與令之情義, 非他尋常識面之比. 知令而拔薦令者, 乃吾師秋浦先生. 而先生沒十五年于今, 令之 誠心, 始終不渝, 則爲先生門下者, 於令之事, 當如何也. 況吾伯父家 兄, 愛信令殊甚, 而吾與之往來, 藐自童年. 於師則拔薦令, 於家 則愛信令, 而吾得與之交. 爲令而謀, 死生且不避, 況惜一婢子耶. 人 或以輕許 恩賜罪我, 亦且甘心而不辭也. 今令抱至怨自北移南, 寄路於所 治之州. 握手無言, 悲涕交墜. 想令到嶺之日, 無聊鬱悒, 何以爲懷. 困頓艱辛, 何以爲生. 右婢頗有歌妙, 而久狎於令, 令必便於使令. 故永許於令, 令無難色於我可也. 況吾在忠原時, 令送駿駒, 而我 受之不辭, 今我許婢於令, 而令其可辭乎. 蓋吾欲附於古人通貨之 義耳. 婢主靑雲君 沈命世[着名]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의한 고문서 정리 1단계 – 정본화』
심명세는 선조 광해군 때부터 명문가 출신이자 인조의 종모제로서 반정에 일등 공을 세운 인물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깊이 교류했다. 김홍원도 기옹 정홍명(鄭弘溟), 현곡 조위한(趙緯韓), 청하(靑霞) 권극중(權克中), 택당 이식(李植), 계곡 장유(張維), 지봉 이수광(李睟光) 등과 왕래한 간찰이 전한다. 따라서 1629년 심명세가 김홍원에게 여종 1명을 주면서 작성한 명문(明文)은 인조반정 이후 권력의 향배, 인맥 관계, 공신비의 사급 관습, 증빙 문건의 효력 등등에 관해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숭정 2년 12월 초5일 전 부사 김홍원(金弘遠) 영감께 주는 명문. 이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부(古阜)의 계집종 애향(愛香)은 바로 내가 사패(賜牌)로 영원히 지급받은 계집종인데, 영감의 집에서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은혜로 내려주신 계집종을 다른 사람에게 영영 주는 것은 부당한 일 같지만, 저와 영감과의 정의(情義)는 흔히 얼굴만 알고 지내는 다른 보통 인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영감을 알아보고 영감을 관리로 추천한 사람은 바로 우리 스승이신 추포(秋浦)[황신(黃愼)] 선생이십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15년이 되는 지금까지 영감의 진실한 마음이 시종 변하지 않으니, 선생의 문하생이 되는 사람으로서 영감의 일에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하물며 우리 백부와 가형은 영감을 아끼고 신뢰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고, 제가 영감과 왕래한 것이 아득히 먼 어린 시절부터였습니다. 스승께서는 영감을 추천했고, 집안에서는 영감을 아끼고 신뢰했기에 저는 더불어 사귈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영감을 위해서 도모하는 일이라면 생사조차 피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계집종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사람들이 혹시 은사로 받은 것을 가벼이 주었다고 저에게 허물을 씌운다면 또 달게 받고 사양치 않겠습니다. 지금 영감이 지극히 원통한 마음을 품고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옮겨가다가, 제가 다스리는 고을에 이르렀습니다. 손만 잡고 아무 말 못한 채 슬픈 눈물만 함께 흘렸습니다. 영감이 영남지역에 도달한 나날은 무료하고 울적할 것이니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입니까. 궁핍하고 고생스럽게 어찌 살아갈 것입니까. 이 계집종은 자못 노래를 잘 부르고, 오랫동안 영감과 가까이 지냈으니 영감께서 부리기 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께 영영 드리오니, 저에게 난색을 보이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충주에 귀양 가 있을 때 영감께서 망아지를 보내주셨을 때 저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는데, 지금 제가 영감께 계집종을 주는 것을 사양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옛 사람들이 재물을 주고받은 의리에 좀 갖다 붙이고 싶습니다. 계집종 주인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 [착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의한 고문서 정리 2단계 – 한글화』(역주 생략)
심명세와 김홍원을 중심으로 하는 인적 네트워크
『인조실록』 권26 인조 10년 임신(1632, 숭정 5) 4월 4일(신미) ‘청운군 심명세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청운군(靑雲君) 심명세가 죽었다. 심명세는 상의 이종 사촌으로, 반정할 계책을 은밀히 도와 그 공이 많았으므로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고, 벼슬은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조금 고지식하나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좋아했다. 일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자기 견해를 고집했는데, 사람들이 혹 이를 따르기도 했다.
심명세의 형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자는 덕현(德顯) 호는 휴옹(休翁)이다. 부인이 황신의 딸이다. 1613년(계축, 광해군 5), 심광세는 아우 심정세가 김제남 옥사에 연루되어 장살 당할 때 경남 고성(固城)에 유배되어야 했는데, 주위의 책망에도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 친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고성에서 저 유명한 『해동악부』를 엮어 목판으로 간행했다. 인조반정(계해, 1623) 후 올린 「계해시무소(癸亥時務疏)」에서 군주 된 자는 몸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큰 근본으로 들고, 여덟 가지 급무를 진달했다. 부안군수로 있으면서 이매창을 후원했다. 이괄의 난 때 행재소로 가던 중 부스럼이 심해져 부여의 객사에서 48세로 졸했다.

이식이 광해군 말기에 아들 이단하에게 쓴 서찰을 보면, 심광세가 남쪽으로 옮겨 가자 온 집안이 분주하게 남북으로 옮겨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심명세가 특히 심했던 까닭에 맨 먼저 살림이 결딴났다. 이러한 상황은 심명세가 반정에 참여, 일등공신이 되면서 바뀌었다.
광해 5년(1613)
계축옥사
맏형 심광세가 고성(固城)으로 귀양을 가자, 2년 지난 뒤 모친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그를 보러 가서는 밀양(密陽) 삼랑포(三郞浦)에 머무르다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아래로 이주했다. 李植, 「送沈德用南歸兼寓伯氏德顯」, 「澤堂集』 권1 / 李植, 「遊釣臺 送沈德用挈家南歸古詩六篇」, 『澤堂集』 권1 / 李植, 「靑松篇送沈娚(命世)移居嶺南」, 『澤堂集』 續集 권1 / 李植, 「送沈德用移居善山序」, 『澤堂集』 권9 / 李植, 「同具得元·李士以士致兄弟 送沈德用于洞口盤碕 以京洛雲山外分韻賦詩 得洛字」, 『澤堂集』 續集 권2 / 朴瀰, 「送沈德用歸嶺南」 『汾西集』 권2
광해군말 李植, 「答端兒」, 『澤堂集』 別集 권18. “옛날부터 심씨 집안이 파산된 것은 아니었다. 사인(舍人, 沈光世)이 남쪽으로 옮겨 가자 온 집안이 분주하게 남북으로 옮겨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청운(靑雲, 沈命世)이 특히 심했던 까닭에 맨 먼저 살림이 결딴나고 만 것이다. 이것은 호기를 부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우리 집안에 믿을 것이 뭐가 있기에 또 그 폐단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냐.(후략) ”
1623년 靖社元勳
반정후 공조좌랑·형조좌랑·사복시첨정 등을 역임했다. 평양으로 사명을 띠고 나가기도 했다. 李植, 「松京道中 送沈德用奉使西京五絶」, 『澤堂集』續集 권3
통정대부 겸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嘉善大夫에 오르고 청운군에 봉해졌으며 부총관을 겸했다. 李植, 「沈孺子墓誌」, 『澤堂集』 권10. [沈榶(정미 1607 선조40 – 신유 1621 광해군13)]
인조 2년(1624) 李适 난으로 인조를 公山으로 호종. 환도 후 가의대부 공조참판으로서 호위장을 겸함.
인조 3년(1625) 尹義立 딸이 세자빈 선발에 뽑혔는데, 그녀의 종형 尹仁潑(윤의립 서조카)이 역모죄로 죽은 인물이다. 심명세는 경연에서 “惡逆을 범한 집안을 선발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 嘉禮를 정지시켰다. 忠州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호위대장으로 강화에 호종, 환도한 뒤 내섬시제조를 겸했다.
인조 6년
(무진, 1628)
허유(許逌) 역모 사건에 최산휘(崔山輝)로 하여금 고변하게 했으나 공신에 들지 못했다.
인조 7년
(기사, 1629)
원주목사로 부임했다. 李植, 「東城 夜別德用之原州任 曉漏還省途中口占却寄」(己巳), 『澤堂集』 續集 권4 / 張維, 「送沈德用赴原州」, 『谿谷集』 권31 七言律詩 / 洪柱元, 「送靑雲君沈德用 令公赴原州」, 『無何堂遺稿』 册二 七言律 / 李植, 「送靑雲君赴原州牧小序」, 『澤堂集』 권9
인조 8년
(경오, 1630)
원주목사 심명세가 목릉(穆陵)은 땅이 길하지 않다고 상소했다. 인조가 대신과 예관에게 새 묏자리를 잡게 하여 11월 21일(병신) 천장했다.
인조 10년
(임신, 1632) 4월 4일(신미)
심명세 卒 張維, 「哭靑雲君沈德用」, 『谿谷集』 권31 七言律詩 / 張維, 「忠勳府祭靑雲君沈公文」, 『谿谷集』 권9 / 金尙憲, 「哭靑雲君沈德用」, 『淸陰集』 권6 七言律詩 / 朴瀰, 「祭沈德用文」, 『汾西集』 권15 “德用之柩。且卽遠矣。於是羅州朴瀰。謹用壬申五月戊戌朔十五日壬子。以米食肴酤。祭于亡友小司空沈兄之靈而言曰: (후략) ”
심명세 묘지명 작성 李植, 「靑雲君沈公墓誌銘」, 『澤堂集』 권10 / 張維,
小室 亡 李明漢, 「挽沈德用小室」, 『白洲集』 권5 五言律 / 李植, 「沈德用小室挽三絶」(嬖人任氏婢子), 『澤堂集』 권4 詩.
夫人 喪 李植, 「靑雲君沈(命世)夫人挽」, 『澤堂集』 續集 권6.
표1 沈命世의 행적과 주변인물의 시문
앞서 보았듯이 김홍원은 정유재란 때 황신의 막하에서 활동을 했고, 왜란 이후 황신의 질녀(양천 허씨)를 재취로 맞았다.

황신(黃愼, 1560~1617)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91년 건저(建儲) 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 일파로 몰려 파직당했다. 1592년 다시 기용되고 1593년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반했다. 통신사로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ㆍ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나 화의가 결렬되자 명나라의 내원을 청해 가선대부에 승진했다. 1605년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다음 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그 뒤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졸했다.

그런데 『인조실록』 권7, 인조 2년(갑자, 1624, 천계 4) 12월 22일(임인)의 조항에 보면 사헌부가 탐학한 영월부사 조명욱(曺明勗)과 함께 무능한 회양부사 김홍원의 파직을 건의한 말이 있다. 헌부는 “회양부사 김홍원은 본시 미천한 신분으로서 문재(文才)나 무재(武才) 어느 것도 없는 사람인데 오직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며 섬기는 것만을 장기로 삼아 왔으며, 혼조(昏朝) 때에 와서는 초액(椒掖)에 빌붙어 잇따라 호남의 큰 고을을 맡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형벌을 면한 것만도 이미 실정(失政)했다 할 것인데, 어찌 다시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직책을 제수하여 거듭 청명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라고 했는데, 인조는 김홍원을 체차하라고 했다. 사관은 “김홍원은 호남의 천얼(賤孽)로서 왜란 때 발신하여 외람되게도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혼조 때에 궁중과 결탁하고 권세 있는 간신을 아비처럼 섬겼다. 그 뒤 나주(羅州)에 제수되었는데, 이민(吏民)이 그가 관원이 된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할 수 없이 버리고 돌아왔다.”라고 논평했다.

또한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천계5) 5월 8일(을묘)의 좌목은 ‘부안(扶安) 사람 김치중(金致中)의 상언과 관련하여 전라 감사에게 부안 현감 서우신(徐佑申) 등을 추고하게 하는 등으로 처치하겠다는 조익(趙翼)의 계’이다. 조익에 의하면 김치중은 상언하기를, “아비 김여관(金汝瓘)이 족인(族人) 김곡(金轂), 김형(金泂), 김홍원(金弘遠) 등과 평소 원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홍원이 현감 서우신(徐佑申)과 전부터 절친하고 김형은 첩의 조카딸 및 계집종을 서우신의 자질에게 줌으로써 서우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세 명의 원수가 함께 모의하여 남몰래 서우신에게 부탁하여 전답의 실제 면적을 누락시켰다는 구실로 아비를 죽이도록 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익은 해조로 하여금 추고문목(推考問目)을 만들어 보내게 하여 현감 서우신 및 김곡, 김형 등을 감사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고 김곡은 다른 고을로 이수(移囚)해 심문하게 하라고 청했다. 인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했다.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김홍원의 인물됨을 비난했다. 심명세와 김홍원의 관계는 황신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심명세는 그 형 심광세가 황신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김홍원은 황신의 질녀(양천 허씨)를 후취로 삼았다.
명문(明文) 작성의 시간적 배경
1629년 12월의 명문(明文)에서 심명세는 김홍원의 처지에 대해 “지금 영감이 지극히 원통한 마음을 품고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옮겨가다가, 제가 다스리는 고을에 이르렀습니다. 손만 잡고 아무 말 못한 채 슬픈 눈물만 함께 흘렸습니다. 영감이 영남지역에 도달한 나날은 무료하고 울적할 것이니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입니까. 궁핍하고 고생스럽게 어찌 살아갈 것입니까.”라고 했다. 이 사실은 1860년 간행된 김홍원(金弘遠)의 문집 『해옹집(海翁集)』 권5에 수록된 서녀서(庶女婿) 최경(崔勁)이 지은 김홍원(金弘遠)의 가장[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政大夫羅州牧使金公家狀]의 다음 단락과 관련이 있다.
先時藥房使令金仁之妻, 爲夫見棄, 請乞爲薦席, 公素知其女之奸惡, 卽令結笞逐之. 女以是銜之. 盖此女卽(韓)纘男(李)爾瞻家親幸而締結宮女者也. 及反正後, 陰以詛呪事, 害之於闕內, 事覺, 掘得人骨, 又書公姓名, 裹以人髮, 女卽時按法, 公坐次謫富寧, 移配興海. 未幾仁祖恕其寃, 用放敍之典. 自是益不喜與世低仰, 構海山軒於邊山南熊淵上, 日乘小艇, 往來逍遙.
김홍원이 연루된 사건은 송광유(宋光裕)가 무고하여 일으킨 옥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의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에 자세하다.

『응천일기(凝川日記)』에 따르면, 무진년(1628년) 12월 남원(南原)에 사는 업무(業武, 무관의 서자) 송광유가 고변했는데, “수년 전 윤운구(尹雲衢)ㆍ유인창(柳仁昌)ㆍ임게(林垍)ㆍ임타(林㙐)ㆍ정홍선(鄭弘先) 등과 순창(淳昌)의 김홍원(金弘遠)의 정자에 모여 모의하여 신인(神人) 허씨 성을 가진 자를 추대하고자 했는데, 이는 곧 허의(許懿)의 아들입니다. 허의가 여행 도중 이상한 여자를 만나 마침내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상한 중이 와서 데려갔답니다. 들으니 지리산[智異山]에 있었는데 참으로 진인(眞人)이라고 합니다.” 했다.

이듬해(기사년, 1629년) 1월 9일에 병조판서 이귀는 차자를 올려, “호남의 사류(士類)를 위하여 억울한 옥사를 풀어 주십시오.” 했고, 도원(桃源) 조존중(趙存中)은 윤운구 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소를 올렸다. 1월 23일 윤운구ㆍ유인창ㆍ민안(閔顔)ㆍ최홍성(崔弘誠)을 귀양보내고 그 나머지는 풀어 보내게 했다. 그런데 1월 26일 전라도에 내려간 서제(書題) 김경현(金敬賢)이 들어와 밀고하기를, “김홍원의 첩 말치(末致)가 편지를 보내어 홍원이 윤운구 등과 역모한 실상을 알렸으므로 고변합니다.” 했고, 1월 27일 역관 장경인(張敬仁)도 같은 내용을 밀고했다. 김지수ㆍ윤운구ㆍ유인창ㆍ민안ㆍ최홍성ㆍ김홍원이 잡혀 국문을 받았는데, 인창ㆍ운구ㆍ민안에게는 형벌을 가하여 단근질까지 했으나 자백치 않고 죽었고, 홍원은 멀리 귀양가고, 홍성은 귀양갔던 곳으로 돌려 보내고 지수는 놓아 보내었다. 송광유는 당고개(堂古介)에서 교수형에 처하게 했으며, 첩 말치가 남편을 고발한 죄는 강상에 관계된다고 하여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송광유의 고변과 옥사는 인조 정권의 취약성을 드러낸 한 사건이다. 김홍원은 구 세력의 인물로 간주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흥해로 이배되었다. 이배 도중에 원주에 들러 심명세의 위로를 받았던 것인데, 이때 심명세는 여종 애향(愛香)을 천침하게 하고, 끝내 그 여종을 양도한 것이다.
1629년 심명세 작성 명문(明文)의 문체
고문서라고 하면 대개 이두식 한문과 초서체 서사를 연상한다. 하지만 아래 표의 ‘내용에 따른 고문서 분류’를 보면 한문의 문체도 이두식만이 아니라 정식(정격) 한문도 있고, 초서체 서사만이 아니라 해서나 행서에 의한 서사도 예상된다.

한국의 한문은 문언어법의 한문만이 아니라 한국어의 어순과 이두를 붙인 이두식 한문도 일상생활과 공문에서 널리 사용했다. 또한 불교식 문체의 한문도 있었다.
朝鮮의 言語와 文章 文言語法(古文)漢文 唐宋古文, 秦漢古文(擬古文), 小品 詩(詞 포함)
*古白話擬作文
騈儷文(四六文)
科文(科詩‧科賦‧疑義‧科策) 科詩
佛敎漢文 朝鮮式 古風
韓國式(吏讀式)漢文 鄕札
初期 音讀訓讀複合文
狀啟 등 公文書 朝鮮式 古風
告目‧立案 등 行政 및 生活文書 朝鮮式 古風
한글표기문 諺解
한글 生活文書
한글 書札, 祭文, 行狀行錄
한글 小說
앞서 본 심명세 명문은 이두식 한문이 아니라 문언어법의 정식 한문이다. 비록 4자구를 다용하고 있지만 고문의 행문을 따르고 있다. 문체는 서신체라고 할 수 있으며, 대두(擡頭) 등 당시의 서사 관습을 충실하게 지켰다. 심명세가 개인 서찰과 명문(明文)의 혼합 형태로 글을 쓴 것은 당시 재물과 노비의 증여에서 증빙 문건을 중시하던 풍조를 반영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고문서를 내용에 따라 아래의 표와 같이 분류했다. 대체적으로 수긍할 만하지만, 공동체의 유지에 가장 요긴했던 제문(祭文)과 상량문(上樑文)의 항목을 설정하지 않아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독서층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문류의 자료로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들도 별도의 항목을 설정해서 중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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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人口(戶籍) 戶口單子, 準戶口, 戶籍臺帳, 戶籍中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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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村落(마을) 扶助記, 看時記, 時到記
6 村落(마을) 洞契案, 完議, 書目
7 校院(鄕校․書院․祠宇) 靑衿案, 校任案, 先生案, 完文入院錄, 院生錄, 傳掌記, 儒林案
8 民願․請願 所志類(等狀, 白活, 議送), 上書, 上疏
9 科擧 紅牌, 白牌, 試券
10 資格認定 (敎令) 告身, 有旨, 敎書, 諭書, 祿牌
11 官府(準官府) 關, 牒呈, 帖, 解由文書, 照訖帖, 書目, 手本, 甘結
12 外交 임명장, 서신
13 宮房
14 意思疏通 書簡, 通文, 墨牌
15 門中(宗中)組織․運營 大宗契案, 小宗契案
16 寺刹 重修記, 奴婢案, 田畓案, 完文
17 신앙
18 놀이
19 官人日記(記錄) 鄕村日記, 在官日記, 義兵日記
20 일반인 일기 여성일기
표3 고문서의 내용에 따른 분류(한국학중앙연구원 보고서)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