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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학과 고문서 정리사업을 위한 방법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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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자료의 시계열화
고문서의 연구나 역주는 다른 문헌 자료에 대한 연구나 역주와 마찬가지로 텍스트 내부 구조와 의미를 밝히는 것과 함께 텍스트 외적 의미공간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 지시해주어야 한다. 근대 이전의 선인들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일생 많은 글을 읽거나 짓거나, 글이 적힌 문서에 의해 생활을 운영해 나간다. 고문서를 포함한 문헌에 관한 연구는 내용의 분석, 문체의 분류에 중점들 두게 되지만, 전통시대 문자생활의 종합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제1장 가족과 가문에의 소속 해명(咳名)과 본명
관례(冠禮), 축언(祝言)과 자설(字說)
혼례(婚禮)
족보 단자(單子)
가세연보(家世年譜)
제2장 몽학(蒙學)과 입신(立身) 가학(家學)과 취학(就學), 그리고 과정(課程)
연구(聯句)와 작시(作詩)
세서음(洗書飮)[문자음(文字飮)]
주(做) : 정표(程表)·과시(科詩)·과부(科賦)·책문(策文)
방방(放榜), 소분(掃墳)과 고유(告由)
제3장 지(知)의 방법 초록(抄錄)과 목록(目錄)
단구(斷句), 현토(懸吐), 비점(批點)
차기, 만록을 통한 학문 연마
경연일기, 시강일기, 일월주(日月註), 일승(日乘) 등 일기류 제작
방지(方志), 풍토기(風土記), 유서(類書)의 편찬
문집의 자편(自編)
제4장 한훤(寒喧)과 교환(交驩) 간찰(簡札) 언문간찰
유기(遊記)와 장유첩(壯遊帖) 제작
연구(聯句) 시축(詩軸)의 제작,화운(和韻)과 분운(分韻)
증시(贈詩)와 증서(贈序)
명(銘), 기(記)의 제작
만장(挽章)과 제문(祭文)
상량문(上樑文)
제5장 실용문서와 공식문서 통문(通文)
상소(上疏), 연소(聯疏)
계언(啓言), 장계(狀啓)
공이(公移), 판(判)
소지(所志)
진황지 개간권 문서
토지·가옥·노비 등의 매매·상환·환퇴 등의 명문(明文)
제6장 계지술사(繼志述事) 분재(分財)의 분금(分衿), 명문(明文)
치부(置簿)
토지문서
노비문서
유고·가장문자(家藏文字) 정리와 간역(刊役)
제7장 삶의 기록과 성찰 선부군사장(先父君事狀), 선비유사(先妣遺事), 유아
광명(乳兒壙銘)
타인을 위한 행장, 시장(諡狀), 연보, 묘도문자
일사(逸士)의 전(傳)
호설(號說), 자서, 자찬묘지명의 작성
표1 필자의 『어느 선비의 문자생활』 목차
필자는 『어느 선비의 문자생활』이란 저술을 계획하여 이 문제에 관한 초보적 연구 결과를 정리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처음에는 가공의 인물을 설정해서 그가 일생 동안 짓거나 읽어야 했던 글들의 종류와 문체적 특징을 추적하려고 했다가, 복수의 실존 인물이 남긴 글들을 토대로 문자생활의 시계열화를 시도했다. 이는 브라운의 『미국의 역사지리』(1948)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었다. 브라운은 당시 사람들의 보고와 지도를 자료로 삼아, 키이스톤이라는 18세기의 가공인물을 내세워, 유럽 식민자가 미대륙의 동반부에서 서반부로 전진하는 과정에 따라 기술한 바 있다. 환경지각의 관점에서 미국 역사지리의 전체상을 소묘한 저서이다. 각 관청과 서원, 가문의 문서도 시계열화하여 문서의 의미 공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문자생활의 중층성 확인
이두문은 공문서나 실용문서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일반의 서찰에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두 문자를 널리 사용했기 때문에, 심지어 임진왜란 때 구로다(黑田)와 도요토미(豊臣)는 황해도 양반과 인민들에게 통유(通諭)하는 방문(榜文)에 이두를 사용하게 했다.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은 「행년일기(行年日記)」 임진년 6월 4일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언급했다. 이정암은 본래 이두가 섞여 있다는 ‘방문’을 자신의 일기에 게재하면서 이두를 제거했다. 본래의 ‘방문’은 문장은 한문이고 토만 이두로 붙였는지, 아니면 변격한문으로서 이두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을 이두를 제거하고 한문을 정돈했는지 알 수 없다.

공초 등의 문서는 실록이나 잡사류에 인용할 때 이두문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편자 미상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1 ‘문목(問目)’의 계축년 5월 15일 조에 보면, 7인의 서얼 사건과 관련하여 정협(鄭俠)의 공초가 실려 있는데, 이 글은 이두식 변격한문의 문체이다. 그 첫머리만을 보면 이러하다.
【원문】白等. 上項應犀上疏又招內, 鄭俠朴宗仁徐羊甲沈英朴致毅許弘仁等, 謀逆有年是如爲旀, 交結豪傑勇士, 欲圖社稷者, 幾至四五年, 而不得乘隙. 先王昇遐之日, 詔使出來, 許弘仁徐羊甲等, 欲射詔使, 故爲生變, 而守衛嚴密, 不得遂計是如爲旀, 朴宗仁金祕詐稱禁府都事, 作賊於李義崇家, 盜得金帛, 治其數小不足以交結. 前年冬春間, 與許弘仁柳仁發金秘金平遜等, 三度往慶尙道, 盜殺銀商, 欲以其所得金帛, 賄賂執政者是如爲旀. 又欲使矣身爲訓鍊都監大將, 而官卑不得爲之是如爲旀, 朴宗仁徐羊甲許弘仁等諸賊承服招內, 矣身逆謀同參之狀, 箇箇納招. 其兇謀密議, 及服心同黨之人, 一一直告, 亦傳敎推考敎是臥乎在亦.
【번역】아뢰옵니다.[白等] 윗항목의 박응서(朴應犀)의 상소와 공초 중에, 정협(鄭俠)ㆍ박종인(朴宗仁)ㆍ서양갑(徐羊甲)ㆍ심영(沈英)ㆍ박치의(朴致毅)ㆍ허홍인(許弘仁) 등이 역모한 지 수년이 되었다 했으며, 호걸 용사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한 지 거의 4, 5년이 되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선왕이 승하하시던 날 조사(詔使)가 나온다 하므로, 허홍인ㆍ서양갑 등이 조사(詔使)를 쏘아 죽이고 짐짓 변을 일으키려 했으나, 수비가 엄밀하여 그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 했으며, 박종인ㆍ김비(金祕)가 금부도사로 사칭하고 이의숭(李義崇)의 집을 털어 황금과 비단을 도둑질했으나 그 양이 적어 결당(結黨)하기에 부족하므로, 지난해 겨울과 봄 사이에 허홍인ㆍ유인발(柳仁發)ㆍ김비ㆍ김평손(金平遜) 등과 함께 세 번 경상도로 가서 은 장수를 죽이고 얻은 금과 비단을 집정자(執政者)에게 뇌물로 주려고 했다 했으며, 또 저를 훈련도감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벼슬이 낮아서 못했다 했으며, 박종인ㆍ서양갑ㆍ허홍인 등 여러 역적들이 승복(承服)한 공초 중에, 제가 역모에 같이 참여한 진상이 낱낱이 진술되어 있으니, 그 흉모 밀의(凶謀密議)와 심복으로서 한 당이 된 사람들을 낱낱이 직고하라고 전교하여 추고(推考)하옵기에 아뢰옵니다.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 『주자어류(朱子語類)』(송시열에게 하사된 책)에 시강원장무서리(侍講院掌務書吏) 장시건(張侍騫)이, “대전(大殿)이 반사(頒賜)한 『주자어류(朱子語類)』 일건오십책(壱件伍拾冊), 『격양집(撃壌集)』 사책(肆冊), 및 『정사(政事)』 일도(壱度)를 봉과상송(封裹上送)하므로 책수(冊数)를 확인하여 알려달라”고 하는 내용의 고목(告目)이 끼워져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문체는 바로 이두식(현토식) 한문으로, 한문은 한문만 주워 읽어보면 정격 한문과는 달리 이문(吏文)에 가깝다.
그림 1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소장 『주자어류(朱子語類)』
조선시대의 이두문 사용에 대해서는 본인의 별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정조 때 규장각의 행사를 일력으로 엮은 『內閣日曆』을 보면, 초계문신의 강제(講製) 때 현탈(懸頉)의 사실을 보고하여 받은 의윤(依允) 문서나 연이차거불인(連二次居不人) 추고(推考)에 대한 판부(判付) 등은 이두식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동야휘집』에 나오는 남이신(南以信)과 임형리(任刑吏)의 이야기는 관리들의 서사활동에서 이문(吏文)과 공령문(功令文)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옛날 어느 재상에게 함께 글공부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문장력이 풍부하고 재치가 있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다. 그 재상이 안동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자, 그 친구는 안동 도서원 자리를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아전 명부에 올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곧, 안동 수령이 도임한 뒤 백성들의 송사에 판결문을 불러줄 때 형리(형방)가 제대로 받아쓰지 못하거든 죄를 주거나 파면하고, 또 그런 자를 형리로 불러 썼다는 이유로 이방의 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웃 고을에서 도망쳐 온 아전이라 자칭하고 길청[吏廳] 고직이에게 붙여먹고 살면서 길청의 아전들이 기록하는 문서를 대신 써주었다. 안동 수령은 다른 아전의 글은 물리치고 그 친구의 글은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형리를 뽑는 시험을 보아 그 친구를 뽑아, 아전 명부에 올렸다. 그 뒤 그 친구는 도서원이 되어 기생 처를 들여 잘 살면서, 문서를 거행할 때는 바깥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여 사또의 방석 아래 두고 나와 백성들의 숨은 사정과 아전들의 간교함을 훤히 알도록 했다. 그 친구는 이태 사이에 만여 금의 이득을 얻어 남모르게 서울 집으로 보내고는, 수령 임기가 차서 교체되기 전에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두식 변격한문은 한문이 발달하면서 문학적으로 저평가되었다. 이를테면 김춘택(金春澤)은 산문문체에서 이두를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춘택은 시속칭위(時俗稱謂)는 서찰뿐만 아니라 일반 산문에 써도 되지만, 산문에 이두를 사용하게 되면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고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선인이나 선배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이두를 사용한 공용문자에서 이두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이두식 변격한문의 문장 자체를 윤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조선조의 여러 문집에서 장계나 공이 등의 공용문자가 정격한문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은 산삭과 윤색을 거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유성룡의 아들 유진(柳袗, 자 季華)에게 부친 서한을 보면, 선인 혹은 선배의 문집을 엮으면서 이두를 산절하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장이 이두 붙인 곳이 아주 적어서 간간이 한 두 곳만 제거하면 찬연히 문장을 이룬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준(李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성륭의 장계(狀啓)와 공이(公移)에서 이두를 제거하려고 하여서 승접(承接)의 곳에 다른 글자를 대신해 넣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여, 산절과 개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경세는 이 편지에서 이두가 섞인 공용문서만 아니라, 문집에 수록하는 모둔 글들에 대한 산절의 문제를 논했다. 실상 이두식 변격한문만이 아니라 정격한문도 후인의 산절을 겪어 문집에 수록되는 일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정조 연간에 오면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두식 한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조 연간에 『증수무원록』과 『증수무원록언해』를 간행하게 된 사실에서 그러한 변화를 엿볼 수가 있다. 곧, 정조의 「군서표기」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우리나라의 사부(士夫)는 법률을 제대로 공부한 이가 적다. 그러니 송사나 옥사를 다스림에 있어서 제대로 법에 맞게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중대한 옥사의 검험(檢驗)은 더욱 신중하게 처리해야 함에도 그들이 보고 기준으로 삼는 것이라고는 오직 왕여(王與)가 지은 『무원록(無冤錄)』 한 책뿐이다. 그러나 그 책은 이두(吏讀)를 많이 사용하여 해독하기가 어렵다. 해독하기가 어려운 책이라는 이유로 평소에는 익히지 않고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위를 판결하고자 하니 어찌 그리 그 방법이 엉성하단 말인가.
사대부들이 이두식 문장을 읽기 어렵게 된 것은 이두 표기의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점, 한문산문 가운데 정격한문이 크게 발달한 점 등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조는 1795년에 호남 암행어사 이희갑(李羲甲) 서계에 대한 판(判)[判下, 判付]에서도 사대부들이 이문(吏文)을 읽힐 것을 당부하고, 이문제술(吏文製述) 규식을 정하는 전교를 부주(附註)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율문(律文)을 읽지 않아 실로 식자(識者)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문(吏文)으로 말하자면 그 관부의 공사 문서에 관계되어 긴요하기가 경전(經傳)의 언해(諺解)나 구두(句讀)와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근래의 습속이 모두들 제대로 이를 살피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는 암행어사 장계의 구어(句語)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이두(吏讀)가 있어서 원서(原書)를 두루 살펴보니 아예 비슷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이문은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으로부터 비롯되어 그 뒤로 감정(勘定)을 하여 금석(金石)처럼 바꾸지 못할 법으로 삼았는데, 이와 같이 서툴다니 어찌 말이 되는가. 유사당상 가운데 이조 판서가 잘 알아서 『이문(吏文)』 1책을 전부 등사하되 독음과 해석을 갖추어 인출(印出)하여 서울 각사(各司)의 송사를 다루는 아문 및 제도의 감영에 나누어 주도록 하라.
이에 대해 또 말해 둘 것이 있다. 사대(事大) 문서에 쓰는 이문은 비록 나라 안에서 쓰는 이문과는 다르지만, 제정한 법의 뜻이 과연 어떠한가. 그 정선(程選)한 책자는 승문원 참하관(參下官)의 구처강(九處講)과 6월과 12월 도목정사(都目政事)의 정부강(政府講)에 쓸 뿐만 아니라, 임전(臨殿)하여 시제(試題)할 때에 두사(頭辭)와 결어(結語)는 거기에서 각기 외워 쓰도록 했고, 또 문신 가운데 새로 출신(出身)한 자에 대해서는 30세 이전의 과(科)는 의당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주도록 되어 있으며, 그 외는 모두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주되 한결같이 전경 전강(專經殿講)과 봄가을에 제술하는 규정과 같게 했는데, 십 수 년 이래로 전부 팽개치어 출신한 문신마저 한학과 이문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니, 예를 아끼는 뜻이 진실로 이와 같단 말인가. 승문원과 사역원으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초기(草記)하되 규식대로 초계(抄啓)함으로써 구전(舊典)을 밝히는 일을 알게 하라.
정점의 상층문화에서 이두 혼용의 한문, 혹은 이두식 변격한문은 저평가되어 왔지만, 그것들은 민족문화와 민족어의 어법에 뿌리를 둔 산문문체로서 재평가해야 한다. 정격한문의 발달은 바로 이 이두 혼용의 한문, 혹은 이두식 변격한문의 극복을 의미했지만, 속칭위의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문화와 민족어의 어법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이두식 표현은 끊임없이 정격한문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심명세 명문(明文)에서 알 수 있듯이, 정격한문과 고문서의 서식이 혼합된 중간 형태의 문건도 문자생활에서 활용되었다.
유관 자료의 링크를 통한 의미 확장
고문서는 낙장의 형태로 전하기도 하지만, 장서각 수집 고문서는 관청, 문중, 서원 등의 일괄문서로서 수집된 예가 많다. 유전(流傳) 과정에서 훼손과 착종도 있지만 일괄문서군 속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그 의미공간을 더욱 명료하게 묘사할 수가 있다.

또한 수집 고문서에 대해서는 문집이나 다른 관련 자료가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여 링크를 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심명세 명문(明文)의 분석에서 주변 인물의 행적을 검토한 것은 그 한 가지 예이다.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대해서는 기록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조실록』과의 관련을 조사하는 한편, 관련 자료들의 참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초간일기』 가운데 『선조일기(先祖日記)』[표제는 후손이 붙인 듯함]는 저자가 주로 공주목사(公州牧使), 성균사성(成均司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에 있을 때의 기록으로 개인 일상생활에서부터 당시 경외(京外) 각관사(各官司)에 일어났던 중요 사건을 상술하고 있다. 아울러 동료(同僚)나 지구(知舊)들과의 왕복수창(往復酬唱)한 시문(詩文)이나 조야(朝野)의 소차계(疎箚啓) 및 왕(王)의 전교(傳敎), 비답(批答) 등도 전재(轉載)하여 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고 있다.
⒜ 수창(酬唱)한 시문은 별행(別行)하여 1∼2자씩 낮추어 적었다.
⒝ 방점(傍點)을 찍고 가끔 글귀를 수정한 곳도 산견하며, 해당 시의 두부(頭部)에 ○표를 하거나 또는 ‘차수불입(此首不入)’ ‘불입(不入)’ ‘입(入)’ 등의 표기가 있어 문집 편집 때 참고한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 이 책의 마지막 갑신(甲申) 7월 28일 기사의 후미에는 개종계사문(改宗系赦文), 사은사표(謝恩使表), 증조선사신유판서(贈朝鮮使臣兪判書)[산해관주사(山海關主事) 작], 차증주사(次贈主事)[유홍(兪泓) 작], 어제(御製) 차유홍운(次兪泓韻)[선조(宣祖) 어제], 봉교화유홍운(奉敎和兪泓韻)[이양원(李陽元) 등 16인] 등 종계변무(宗系瓣誣) 관계 시문이 전재되어 있다.
⒟ 영남지지(嶺南地志)[도내각관(道內各官) 토풍민속(土風民俗) 등]가 전재되어 있다.
⒠ 『설부(說郛)』[명나라 도종의(陶宗儀) 찬]」에 수록된 동인방언(東人方言)이 초록되어 있다.
이 사항들은 다음과 같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는 수창(酬唱) 인물의 문집 구성 조사나 일시문 정리에 도움이 된다.
⒝는 권문해 자신의 문집 편성 과정을 살피는데 긴요하다.
⒞는 선조 때 종계변무의 과정, 중국과의 외교사 연구에 이용할 수 있다.
⒟는 조선 중기 지방지의 편찬 사실을 확인하는데 참고로 사용할 수 있다.
⒠는 권문해 자신의 『대동운부군옥』 편찬 과정과 방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대동운부군옥』 卷首의 「纂輯書籍目錄」에는 ‘中國諸書’를 저록했는데, 그 목록에는 通考式 類書인 『杜氏通典』․『文獻通考』, 國故典章類 類書인 『大明一統志』, 百家雜記․筆記․詩話의 類書인 『說郛』 등 類書의 서명이 나온다. ⒠의 초록 사실은 권문해의 『설부』 열람 사실을 입증하는 방증이 된다.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