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집중연구 > 고서

한국한문문집을 활용한 학문연구와 정본화 방법

가+ 가-

연구자료서의 문집 활용 방안(1): 기초연구
① 문집의 성립과 체제에 관한 연구
문집은 사회적 토대라 볼 수 있는 물질적 기반과 독서층, 가문의 요구와 사회적 요구 등 여러 요인의 연관관계 속에서 편집되고 판각되고 유통되었다. 문집의 체제와 원 자료의 수집 방식에관한 고찰은 물론, 행권(行卷)ㆍ전사본(轉寫本)ㆍ간행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가 한문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문집은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이후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임춘(林椿)의 사후에 임춘의 문집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을 엮었다. 그 직후 본격적인 문집의 체제를 갖춘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나왔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이후 문인-지식인들이 자작의 시문을 자편(自編)하는 관습이 형성되어 있었다. 자편고(自編稿)는 온권(溫卷: 行卷)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하고 동류동호(同類同好)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규보와 최해(崔瀣)가 자편고를 간행한 것은 그 일례이다. 정도전은 시문의 자편고를 엮어 지인으로부터 서문을 받았으며, 중국의 명사에게 서문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문집을 분식(粉飾)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주자학의 이념에 따라 도맥(道脈)의 위상을 차지한 인물들의 문집이 재간ㆍ속간되었다. 곧,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ㆍ『익재난고(益齋亂藁)』,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한수(韓修)의 『유항집(柳巷集)』,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등이 그것이다.

『동국이상국집』의 초간본은 1241년 이규보가 74세로 몸져눕자 당시의 집정자인 최이(崔怡)의 명에 의하여 그해 8월 이전에 완성되어, 12월에 총 53권 14책으로 간행되었다. 1251년에는 중간본이 나왔다. 『동국이상국집』은 전집과 후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집 권1~18에는 시, 권19~41에는 문을 실었는데, 시는 창작 연대순, 문은 문체별로 묶었다. 후집 권1~10에는 시 847수, 권11~12에는 문 50편을 수록하였다. 전집에 빠진 시문과 1237년 이후 저자 말년의 작품들을 수습한 것이다. 시와 문을 분리하고, 시를 창작연대순, 문을 문체별로 편찬하는 방식은 『동파집』 등 중국 송나라의 문집 체제를 원용한 듯하다.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도록 문집을 편찬힐 때 ‘시문 2대별, 시의 편년 정리, 문의 문체별 정리’ 방식은 조선후기까지도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매월당집』의 경우는 시에서 분류식을 채용하였다. 조정에서 김시습의 시를 시작의 모범으로 게시하기 위해 이를테면 『찬주분류두시』 및 『분류두공부시언해』의 분류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대부의 문집은 시문을 망라하고 관련 문헌을 초록하여 완비하려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또한 국가에서 은전(恩典)을 내려 문집을 완비하여 간행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경우, 자편고에 기초한 저자 자신의 간행, 아들과 후손에 의한 일문(遺文)의 수집 간행, 국가의 은전에 의한 간행 등 3단계의 출판물이 모두 있다. 정도전의 재간본(대구본)을 보면 시와 문을 따로 수록하고 각각 문체별로 구분하여 두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때 시의 부문에서 부(賦)를 가장 앞에 두는 것은 조선후기의 일반적 방식을 따른 듯하다. 자편고에는 수록되어 있었을 도(圖)는 후대에 일실되어 목록에만 저록하였다. 또한 저자의 시문을 가능한 한 망라하기 위하여 정씨가전(鄭氏家傳)은 물론, 『여지승람(輿地勝覽)』, 『고려사(高麗史)』,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관찬본, 『고사촬요(攷事撮要)』와 같은 사찬본 유서를 참조하였으며, 다른 문집에 언급된 내용을 싣고 일문(佚文)이 있음을 표시하였다(李穡淨土寺雙溪樓記로부터의 추출 예).

한편 고려 때부터 문집에는 연보를 붙이는 체제가 성립하였다. 이를테면 『동국이상국집』은 강목 형태의 연보까지 붙였다. 이 연보는 1241년 12월 『동국이상국집』의 초간이 이루어질 때, 일찍 죽은 장자 이관(李灌)을 대신하여 사자(嗣子)가 된 차남 이함(李涵)이 작성한 것이다. 이함은 「연보서(年譜序)」에서 연보 작성이 보주(譜主: 父 이규보)의 행적을 기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작품의 창작 연대를 명시하여 시문보(詩文譜)의 기능을 더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규보의 문집보다 80여년 뒤 1363년 간행된 이제현의 『익재난고』 초간본에는 연보가 없지만, 1693(숙종 19) 중간본에는 연보가 덧붙여졌다.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은 조선 정조 때 완정한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이 때 연보 대신에 ‘사실(事實)’ 66조항을 부록으로 붙였다. 이 ‘사실’은 문집과 관련된 인물의 시문 자료들을 초출(抄出)하거나 ‘통수(通修)’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였고, 출전을 명시하였다. 기록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정씨세보(鄭氏世譜)』보다는 다른 문헌들에서 자료를 취했으며, 자료가 미비할 때는 본집(本集) 『삼봉집(三峯集)』과 함께 통수(通修)하였다. 정도전의 사후에 그와 관련된 타인의 기록들이 고의로 삭제되기도 하였 것이지만, 이 개간본의 편찬자들은 관련 기록들을 망라한 후 출전 명시의 집록(輯錄) 방식으로 ‘사실’을 서술하여 기록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주희(朱熹)의 「집주서(集注序)」나 청나라 때 고증학자들의 글쓰기 방식을 원용했을 듯하다.
② 저술의 문체(문언어법/이두식한문) 연구
한국과 일본의 한문학 형성기에는 중국의 자서(字書), 운서(韻書), 유서(類書) 등을 수용하여 각자의 지역언어적 특성에 맞게 활용하는 방법을 실험하였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을지문덕이 지은 「증수우익위대장군우중문(贈隋右翊衛大將軍于仲文)」은 5언 4구의 시로, 理(『광운』 良士切, 上止, 來)와 止(『광운』 諸市切, 上止, 章)를 운자로 사용하였다. 자서, 유서에 비해 운서의 수용과 활용 사실은 추적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당시 이미 『절운』계 운서가 수입되어 있어서 중국풍의 압운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650년에 제작된 진덕여왕의 「직금송(織錦頌)」은 완전한 압운체계를 지켰다. 이 시는 「소야난직금도」의 고사를 본떠 회문체(廻文體)로 작성되었을 것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개행(改行) 없이 연속으로 서사해 두어 그 원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오언장편은 일운도저를 정격으로 삼는데, 이 시도 대개 일운도저의 형식을 지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압운에서는 동일 운목의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고, 평성 陽운과 唐운, 그리고 庚운을 통압하였다.

일본에서는 751년에 한시집 『회풍조(懐風藻)』가 편찬된 이래, 9세기 초에 『능운신집(凌雲新集)』ㆍ『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ㆍ『경국집(經國集)』 등 칙찬 한시집이, 9세기 말에 『도씨문집(都氏文集)』ㆍ『전씨가집(田氏家集)』ㆍ『관가문초(菅家文草)』 등 개인 한시집이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대개 8세기에 이르러서야 운어(韻語)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원명천황(元明天皇)은 711년(和銅 4) 9월 18일, 太安萬侶(오노 야스마로)에게 『고사기』 편찬을 명하여 이듬해 1월 28일 책이 헌상되었는데, 그때의 상표문인 「고사기서」는 당나라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며 올린 표문(表文)을 본떠서 쓴 사륙변려문이다. 「고사기서」는 순수한 한문이지만, 본문은 일본어화된 한문(이른바 준한문)이다. 원명천황은 다시 713년 5월, 각국의 풍토기(風土記)를 상진하게 하였는데, 『常陸(히타치)風土記』만 한문에 가깝고 나머지는 대개 『고사기』와 같은 준한문이다. 사륙문의 문체인데, 그 속에는 한문의 어법에 맞지 않는 곳도 있다. 또 원명천황은 714년 무렵에는 舍人(토네리)親王을 총재로 삼아 太安萬侶 및 紀淸人(기노 기요토)ㆍ三宅藤麻呂(미야케노 후지마로) 등 다수의 학자를 참여시켜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720년(養老 4) 5월 21일에 찬진되었는데, 기(紀) 30권, 계도(系圖) 1권이다. 797년(延曆 16)에는 菅野眞道(스가노 마미치)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전반을 이루고, 3년 뒤 藤原繼繩(후지와라노 쓰구다나) 등이 그 후반을 이루었다.

한편, 신라와 발해에서도 칙찬 한시집이나 개인 한시집이 많이 나왔을 터이지만, 현전하는 것은 『계원필경집』이 유일하다. 또한 풍토기도 지역별로 편찬되고 중앙에서 종합하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지만, 확실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한국의 한문 문체는 문언어법의 고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변격한문을 포함한다. ⒜ 한문(漢文) : 고문(古文) ⒝ 이문(吏文) ⒞ 이두식 한문 ⒟ 한국한자어를 다용한 한문
독서계층의 한문 문체는 과거에서 부과되고 공적 생활에서 주로 사용한 ⒜였다. ⒝⒞⒟도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었지만, 그러한 문체로 작성된 시문들은 판각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준한문이라고 부르는 화한혼합문체(和漢混合文體)가 발달하고, 그 문체로 작성된 문장이 판각되어 유포된 것과 사정이 다르다. 환무천황(桓武天皇)의 平安京(헤이안쿄) 정도(定都) 이후 鎌倉(가마쿠라막부)막부 성립까지의 약 400년간(794~1192) 平安(헤이안)시대에는 일본 독자의 한문학이 발달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화한문학(和漢文學)이 중심이었다. 에도시대에는 한학(漢學)이 학문의 한 부류를 형성하였으나, 지식층의 문자생활에서는 화한혼합문체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1719년 제9차 통신사절의 일원이었던 신유한(申維翰)은 261일간의 일본기행 기록을 『해유록(海游錄)』으로 정리하였다. 이 『해유록』에는 본편(本編) 이외에 일본문명비평서인 부편(付編) 「일본견문록(日本見聞錄)」이 있다. 신유한은 일본인의 지적능력과 학습의욕은 무시할 수 없으며, 남경(南京)으로부터 해상(海商)들이 가져온 서적이 많아 고금의 이서와 백가의 문집이 조선보다 10배는 더 서사(書肆)에서 많이 간행된다고 언급하였다. 다만, 일본은 ‘문(文)’으로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문’으로 공사(公事)를 하지 않으므로 관백(關白)을 비롯하여 각주(各州)의 태수(太守), 백직(百職)의 관(官)은 한 사람도 ‘문’을 해득하지 못하고 가나(仮名) 48자를 가지고 진서(眞書: 한자) 수십 자를 혼용해서 장문(狀聞) 및 교령(教令)을 만들고 부첩(簿牒)이나 서간(書簡)을 만들어 상하의 정(情)을 통한다고 하였다. 신유한은 일본의 경우 고재달직(高才達識)의 사람이라 하여도 우리나라에 비해 백 배는 더 힘을 들여 근고(勤苦)하지만 문인운사(文人韻士)로서 세상에 이름이 난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문집은 국가의 경영과 관련된 ‘대문자(大文字)’들을 적극 수록하였다. 이를테면 장소(章疏)의 문장이 없으면 의작(擬作)이라도 하여 수록하였다. 이에 비해, 이두식 변격한문(조선식한문)의 문장은 산절하거나 개찬하여 수록하였다. 이를테면 현행 대구본 『삼봉집』(1791년 간행)에는 이두식 변격한문의 예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문산문은 정격의 한문뿐만이 아니라 이두를 섞은 한문이나 우리식 어휘와 어법을 함께 사용하는 변격한문이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조선초의 문인들은 이두를 별도로 학습하였다. 『이준록(彝尊錄)』에 보면, 김종직(金宗直)의 부친 김숙자(金淑滋)는 이두를 배워 이사(吏事)에도 우월하였다고 한다. 서적을 인쇄하면서 이두문의 공문서를 함께 판각한 예도 있다. 이것은 원나라 서적 간행의 예와 유사하다. 곧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 그 예이다. 1578년(선조 11) 정월에 부호군 이중량(李仲樑)에게 내사된 1541년 교서관 인출 활자본이 고려대 만송문고에 전하는데, 책머리에 1542년(중종 37) 평안도관찰사 상진(尙震)이 병조의 계목에 따라 우마치료방을 이두와 언문으로 만들어 배포하게 해달라고 올린 서장(書狀)와 국왕의 윤허를 알리는 좌승지 권의창(權應昌)의 글이 인쇄되어 있다.

이두문은 조선후기까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이두어는 일상의 물명(物名)과 단위사(單位詞)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고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吏文과 供招 등 이두식 변격한문에는 많이 나온다. 또한 각종 의궤의 ‘실입질(實入秩)’ 및 ‘환하질(還下秩)’ 등에서는 궁중에서 소용된 물명의 명칭과 단위를 살필 수 있다. 그 물명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한자의 음훈을 이용한 이두어와 가차자가 더욱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집에 수록할 때는 글을 변개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이황(李滉)의 문집에 수록된 51편의 「걸치사장(乞致仕狀)」 가운데 33편에는 이두가 하나 이상 남아 있고, 18편은 이두가 삭제되어 있다. 이 장계에는 어순이 우리나라의 어법에 맞는 문장들이 들어 있고, 이두를 제외한 한문 구절은 진술 내용만 차례로 쌓아나간 긴박한 문체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인이나 선배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이두식 문서에서 이두를 제거하여 실을 뿐 아니라 문장 자체를 변개하는 일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집에서 狀啓나 公移 등 공용문자가 정격한문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은 산삭과 윤색을 거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상 이두식 한문만이 아니라 정격한문도 후인의 산절을 겪어 문집에 수록되는 일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정점의 상층문화에서 이두 혼용의 한문, 혹은 이두식 한문은 저평가되어 왔지만, 그것들은 민족문화와 민족어의 어법에 뿌리를 둔 산문문체로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③ 문집 자료와 기타 자료의 교차 연구
한문학의 연구는 금석문과 고문서, 간찰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그 연구대상을 확대하여야 하며, 시기적으로 조선시대의 문학에 집중되고 있는 현상을 벗어나 문학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상고시대 및 고대국가 시대의 문학, 고려시대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는 특히 금석문 자료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이 자신의 시문을 자편(自編)한 것은 자신이 시문의 중체(衆體)에 능함을 과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권근(權近)의 「삼봉집서(三峯集序)」는 정도전의 위상을 권부(權溥)에서 이제현, 이색, 정몽주로 이어지는 도통 속에 위치시키고, 정도전의 시문이 중체를 구비하였으며, 경국(經國)과 화국(華國)의 도구임을 역설하였다. 권근이 정도전의 시문이 지니는 의의를 평가한 점은 다음 네 가지인데, 이것은 곧 조선시대 문집 편찬의 네 관점을 대변한다.
⒜ 도통(道統) 속에서의 위상 ⒝ 중체(衆體)의 구비 ⒞ 경국문장(經國文章) ⒟ 화국문장(華國文章)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의 문집을 편찬할 때는 이러한 기준에 적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시문을 수록하지 않거나 산절하였다.

한편 문집의 편찬 시에 원래의 저술이 수록되지 못한 예도 상당히 있다. 또 다른 사람의 글로 알려져서 문집에 수록되지 못한 글도 있다.

조정 관료로서 국가 경영에 협찬한 조선 사대부들의 공적 문자(大文字)는 『실록』에 전하는 것이 많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전대(前代)의 『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와 함께 문집 자료도 활용하였으므로, 『실록』 수록의 글이 문집에 누락된 예는 드물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문집을 편찬할 때는 반드시 『국조보감』을 검토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문집을 편찬할 때는 『국조보감』은 물론 『실록』을 열람하였으므로 『실록』 수록의 글이 문집에 누락되는 예는 거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경우는 여전히 『실록』 수록의 글이 문집에 누락되는 사례가 많았다.

정조 때 왕명으로 재간된 『삼봉집』에도 『실록』 수록의 대문자(大文字)가 수록되지 않은 예가 더러 있다. 편찬자들은 정도전의 시문을 망라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의 문집과 유서(類書), 필기류(筆記類)를 점검하여 ‘사실(事實)’을 찬집(撰集)하였지만, 『실록』의 기록은 살필 수 없었다. 이를테면 『태조실록』 1394년(태조 3) 2월 29일 기사에는 군제개정에 관한 정도전의 상서문이 실려 있으나, 현행 대구본에는 누락되어 있다.

한편 정도전의 글이라고 판단되지만 『삼봉집』에 들어 있지 않은 글도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는 『동문선』 권91에 권근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휴(金烋)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은 『향약제생집성방(鄕約濟生集成方)』에 대해 해제하면서 정도전이 이 서문을 썼다고 밝혔다. 『동문선(東文選)』 권103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1399, 정종 원년 5월 상순)도 권근의 작이라고 실어 두었다. 권근의 『양촌집』도 서문과 발문 두 글을 권근의 것으로 실었다. 하지만 한 책에 대해 권근이 서문도 쓰고 발문도 썼다는 것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태조는 제생원을 두어 일반인들을 치료하는 한편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1398년 1차로 편집되어 6월 하순에 정도전이 서문을 썼으나 간행되지 못하다가 이듬해 간행이 추진되었는데 그해 5월에 권근이 발문을 썼을 것이다. 초간에는 정도전의 서문과 권근의 발문이 있었을 터인데, 정도전이 살해되면서 서문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단, 『향약제생집성방』의 초간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輯佚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문집 자료를 기타 자료의 교차 비교하여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준다.
④ 문, 사, 철 연구 자료의 체계적 정리
문집의 자료는 문학의 자료일 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학의 자료이기도 하다. 연구 영역을 확대하거나 교차시키기 위한 노력이 종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향후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자료 수집면에서는 고 윤남한 선생의 선구적인 작업이 있었고, 경학과 관련해서는 대동문화연구원의 『경학자료집성』에서 문집 자료도 상당수 수록되었다. 소학과 관련해서는 필자가 『한국한문기초학사』를 집필하면서 문집 자료를 적극 활용하였다.

문집에 수록된 협의의 한문학 자료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닌 민족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국문학 일반과의 횡적 연계성을 더욱 입증하여야 한다.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으로 정병욱, 「한시 절구와 시조와의 비교」(한국한문학연구 3ㆍ4집, 1978~1979)가 있으며, 구비 전통과 서사적 한시의 관련을 논한 연구도 나왔다. 한문 저술과 다른 민족문학과의 관련 양상에 대하여는 자료적인 접근과 함께, 문학양식의 교차, 병행 등 문학사적 사실을 다양하게 논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문헌에 등장하는 요(謠)를 전수 조사하여, 각 시대의 사건별 요의 생성과 의미를 추적하여 조선민중의식의 역사적 표현 방식을 살펴 본 바 있다.
연구자료서의 문집 활용 방안(2): 심화연구
① 문집 수록의 문체 분류 체계에 관한 연구
앞서 2000년대까지의 연구 성과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문집 수록의 각 문체에 관한 연구는 한문학 연구 가운데 가장 활발한 부문이다. 하지만 각 문집의 문체 분류 체계에 관한 연구는 아직 연구성과가 축적되지 않았다. 문체 분류의 방식은 당시의 미학적 풍격, 편찬 체제의 지배적 성향, 저자 및 편찬자의 문체의식 등이 반영되어 있다.

최치원이 885년 봄에 신라로 돌아오자,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삼았는데, 최치원은 886년 정월에 『계원필경집』 및 『중산복궤집』, 그리고 근체시 100여수 등을 올렸다. 최치원은 고변(高騈)의 막하에서 4년 간 1만여 수나 창작하였으나, 그 가운데 10분의 1 내지 2 정도를 『계원필경집』 20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원필경집』 20권의 체재는 후대의 문집과는 다른 양상이 있다.

권1에서 권5까지는 고변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表)와 장(狀)을 대필한 글들을 수록하고, 권6에서 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별지(別紙)를 수록하였다. 권11에는 「격황소서(檄黃巢書)」가 실려 있고, 별도로 ‘서(書)’의 글들이 실려 있다. 이 ‘서’는 변려문체이다. 다음으로 권12ㆍ13의 ‘위곡(委曲)’이나 권14의 ‘거첩(擧牒)’ 등은 이후의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문체명이다. 본래는 군주에게 아뢰는 것이나 친구 사이에 왕복하는 것을 모두 서신이라고 하였다가, 평행 문자만 서신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에는 공식적 서신에는 주장(主將)이 막좌(幕佐)에 보내는 기밀 서신인 ‘위곡’, 하급 신하가 정사당(政事堂)에 올리는 ‘당장(堂狀)’과 같은 문체가 파생하였으며, 공문서에 별도로 붙이는 사신 형태의 ‘별지’가 발달하였다. 『계원필경집』에는 대작과 자작을 포함하여 94수의 ‘별지’를 수록한 것이다. 한편, 권15의 ‘재사(齋詞)’는 당대 도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그 문체는 고려조까지 연계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계원필경집』의 문체는 조선 성종조에 이르러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 130권과 비교하여 보면 문체의 비중이 다르다. 즉, 『동문선』은 시 장르를 중시하고 사명문자(辭命文字)와 공용문자(公用文字)에 주목하면서도, 고문의 문체가 정착된 고려중엽 이후를 대상으로 삼아, 고문을 채용한 서(書)ㆍ기(記)ㆍ서(序)ㆍ설(說)ㆍ론(論)ㆍ전(傳)ㆍ발(跋)ㆍ잡저(雜著)ㆍ비명(碑銘)ㆍ묘지(墓誌)의 글을 상당수 선록하였다. 문체의 배열 순서가 크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문선』도 『계원필경집』과 마찬가지로 재사(齋詞)tk(靑詞)의 문체를 독립시켜 두었다. 그런데 별지는 독립시키지 않았다. 별지는 송대에 이르면 일반화되는데, 조선조에서는 사신에서 행하지 못하였던 학술적 내용의 개진을 별지를 통하여 하게 된다. 그밖에 청요관이 재상을 만날 때나 교우나 동렬 사이에 왕래하는 신을 문장(門狀), 참장(參狀) 혹은 신장(申狀)이라고도 하였다. 『계원필경집』은 당나라 때 각종 서신의 분화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신라에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문집 가운데는 공령문(功令文)과 과작(課作)을 수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배제나 포섭은 작가 및 편찬자의 의식을 짙게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공령문은 ‘정문속투(程文俗套)’라고 천시되어 왔지만, 조선후기에는 이 과문이 불우한 문사, 기절(奇絶)한 문학세계를 추구하는 빈한한 문사들의 문학세계를 담는 양식으로 애호되었다. 그 문학사적 의의를 연구하는 일도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공령문은 발신하지 못한 문사들을 광범한 창작층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빈한한 선비들 사이에서 주요한 문학양식으로 인식되었다.
② 문집의 저술 주체에 관한 연구
작가는 저술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와 세계 내 존재자들에 대한 독특하고 새로운 사고를 수행한다. 혹은 세계를 타자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한 사실을 저술로 남긴다. 문집을 대상으로 연구할 때는 저술의 특성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동시에 저술의 주체에 대하여 그 세계관과 사유양식을 면밀하게 탐구하여야 한다. 종래, 이 연구는 작가론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고, 이 분야는 문집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가장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술 주체의 논리학과 수사학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수사법은 글쓰기의 책략으로서 비상하게 중시되었으며, 黨伐이 심화될 때 ‘담론’의 형태를 띠었다. 한문산문 가운데 묘지명이 公器로서 강조된 사실과 그 의미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수사법의 발달은 보다 사회역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또한 문체의 변화가 세계관 내지 사조의 변화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정합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한편 한시 연구에서는 창작미학과 풍격과의 관련에 관한 연구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왔는데, 작자의 개성이나 예술적 내재 역량의 발로와 연관시킨 논의는 아직 심화되지 못하였다. 문예미학적 관점에서 저술 자체에 내재된 내용 및 형식적 특성을 파악하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연계시켜 논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곧, 작가론은 개괄적 소개 차원을 넘어서 시인의 행적과 철학적 사유, 그리고 미의식을 종합하여 유기적으로 고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평전 형태의 연구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③ 중심사상의 발견
고전 연구는 저술 속에서 중심사상(key idea)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의 현재적 가치를 논하는 일을 수반해야 한다. 앞서 보았듯이 최근 들어 한문학에 반영된 갖가지 사상(事象)에 대해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나, 간헐적으로 제기된 문제(topica, problema)에 대한 담론(談論)은 활발하지 못하다.

최근 생태학의 관심은 환경 개량주의(인간 중심주의)와 근본 생태학(생물 중심주의)를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생태학을 수립하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 사회 생태학은 인간의 문화와 우주 자연을 합일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 실제적 전통은 오히려 동양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아일체의 사고는 특히 조선전기 사대부들의 시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강호 체험을 시화(詩化)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을 우주론적으로 확장하여, 때로는 도교적 성향을 끌어들였다. 다만 조선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사대부의 생태사상이, 조선후기에 자연과 인간의 분리라는 사유체계로 바뀌는 과정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근대적 자연철학자로 분류되어 왔던 홍대용의 경우에도 ‘인간과 물(物)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명제를 제시하여, 자연을 도구적으로 보지 않고 생태를 중시하는 전통적 인본주의의 사유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실학 연구의 성과와 생태론적 고전 해석 사이의 이론적 조정이 요구된다. 나아가, 생태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면서 유교나 도가사상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쳐 온 불교사상을 적극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전통사회 속에서 ‘타자’였던 여성의 문제를 다룬 한문학 작품들을 추출하고, 그것이 지닌 역사적 함의를 추출하는 일은 현재적, 실천적 의의를 수반할 것이다. 그리고 중인(여항)문학의 경우, 3세기에 걸쳐 무수한 작가들이 각각 사대부 문학과는 다른 문학세계를 형성하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보수적 예교주의, 타협적 자세, 비판적 자세와 현실주의의 세 부류를 형성한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 부류에 차별적으로 드러난 미학사상의 차이에 대한 집중적 고찰은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필자는 고전 저술 속에 나타난 죽음의 의식을 테마로 삼아, 『내면기행』(이가서, 2007)을 출간한 바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죽음과 마주하여 ‘지금 여기’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고투한 모습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작성한 묘지명(묘지, 묘비)을 통해 추적한 저술이다. 이와 자매편으로, 필자는 자전과 탁전 부류의 글들을 분석하고 논평을 첨부한 『나는 어떤 사람인가』(이가서, 2009)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중세적 자아와 자서전의 글쓰기에 관해 역사적으로 개관한 결과물이다.
연구자료서의 문집 활용 방안(3): 관계망 연구
① 단대사별 유파별 연구의 심화
문집은 한문학사의 주요 유파와 계보를 통시적, 공시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된다.
2008년 3월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다산의 자제들과 외손자, 그리고 다산의 훈도를 입은 여러 제자들의 관련 문헌들을 수집해서 『다산학단문헌집성』 9책을 영인한 것은 이런 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집성』은 다산을 포함한 9인의 주요 저술 가운데 23종을 원본 형태로 영인 수록하였다. 대상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산 이외에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丁學淵)ㆍ정학유(丁學遊)과 외손자 윤정기(尹廷琦), 다산이 강진 유배 때 가르친 황상(黃裳)ㆍ이청ㆍ이강회(李綱會)ㆍ이시헌(李時憲), 그리고 해남윤씨의 윤종벽(尹鍾璧), 승려 혜장(惠藏) 등이다. 자료의 판종(版種)을 보면, 1939년 석인본인 윤정기의 『방산유고(舫山遺藁)』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필사본들이다. 이 가운데는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사대고례(事大考例)』 26권 10책이 들어 있다. 『집성』이 갖는 학술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학단이 학문사상의 어떠한 원리를 공유하였는지 판단하는 일차 자료가 된다. 둘째, 다산의 학술사상이 당대에 확산된 양상과 다산의 학문이 한국지성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가늠하는데 귀중한 근거가 된다. 셋째, 다산학단의 성원들이 당대의 다른 지성들과 교유한 양상을 살펴, 19세기 지성사를 다각도로 검토하는데 필요한 단초를 마련해 준다.

근대 이전의 문인-지식인들은 시문을 통해서 지적 교류를 행하고 당파와 집단을 형성하였다. 필자는 조선 지식인들의 문자 활동과 지적 교류 양상에 대해 다음 몇 가지 국면을 중심을 살펴본 바 있다.
⒜ 제한적 의사소통으로서의 차운(次韻), 시평(詩評)과 간찰 왕복 : 수창과 간찰 왕래를 통해 공감, 논쟁, 추인,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수창에는 오론(晤論)을 대신하는 양태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소집(小集)과 연집(讌集)의 시회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었다.
⒝ 정서적 교감과 집단정서 창출 방식으로서의 시회 : 사대부 문인이나 중간 계층의 지식인들은 분운(分韻)ㆍ경작(競作)ㆍ연구(聯句)나 호운(呼韻)ㆍ호자(呼字)에 의한 즉흥시 제작을 즐기거나 주령(酒令)의 하나로서 여러 규식을 사용하였다.
⒞ 서발문과 비지ㆍ행장을 통한 평론과 의론 : 서발문은 잠재적 의론과 논쟁을 유발하였다. 또한 비평은 시문 교환을 통해서 감수성과 사유관념을 타자에게 제시하고 평가를 받는 양식으로서 의미를 지녔다.
⒟ 간역(刊役)과 강학(講學)을 통한 학맥의 확인 : 근대 이전과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사승을 확인하고 집안 어른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가승을 확인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의 학인들은 강학을 통해서 결속을 다졌다.
⒠ 공동저술과 학단의 형성 : 조선시대에는 학맥과 학파가 공동 연구를 행한 예도 있었다. 김진(金搢)이나 정약용의 예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것을 근거로 유파별 연구, 단대사별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관련 문집을 대조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위의 여러 사항 가운데 분운은 지식층의 시회와 소집에서 상호 간의 유대와 작시 수련을 위해 매우 중시되었다. 한국에서는 그 관습이 대개 원나라 강점기인 고려 중엽에 발아하여, 고려 말에 과거제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어 문인-지식인 집단이 연속성을 지니면서 문화적,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던 때에 극성하였다. 고려 중엽에는 과거에서 과부(科賦)가 매우 중시되어, 문인들이 즉석에서 평측 상간의 여러 운자들 활용하는 것을 평소 훈련해 두었으므로 분운의 즉석 창작이 가능한 문인-지식층이 성립하였다. 이제현이 신예의 전송연에서 이루어진 분운 연장의 시축에 서문을 쓴 것은 작시가 자유자재한 문인-지식층이 그 시기에 두텁게 존재하여, 문학과 정치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외직으로 나가는 관료나 과거 후 귀근하는 유생에게 전별연을 베풀면서 분운 연장하는 일이 정착되었다. 이 분운의 방식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말에는 좌주를 위한 연회에서 분운 연장하는 사례가 있었다. 좌주-문생의 명족회는 조선시대에 회시 제도가 정착되면서 축소되었다. 고려 말에는 승려를 중심으로 분운 연장이 이루어진 사례가 많았지만 조선전기에 배불론이 대두되면서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분운 연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국왕을 호종하는 문신들이 국왕을 위해 송축한 시에 호종신들이 분운하는 사례가 있었다. 송축시를 이용한 분운 연장은 조선 전기 이후 찾아 볼 수 없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내외간상을 당하여 시묘 생활을 할 때 그것을 기념한 시를 만들고 또 분운 연장한 시를 시권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로는 문인-지식인들이 시회와 시사를 갖는 일이 많아졌고, 후기에는 대단히 번성하였다. 이때에는 분운 구호와 분운 연장 등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분운은 문인-지식층이 문학 양식과 기호를 공유하는 場의 의미가 문학 실질 내용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녔다.
② 언어문자와 역사 혹은 권력의 관계에 대한 연구
한문 저술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산출된 것으로서 역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서술하고 평가하며 역사의 조짐을 드러낸다. 따라서 한문 저술에 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역사연구와 연계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한시가 역사와 관계하는 양상을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는 2003년 교토대학에 교환교수로 있을 때 효종이 우암 송시열에게 내사한 조선본 『주자어류』가 그곳 문학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던 효종이 정통 주자학자로서 춘추대의를 주창한 송시열에게 다른 책도 아닌 『주자어류』를 하사하면서 세자를 훈육하는 직책으로 부른 것은 범상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류학과 서구의 문화사학에서 제시된 선물 증여의 문제와 연관시켜, 국왕의 선물이라는 키워드로 국왕과 사대부의 관계를 탐색하여 조선왕조 문화사의 통사를 서술하였다. 종래 조선시대의 역사는 일본인이 주장한 설에 기대어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관점만 부각시켜 온 것이 사실이고, 국문학이나 한문학의 연구자들은 사대부의 창작문예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국왕의 존재, 국왕의 상징 권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한 조선시대의 정치, 역사, 문화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국왕의 권력 행사와 사대부와의 共治가 선물 증여와 충성 서약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피되,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왕의 선물 가운데서도 특별히 정치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을 선별해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조선시대의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ㆍ『승정원일기』ㆍ『국조보감』ㆍ『문원보불』 등 관찬 서적과 간찰ㆍ금석문 등의 자료도 이용하였으나, 역시 문집에 수록된 사은전(謝恩箋)과 관련 시문이 가장 큰 자료가 되었다.

문집에 수록된 저술에는 외교의 장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글들도 있다. 고려 초 한문학의 자료가 부족한 시기에도 표(表)의 자료는 제법 남아 있다. 조선 초에는 표전(表箋) 문제로 조선과 명나라가 긴장 관계에 있었다. 혹, 한 문집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다른 문집에는 수록된 것도 있다. 이러한 것은 상호대조를 통해, 저술가의 실제 저술 상황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인조 20년(1642) 2월 18일(무오), 일본은 일광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현당 곁에 새로 사당을 건립하고는 왜차(倭差) 平幸成(다이라노 유키나리)를 조선에 보내 편액과 시문을 청하고 종과 서명(序銘)을 구했으며, 관백이 아들을 얻은 사실을 알리면서 통신사를 파견해주길 요청했다. 인조는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에게 ‘일광정계(日光淨界)’라는 큰 네 글자의 편액을 쓰게 했다. 또한 동종을 주조하고 그 명문을 새기게 했는데, 명문은 이명한(李明漢)이 서(序)를 짓고 이식(李植)이 명(銘)을 지으며 오준(吳竣)이 글씨를 쓰게 했다. 현재 일본 일광산(日光山) 동조궁(東照宮) 동남쪽에 있는 그 동종을 보면 서문과 명을 모두 이식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광산 종명 병서」는 다음과 같다.
日光山鍾銘幷序
日光道場爲
東照大權現設也
大權現有無量功德合有無量崇奉
結構之雄世未曾有繼述之孝益彰
先烈我
王聞而歎嘉爲鑄法鍾以補靈山三
寶之供仍
命臣植叙而銘之銘曰
丕顯英烈肇闡靈眞玄都式亹寶
鍾斯陳參修勝緣資薦冥福鯨音
獅吼昏覺魔伏非器之重唯孝之
贈龍天是護鴻祚偕拯
崇禎壬午十月日朝鮮國禮曺參判李植撰
行司直吳竣書
③ 동아시아 문화사와 한국한문의 비교 연구
한문 저술에 관한 연구는 초기부터 동아시아 문학사 및 문화사와 대조하는 비교 연구가 정착되었다. 한문학 분야에서 거시적 시좌를 설정하고 한중일 문학을 비교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나말여초의 한국문학과 중국문학, 고려문학과 원문학 등에 대한 연구,, 도연명과 한국한시(남윤수), 주자의 무이도가 시와 사림파 문학(이민홍), 중국고전 및 명청문학과 조선시대 한문학, 통신사 문학, 연행 문학에 관한 연구가 그 대표적 예이다. 동아시아의 불교문화를 비교하는 거시적 시좌 속에서 불교문학을 논해야 한다는 제안도 이미 제출되었다. 국내외 중문학 연구자들의 자료적인 접근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문 저술의 흐름을 동아시아 문화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한 논의는 아직 활발하지 않다.

이를테면 신라의 한시는 신라에서는 처음에는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일승법계도시(華嚴一乘法界圖詩)」, 원효(元曉, 617~686)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태현(太賢, 경덕왕 재위 742~765 때)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ㆍ「보살계본종요(菩薩戒本宗要)」 등의 저술 끝에 붙인 게송(偈頌), 사복(蛇福)의 게송과 같이 불교적 게송의 형태로 발달을 하였다. 게송ㆍ찬불가ㆍ오도가는 칠언 4구나 칠언절구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효의 「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의 게송은 모두 칠언 4구의 형태이다. 그러다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혜초(慧超, 704~787)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삽입된 오언시와 같은 서정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혜초의 삽입시 5수는 모두 오언율시의 율격을 준수하지는 않았으나 오언율시를 지향한 형식이다. 8세기 후반 중국에 들어가 선종을 개화시킨 무상(無相, 680~756)은 칠언잡체 오갱전(五更轉)으로 구도적 내용을 문답식으로 표출하였고, 지장(地藏, ?~803)은 칠언율시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이라는 시를 지었다. 따라서 한시의 여러 형식이 9세기 초에 신라에서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수록된 게송이나 삽입시 등을 보면, 신라에서는 상당히 늦게까지 오언절구, 칠언절구의 시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신라의 한시사에서는 불교의 찬(贊)과 게(偈)의 계통을 이은 칠언절구와 오언율시풍이 주류를 이루다가, 최치원에게 이르러 근체시의 가장 고도한 양식인 칠언율시가 서정시 양식으로서 개화하였던 듯하다. 최치원이 칠언율시에서 높은 미학적 수준을 이룩한 것은 중국에서 만당 때 칠언율시가 다시 성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 중당 때의 고문가 한유(韓愈)는 율시보다도 고시에 힘을 쏟았지만, 만당의 이상은(李商隱)은 고시보다 율시에 많은 심혈을 쏟았다. 전반적으로 만당 때 고문이 쇠퇴하자 고시 제작의 의욕도 함께 쇠퇴하였다. 최치원은 또 당나라에서 가행(歌行)의 양식에도 주목하였다. 하지만 『계원필경집』이나 『고운선생문집』에는 최치원의 장가(長歌)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최치원은 신라 승려의 비명을 비롯하여 「토황소격문」 등 여러 글을 사륙변려문으로 지었다. 이는 만당 시기의 문인들이 대부분 변문에도 능하였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비록 중당 때 고문운동이 일어났지만 만당 때에는 다시 변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더구나 고변과 그 종사관들은 공문서를 대개 변문으로 지었다. 고변은 황소의 난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견책을 당하고 실권을 빼앗기게 되자 상장(上章)하였는데, 『구당서』 「고변전」에 실린 그 글을 보면 사륙변려문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송나라 계유공(計有功)의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따르면 아마도 나은(羅隱)이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보면, 고변의 막하에서 공문서는 대개 변문으로 지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최치원이 당나라 체류 기간 중에 지은 공문서들이 변문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최치원이 결코 중당 때 흥기한 고문 문체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최치원은 고문의 전범이었던 『한서』의 서술방법에 익숙하였던 만큼, 고문에도 밝았으리라 생각된다. 최치원은 당시 공문서에 지배적으로 사용되던 사륙변려문체를 더욱 익혀서 실제로 공용문에서 그 문체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진사과는 681년 잡문(詩ㆍ賦ㆍ頌ㆍ論)을 부과하는 고시과목으로 설치되었다. 빈공들은 향공들과는 별도로 시험을 쳤지만 당인들과 같은 방식의 문학 수업을 하여야 하였고, 10년 이내에 급제해야 하는 제약을 받았다. 최치원도 비록 한 편이기는 하지만 부 작품을 남겼다. 이것도 당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부가 중시된 사정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최치원의 「영효(詠曉)」는 소체(騷體)와 가행을 융합하였으되, 대우를 엄격히 지키고 사륙변려의 구식을 따른 변체서정소부(騈體抒情小賦)의 특징을 이었다.

앞서 말했듯 『계원필경집』 권15에 실려 있는 재사(齋詞) 15수는 당나라 도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당나라 때 문인이 지은 청사의 예로는 오융(吳融)의 「상원청사(上元靑詞)」가 『전당문(全唐文)』 권820에 실려 있을 따름이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최치원이 의탁한 고병은 도교를 혹신하여, 심지어 황소의 난 때도 도사 여용지(呂用之)의 계책을 따라 황소의 봉기군을 토벌하러 나가지 않아, 작위를 올려 받는 형태로 실권을 빼앗기고 말 정도였다. 이로써 당시 고변의 막부의 사상적 풍토를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도 당나라 사회의 일반적 풍조나 고변 막부의 풍토에 따라 도교에도 일정한 조예가 있었을 것이고, 도교 관련의 행사에도 간여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재사는 도교사에서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체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송대에는 비록 청사의 인쇄가 행해졌지만 실물은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문인의 문학 장르로서만 남아 있을 뿐이며, 또 유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송나라 때 들어와서는 호숙(胡宿)의 청사 125수가 『전송문(全宋文)』에 전하고, 구양수(歐陽脩)의 경우 밀사(密詞)를 포함하여 51수(『구양문충공전집』 권82~88), 소식(蘇軾)의 경우 17수(『소식문집』 권44, 권62), 육유(陸游)의 경우 6수(『위남문집(渭南文集)』 권23), 진덕수(陳德秀)의 경우 139수(『서산문집(西山文集)』 권23, 권48~49)가 전한다. 편 『동문선』 권115에도 김부식(金富軾) 3수, 최유청(崔惟淸) 1수, 김극기(金克己) 4수, 이곡(李穀) 3수, 정보(鄭誧) 2수의 청사 혹은 초례문(醮禮文)이 남아 있으며, 이규보는 37수나 되는 청사가 『동국이상국집』 권38~41에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재사는 당나라 때 도교의 양상을 알려주는 자료이며, 송나라와 고려 때 문인들이 청사를 짓는 전통의 맥을 열어준 것이다.
문집의 정본화 방안
조선시대 문인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해당 문인의 문집을 활용해야 하지만, 문집이 남아 있지 않거나 불완전한 상태로 전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 가운데 정치적 이유로 문집이 훼판된 예가 많다. 대북의 이이첨, 영‧정조 때의 홍계희 등은 국가적 출판에 간여한 일이 많으므로 출판물의 서발문을 모아도 그들의 사유방식이나 정치문화상의 이념을 더욱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인의 문학활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자료 취택의 범위를 개별 문집에만 한정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최근 안평대군 평전을 탈고하였는데, 『몽유도원도시축』의 기(記) 이외에도 안평대군의 시문을 여럿 모을 수 있었다. 안평대군이 24세 되던 1442년에 작성한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 시축 서문, 1451년에 지은 「무계시(武溪詩)」 서문 및 5수, 안평대군의 「팔가시선서(八家詩選序)」, 두류산(지리산) 영신사(靈神寺) ‘가섭상찬(迦葉像贊)’, 1448년 4월에 작성한 『묘법연화경』 발문, 1450년 3월 3일(정미) 궐내 불사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상서, 1450년 7월 하순에 작성한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 등이 그것이다. 일문(佚文)을 수집함으로써 안평대군의 시학 수준과 불교사상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문집은 사회적 토대라 볼 수 있는 물질적 기반과 독서층, 가문의 요구와 사회적 요구 등 여러 요인의 연관관계 속에서 편집되고 판각되고 유통되었다. 문집의 체제와 원 자료의 수집 방식에 관한 고찰은 물론, 행권(行卷)・전사본(轉寫本)・간행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가 한문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한국의 문집은 완정성을 지향했지만 편찬 의도에 따라 시문을 취사하려는 경향도 지니고 있어서, 간행된 문집은 결락의 부분이 적지 않았으므로, 집일(輯佚)을 필요로 한다. 또한 저술의 동기와 주제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근본 자료가 되도록 각 시문의 계년화(繫年化)가 이루어져야 한다.
(1) 집일(輯佚)과 개방형 텍스트의 구축
고전자료의 평가적 해석은 자료의 일차적 해독과 가공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이미 1980년대 후반의 연구도 객관적 실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나, 주요 전적을 주석하거나 국역하고 신뢰할 만한 正本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주요 작가별, 주요 갈래별로 정본을 만들고, 주석과 번역과 같은 2차적 가공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정본은 개방형 텍스트를 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현행의 각종 문집은 일문(佚文)이 많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문집이 훼철되거나 아예 편집되지 못한 예도 있다. 문집이 지닌 자료로서의 성격을 더욱 재고하기 위해서는 집일의 방법을 도입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한 배불사상가이지만, 선승(禪僧), 특히 시승(詩僧)과 교유하였다. 정도전은 1385년(우왕 11) 성균관좨주 지제교(成均館祭酒 知製敎)로 있을 때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위한 「미지산사나사석종명병서(彌智山舍那寺石鐘銘幷序)」를 작성하였다. 이 비는 정도전이 지은 글을 승려 의문(誼聞)이 해서로 쓰고 훈곡(薫谷)과 명호(明昊)가 새겨 국사의 입적 4년 후 1386년 10월에 세웠다. 현행의 『삼봉집』에는 이 비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문헌의 정본은 정본(整本), 일반 정본(定本, 正本), 집일 정본(定本, 正本), 연관자료 집성 정본(定本) 등 네 가지 상이한 층위가 있다. 정본(整本)이라고 하면 초간본이 불명할 경우 이본(異本)들을 비교・대조하여 초간본의 내용을 재구(再構)한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일반 정본(定本, 正本)이라고 하면 이본들을 비교・대조하여 제3의 권위 있는 텍스트를 재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정본(定本)의 경우, 이본들의 비교ㆍ대조는 물론 산일된 자료를 모아 집일의 작업까지 나간 집일 정본도 있을 수 있다. 청나라 고증학에서 한대 경학의 집일본을 만든 예가 이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앤솔로지 형식의 문헌이거나 역사기록물은 연관자료를 집성하거나 연계시키는 정본을 구상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정본 사업의 어느 것이 필요한지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또 현재로서는 이 네가지 층위 가운데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정본 사업을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층위의 정본 사업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그 셋을 아울러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개방형 사업 구상’이 필요하다.
① 정본(整本)[초간본의 재구] : 실전 문헌의 재구 혹은 실전 초간본의 재구. 이를테면 정도전 등 조선 초 편찬 『고려사』의 재구, 일연 선사 초편 『삼국유사』의 재구 등이 필요함.
② 일반 정본(定本, 正本)[이본들의 비교ㆍ대조를 통한 권위 있는 텍스트의 구성] : 다산학술재단 『정본 여유당전서』. 심경호 역 『서포만필』 외, 심경호 등 주관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대계본의 구상이 이에 속함.
③ 집일 정본(定本, 正本)[기본의 저본만이 아니라 다른 문헌 혹은 금석문 등에 산재하는 일차자료의 수집을 통한 권위 있는 텍스트의 구성] : 현재까지 이에 해당하는 모델은 없음. 다만 심경호, 『삼봉집』(한국고전번역원, 2013)의 경우, 『삼봉집』 미수록의 자료를 『조선왕조실록』, 금석문 자료, 『해동문헌총록』 발췌 자료 등을 통해 보완한 사례가 있음.
④ 연관자료 연계 혹은 집성(集成) 정본(定本)[앤솔로지 형식의 문헌이거나 역사기록물에 연관 자료를 집성하거나 연계시킨 구성] : 시문 앤솔로지인 『동문선』에 수록된 각 시문을 문집의 현전 여부를 조사하여 연계시키는 일. 혹은 역사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의 사료를 문집이나 기타 사료와 연계시키는 일. 일제 조선사편수회 『조선사』는 『조선왕조실록』 사료의 일부를 문집 소재의 기사와 연계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현 통용본의 국역본은 이러한 작업을 아예 시도하지 않았음.
(2) 계년화(繫年化)
또한 문집이 지닌 연구자료로서의 성격을 더욱 제고하기 위해서는 각 저술을 계년화해야 한다.
필자는 2008년부터 신조선사본(연활자본) 『여유당전서』(1934~1938년 간행) 154권 76책에 수록된 시문집 부분(권1부터 권25)을 시집, 산문집, 잡찬집을 대상으로 표점과 교감을 담당하여, 2012년도 12월 다산학술재단 간행 『정본 여유당전서』의 ‘시문집’ 부분에 수록한 바 있다. 시집에 대해서는 간행 당시 계년화를 시도하였고, 산문집에 대해서는 금년(2013년 10월 다산학술재단 주최 학회)에 계년화의 일부 결과를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산의 저술이 지닌 시기별 특징과 다산의 사유양식의 변화를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였다.

한편 정조의 『홍재전서』는 조선 국왕의 문집 중 가장 방대한 저술이자 18세기 후반의 문학사ㆍ문화사ㆍ정치사ㆍ사회사를 이해할 수 있는 보고이다. 현재의 『홍재전서』는 1ㆍ2차 정리 과정을 통해 정조의 각종 시문이나 책문, 경학 조문(條問) 및 신하의 응제(應製)와 조대(條對) 등 원천 자료를 산절(刪節)한 예가 많다. 따라서 정조의 시문과 책문, 경학 조문 등이 지닌 참 모습을 이해하고 그 역사적, 문화사적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천 자료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 시문 : 어제시에 화운(和韻)ㆍ차운(次韻)한 예들을 조사ㆍ수집ㆍ정리하고, 정조의 어제시가 산생된 맥락을 재구한다.
⒝ 교서 및 대책문 : 통용본 『홍재전서』에 수록된 교서 및 책문이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및 유관 작가의 문집 속에 실려 있는 것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밝힌다. 또한 정조의 교서와 책문에 대한 신하의 사전(謝箋) 및 대책문(對策文)을 조사ㆍ수집ㆍ정리하여 상호 연관성을 밝힌다.
⒞ 경사강의 : 통용본 어정조문(御定條問)이 조대(條對)를 제출한 신하의 문집이나 별집에 수록된 내용과 비교하여 그 이동(異同)을 밝힌다. 조대(條對)의 경우는 원래의 조대와 완전히 다르므로 그 실제 조대를 복원하고, 채택되지 않은 신하의 조대도 연계시킨다.
⒟ 정조의 전체 저술을 계년화하여, 정조의 문화적 통치와 시문 저술이 어떠한 연관 관계에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참고문헌
민족문화추진회, 韓國文集叢刊, 1988~.
徐居正 외, 『(影印標點) 東文選』,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동문선』, 고전국역총서 31, 민족문화추진회, 1998.5. 증판 1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 『高麗名賢集』, 1973.
國史編纂委員會, 『朝鮮王朝實錄』(48책), 影印本, 探求堂, 1981.
鄭麟趾 等 奉命撰, 「高麗史」, 影印本, 延世大學校 東方學硏究所, 1950 ; 韓國學文獻硏究所, 1983.
金宗瑞 等 奉命撰, 「高麗史節要」, 影印本, 韓國學文獻硏究所, 1983.
여강출판사 편, 『牛馬羊猪染疫治療方』,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ㆍ醫藥學篇 50, 驪江出版社, 1988. 11, 245~282면.
金烋, 『海東文獻總錄』, 學文閣 1969年 影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KORCIS (http://www.nl.go.kr/korcis/)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시스템 (http://gsm.nricp.go.kr)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권 해외한국학자료센터 (https://riks.korea.ac.kr/kostma/)

金致坤, 「高麗時代年譜硏究(1)」, 『藏書閣』 제5집, 한국학앙연구원, 2001.8.
심경호 외, 『국문학 연구 50년』, 혜안, 2003.10.
심경호, 『김시습평전』, 돌베개, 2013.
沈慶昊, 「朝鮮前期의 註解本 刊行과 文獻加工에 대하여」, 『大東漢文學』 제20집, 大東漢文學會, 2004.6, 167~248면.
沈慶昊, 『漢學入門』, 황소자리, 2007(개정 1쇄); 2013(개정 3쇄).
심경호, 「최치원과 동아시아 문학」, 『고운 최치원의 시문학』, 심경호 외 11명, 도서출판 문사철, 2011.10, 101~140면.
심경호, 「조선시대 한문학에 나타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방식에 대하여」, 『현실의 예술화, 예술의 현실화』, 심경호 외 8명,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2.2, 106~152면.
심경호, 「『여유당전서』 시문집 정본 편찬을 위한 기초연구 -詩篇의 繫年 방법을 중심으로-」, 『茶山學』 제11호, 다산학술문화재단, 2007.12.1, 355~395면 ; 심경호 책임연구, 『정본 여유당전서 시문집』 1~3, 다산학술재단 간행 『정본 여유당전서』, 2012.12.
심경호, 『국왕의 선물』(2책), 책문, 2012.
沈慶昊, 『韓國漢文基礎學史』(3책), 太學社, 2012(1쇄); 2013(2쇄).
沈慶昊, 『三峯集』, 韓國古典選集, 韓國古典飜譯院, 2013.
沈慶昊, 「高麗末 朝鮮初 文人-知識層의 分韻에 대하여」, 『국문학연구』 27, 國文學會, 2013.5, 7~33면.
심경호, 『삼봉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심경호, 「다산 정약용 산문의 개별 저술 시기에 관한 고찰」, 2013년 10월, 다산학술재단 연구발표회 발표논문.
오용섭, 돌려받지 못한 책들 : 버클리대학의 우리고서』, 경인문화사, 2008.
李仁榮, 『淸芬室書目』, 寶蓮閣, 1968년 영인.
尹炳泰, 『韓國古書綜合目錄』, 국회도서관, 1968.
尹炳泰, 『韓國書誌年表』, 韓國圖書館協會, 1972.8. 초간;미간행 改稿本.
千惠鳳, 『日本 蓬左文庫 韓國典籍』, 연세국학총서 다산기념강좌 29, 지식산업사, 2003.6.
허흥식. 『韓國金石全文』 中世下篇, 1984.
藤本幸夫, 「朝鮮漢文―吏讀文からの昇華―」, 『語文』 34, 大阪大學國文學硏究室, 1978. 5.
藤本幸夫, 『日本現存朝鮮本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06.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