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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과전문의학(産科專門醫學)의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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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도의 종합의서 편찬
조선은 국가 운영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생산의 주체인 인구 확대정책을 중요시했다. 부세(賦稅)와 군역(軍役)을 징발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를 유도하는 의학이 필수적이었다. 세종 대에 이르러 과학기술과 더불어 대규모 의학진흥정책이 추진되었다. 왕실과 대민의료를 담당할 삼의사(三醫司) 체제를 완비하는 한편, 조선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재배와 채취에 대한 조사, 중국 의학서적의 수입 및 간행, 의서 편찬, 의학교육, 취재(取才) 등이 국가 주도하에 이뤄졌다.

대대적인 국가사업을 통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1433), 『의방유취(醫方類聚)』(1445), 『동의보감(東醫寶鑑)』(1613)이 간행되었다. 당대 중국의학과 조선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이 종합의서들은 중앙과 지방에 보급되어 국가의 의료기능 강화와 인적 자원 확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총 85권으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질병이 수록된 조선 최초의 종합의서이다. 태교, 임신, 출산 및 부인과 질환 전반에 관한 의학적 이론과 처방이 「부인과(婦人科)」(54~66권)문에 독립항목으로 수록되어 전통시대 부인과학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준다.
산청한의학박물관 소장 『향약집성방』,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의방유취』
「부인과(婦人科)」의 병문(病門)을 살펴보면, 조경(調經), 붕루(崩漏), 여음(女陰) 등의 전반적인 부인병과 태교(胎敎), 임신(妊娠), 좌월(坐月), 난산(難産), 산후(産後) 등의 산과(産科) 질병들이 수록되어 있다. 「태교문(胎敎門)」에는 임신에 대한 총론을 시작으로 임신이 되는 과정, 몸의 형체가 생성되는 과정, 태교론, 임신의 기본시초, 형체의 생성과 천품이 다른 이유, 체질의 형성,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방법, 임신여부를 시험하는 법, 임신 중 금기할 음식과 금기 약가(藥歌) 등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향약집성방』은 전문의학지식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도 위급 시에 주위에서 나는 토산약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추상적인 의학이론을 배제하고 실용적인 약물지식을 실어 중앙과 지방의료에 보급 활용하였다.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이후 1442~1445년에 걸쳐 365권에 달하는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완성되었다. 『의방유취』는 현재 대부분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고대 의서의 편린들이 수록되어 있어 의사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서이다. 『황제내경소문(皇帝內徑素門)』을 비롯한 당ㆍ송ㆍ원ㆍ명나라 초기까지 153종의 의서를 인용하여 『의방유취』를 동아시아 전근대 의학의 박물지라 할 수 있다.

「부인문(婦人門)」에는 태아를 기르는 방법, 태아의 성별을 판별하는 법, 임신 초기에 보양하는 법, 태아를 보양하는 원칙, 태아의 성별을 딸에서 아들로 바꾸는 법, 임신에 대한 총론, 태교론, 형체와 기질론, 임신한 증후 구별, 임신 중 앓는 다양한 질병과 처방법, 음식요법 및 금기사항, 해산준비와 난산대처 등을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16세기는 조선의 전통 향약과 금원사대가 이전의 중국의학과 그 이후의 다양한 의학이론들이 대거 유입되는 시기였다. 1613년에 간행된 『동의보감』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으로 구성하여 기존의 질병 중심의 의학을 인간 중심의 의학으로 전환하였다. 성리학적 수양과 도교의 양생사상을 접목시켜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둔 의학이론을 체계화한 것이다.

『동의보감』「잡병편(雜病篇)」에 수록된 「부인문(婦人門)」에는 임신 및 해산, 갓난아이의 구급법이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이 저술 간행된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쟁과 기아, 전염병의 창궐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국가가 의학을 주도하였지만, 전쟁과 흉년으로 인한 기근, 전염병이 창궐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의료 및 구료기능이 일반민에게까지 미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영아 사망률과 출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질병 및 사망률이 증가하자 왕명에 의해 일반 부녀자들도 읽을 수 있는 언해본 의서류가 간행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전염병 및 구급의서, 산과전문의서 등의 전문분과의서가 일반민에게까지 보급되어 의약지식이 점차 확대되어갔다.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 소장 『동의보감』
대규모 인명 피해와 전쟁의 참상을 입은 조선은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화의 심화, 종법적 부계 친족 중심이 강화되면서 다산(多産)과 가문의 대를 이을 남아 출산이 강조되어갔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생리적인 특징으로 인해 『동의보감』「부인문(婦人門)」은 임신 출산과 관련된 증상 및 처방 위주로 기술되어 있다.

순수하게 의학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임신을 잘하기 위한 방법,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여성형, 임신이 잘되는 성생활 시기, 똑똑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 피해야 할 성교상의 금기, 임신 과정 중 태아의 성장,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 태아의 성별을 알아내는 방법,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방법,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방법, 똑똑한 아이를 낳는 방법, 산모의 헛구역질, 해산을 잘하는 방법, 산모의 음식 금기 및 권장, 해산을 잘하는 법, 해산이 잘못된 경우 처치, 해산하기 좋은 날짜와 위치, 난산을 막는 방법, 해산 전후의 질병, 태아를 유산시키는 방법, 영구적인 피임법 등의 내용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동의보감』 「부인문(婦人門)」은 유불도 의학사상과 민간의 의료관습이 결합되어 전통사회에서 여성의학에 대한 의사학적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격적인 산과전문의서의 간행은 1434년 왕명에 의해 편찬된 『태산요록(胎産要錄)』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풀이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1608), 현재는 유실되어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산서(産書)』, 『태산집(胎産集)』등이 국가 주도하에 간행 보급되어 산과전문지식의 대중화가 진전되어 갔다.
산과전문의서의 바이블 『태산요록』 탄생
세종 16년 판전의감사 노중례(盧重禮)가 왕명을 받고 『태산요록(胎産要錄)』(1434)을 편찬했다. 『태산요록』은 출산장려와 영유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대중에게 의학지식을 보급하는 한편, 산부인과 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총 2권 1책으로 상권은 임신 및 태교방법이, 하권은 영아의 양육법 및 구급 등 질병치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노중례는 『향약집성방』을 편찬한 후 이듬해 『태산요록』을 완성하면서, 『향약집성방』외에도 『천금방(千金方)』,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성제총록(聖濟總錄)』,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 등 16종의 의서를 인용하였다.

『태산요록』상권에는 태교론(胎敎論)이 가장 먼저 서술되고, 태아의 성별을 여아에서 남아로 바꾸는 방법, 태아를 기르는데 조심하고 삼가는 방법, 임신한 월별로 12경맥을 따라 태아를 기르고 휴식을 취하며 조심하고 삼가는 방법, 임신 중에 금기해야 할 음식, 태살(胎殺)을 피하는 방법과 임신 중에 보호하는 방법, 12월 산도(産圖), 출산을 용이하게 하는 방법, 난산, 탕자건(楊子建)이 저술한 「산론」(「産論」), 부인의 행년(行年)을 추산하는 방법, 산모의 옷 색상과 머리를 두는 방향, 일자별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방법, 흉신을 피하는 법, 일력법, 순산할 자리를 귀신에게 빌리는 방법, 금초법, 금수법, 산달에 미리 준비해둘 약물, 산모를 간호하는 방법, 산후에 가려야 하는 음식, 산후에 피하고 금기해야 할 것이 수록되어 있다.

하권에는 아이를 안는 방법, 아이의 입과 눈을 닦아주는 방법, 울지 않는 것을 치료하는 방법, 탯줄을 자르는 방법, 초생아를 씻기는 방법, 감초즙을 먹이는 방법, 주밀과 우황을 먹이는 방법, 태반을 묻는 방법, 유모를 선택하는 방법, 젖먹이는 방법, 유모가 지켜야 할 금기법, 생후 3일에 목욕시키는 방법, 탯줄을 싸매는 방법, 아이의 옷을 입히고 보호하며 기르는 방법, 입안의 물집을 터뜨리는 방법, 중설을 치료하는 방법, 중악(重齶)과 중간(重齦)을 치료하는 방법, 초생아의 촬구(撮口), 저금(著噤), 아구창(鵝口瘡), 중악(重齶) 등을 예방하는 방법, 아이에게 처음 음식을 먹이는 방법, 아이의 항문에 구멍이 없는 것을 치료하는 방법, 아이가 대소변을 보게 하는 방법, 기육(肌肉)이 탄탄하지 않은 것을 치료하는 방법, 소아의 변증, 소아의 객오병과 기타 금기해야 할 사항, 소아의 음식 금기, 소아가 기운을 품부 받는 법, 머리를 깎는 방법, 소아의 걸음마가 늦는 것 등에 대한 광범위한 양육법이 수록되어 있다.
가천박물관 소장 『태산요록』
태산서와 양육서를 포괄하고 있는 『태산요록』은 의학적인 소양을 갖춘 전문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산모와 유모가 알아야 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태산요록』의 특징은 기존의 종합의서 내에 하나의 문(門)으로 설정되었던 산과전문의학지식이 전문분과학문으로서 독립되어 이후 산과전문의서의 전범(典範)이 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대부가 여성에게까지 읽혀졌다. 사주당 이씨는 『태교신기』를 저술하면서 『태산요록』을 주요 인용문헌으로 수용한 점에서도 『태산요록』이 조선 사회에서 오랫동안 산과전문의서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한글본 『언해태산집요』(1608)의 간행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는 1608년 왕명에 의해 어의 허준(許浚)이 편찬하고 국역한 산과전문의서이다. 서문과 발문은 없으나 허준의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에서 “평시에 『태산집(胎産集)』,『창진집(瘡疹集)』, 『구급방(救急方)』 이 세상에 간행되었으나 난리 뒤에 모두 없어졌으므로 왕명에 의해 이 3가지 책을 편성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의학의 재정비와 민간에서 가장 긴요한 의학분야를 부녀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언해태산집요』는 태아와 산모에 관한 증상과 처방을 다루고 있다. 자식을 구하여 낳는 방법, 아기를 밴 징후, 잉태한 맥(脈), 태아의 성별을 딸에서 아들로 바꾸는 방법, 오조(惡阻), 임신 중 금기법, 태동을 안전하게 하는 법, 출산 징후, 난산을 막는 법, 열 가지 해산 징후, 재앙을 물리치는 법, 열 달이 안되 유산하는 증상, 산모의 얼굴을 살펴 태아의 생사를 아는 법, 죽은 태아를 나오게 하는 법, 태반을 나오게 하는 법, 출산 전의 여러 증상, 산모의 간증(癎症), 산모의 번열증, 산모의 붓는 증상, 산모의 임질, 산모의 이질증(痢疾症), 산모의 학질(瘧疾), 산모가 기침하는 증상, 산모의 태기가 가슴에 차오르는 병증, 산모의 감한증(感寒症), 산모가 말하지 못하는 증상, 태아가 뱃속에서 우는 것을 고치는 법, 출산 후에 어지러운 증상, 출산 후에 피가 흐르는 증상, 산후 코에 피나는 증상, 산후에 숨이 찬 증상, 산후에 딸꾹질하는 증상, 산후에 말 못하는 증상, 산후에 열나는 증상, 산후에 젖이 늘어지는 증상, 산후에 음문이 나와 들어가지 않는 증상, 산달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증상, 해산 후 젖을 나오게 하는 법, 산달에 미리 장만해 둘 약, 산도(産圖) 붙이는 방법, 안산(安産) 방향과 태반을 간직하기 좋은 방향, 아기 낳을 때 비는 축문, 달마다 도는 태살의 소재, 갓 태어난 소아의 구급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언해태산집요』
내용과 체제에서 임신 및 출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급한 상황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의학적인 이론을 배제하고 임상내용만을 수록한 실용의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태산요록』과 마찬가지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 『득효방(得效方)』 , 『소문(素問)』 등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태산요록』이 편찬된 이후 간행된 명나라 의서 『의학정전(醫學正傳)』(1515)과 『의학입문(醫學入門)』(1575)이 추가 인용되어 당대의 최신의학을 반영하였다. 『언해태산집요』는 이후 간행된 『동의보감』「잡병편」내의 「부인문」과 유사하여 시기상 『동의보감』의 모본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중기 이후 양대 국란을 통해 인구 확대의 중요성과 민생과 직결되는 의학지식의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향약의 장려, 종합의서 및 각종 전문분과의서 편찬, 부인과 및 소아과 학문의 육성 차원에서 전문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해본 의서의 간행을 통해 점진적인 의약지식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대부가 남성의 4대 서목(書目) 중 하나인 『동의보감』의 의학지식이 민간에 확산되어가고, 여성 고유의 영역인 임신・태교・출산 및 가정 내 의약이 여성 지식인에 의해 고증과 실증을 거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산과전문의서가 저술되기 시작하였다.
민간 사대부가의 가정의학서 저술
조선 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향촌 생활에 필요한 생활지식과 의학적인 내용들이 수록된 저서들이 증보ㆍ간행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어숙권의 『고사촬요(攷事撮要)』(1554), 서명응의 『고사신서(攷事新書)』(1771),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18세기 초반, 미간행),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9세기 초반, 미간행) 등을 들 수 있다. 총 113권 52책으로 구성된 『임원경제지』는 양반 사족의 전원생활에 필요한 약물 및 본초학 지식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 최대 전서라고 할 수 있다.

800여종의 문헌을 인용한 『임원경제지』는 16개 부문으로 나눠져 있는데 의학에 관한 것은 「인제지(仁濟志)」와 「보양지(葆養志)」에 수록되어 있다. 「인제지(仁濟志)」(권60~87)는 내인(內因), 외인(外因), 내외겸인(內外兼因), 부과(婦科), 유과(乳科), 외과(外科) 등에 대한 질병 치료가 주로 서술되어 있고, 끝부분에는 260종의 구황식품(救荒食品)이 수록되어 있다. 「보양지(葆養志)」(권52~59)에는 도가적인 불로장생의 신선술과 식이요법, 정신수도, 육아법과 계절에 따른 섭생법을 수록하여 당대 풍부한 양생술과 산과전문의학지식을 엿볼 수 있다.
서유구의 조부 서명응(徐命膺)은 흔히 북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지며, 박물학 총서인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1845)를 저술하였다. 그의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져 아들 서호수(徐浩修)는 농학서인『해동농서(海東農書)』(18세기 후반)를, 손자인 서유구(徐有榘)는 생활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9세기 초반)를 저술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를 저술한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는 서유구의 형수로 실학정신의 계승과 박물학 총서를 저술한 시가(媤家)의 가풍이 빙허각의 학문관과 저술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전문태교서 『태교신기(胎敎新記)』(1801)
사주당 이씨는 62세 되던 1800년(정조 2)에 자신의 네 자녀를 기르며 얻은 경험과 기존 의서에서 뽑은 지식을 종합하여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하였다. 사주당은 남편의 학문적 지지와 교감 속에서 경전과 사서를 익히며, 많은 책들을 모아 의서에서 귀감이 될 만한 속설까지도 버리지 않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에 큰 관심을 두었다. 아들 유희(柳僖)는 발문에서 어머니 사주당이 옛 성현들의 기거ㆍ음식ㆍ모든 예절과 의서에서 임신부의 금기를 모으고, 말미에 경전에서 어린아이를 가르칠 만한 글귀를 붙여 후에 아버지 유한규(柳漢奎)가 손수 책의 제목을 『교자집요(敎子輯要)』로 지었다고 밝혔다.

『태교신기』의 저본이 되는 『교자집요』는 유한규가 사망하고 20여년이 지난 후 사주당이 넷째 딸 상자 속에서 이 책을 발견하여 탄식하였다고 한다. 사주당은 세상 사람들의 의혹을 가르쳐 일깨우라는 바램에서 ‘말미에 붙은 것을 삭제하고 ‘태 기르는 방법(養胎節目)’만 따로 떼어내어 「소의(少儀)」와 『내칙(內則)』에 빠진 것을 보충하여 저술하였다고 한다. 유희는 책이 완성된 후 이듬해 사주당의 글을 장(章)과 절(節)로 나누고 음의(音義)를 해석하여 한글본 『태교신기』(1801)를 완성하였다. 이후 1938년에 사주당의 고손자인 유근영에 의해 경북 예천에서 석판본이 처음 간행되었고, 1932년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여자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되는 등 사주당의 태교지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태교신기』는 태교에 대한 이론과 실증을 토대로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태교의 원리와 중요성, 부모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제2장은 태교의 효과, 수태 시 환경의 중요성, 제3장은 태교에 힘써야 하는 이유와 산모의 금기행위, 제4장은 태교의 방법, 제5장은 태교의 요점, 제6장은 태교를 하지 않아 생기는 폐해, 제7장은 산모의 바른 마음가짐, 제8장은 부모의 태교 강조, 제9장은 태교의 이치를 증명하는 실례, 제10장은 태교의 근본과 교육을 강조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태교신기』
사주당은 부모의 열 달 기름과 하루 낳는 것이 태교의 출발점으로 인식하였다. 몸과 마음가짐에 대한 삼감[謹], 성품과 기질은 부모로부터 본받기 때문에 부모의 태중 교육이 후천적인 스승의 교육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주당의 태교론에 대한 인식의 기저에는 그녀가 『태교신기』에서 인용했던 서적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태교신기』에서 인용한 문헌은 총 20여종으로 『시경(時經)』, 『예기(禮記)』, 『논어(論語)』, 『열녀전(列女傳)』, 『의학입문(醫學入門)』, 『수세보원(壽世保元)』, 『상서(尙書)』, 『대대례(大戴禮)』, 『여사서(女四書)』, 『학교모범(學校模範)』, 『안씨가훈(顔氏家訓)』, 『태산요록(胎産要錄)』, 『천금방(千金方)』, 『성제총록(聖濟總錄)』, 『의학정전(醫學正傳)』, 『득효방(得效方)』, 『장자(莊子)』, 『대학(大學)』, 『격치여론(格致餘論)』, 『전국책(戰國策)』, 『신서(新書)』등의 순으로 인용되었다.

이처럼 경서, 사서, 규범서, 교육서, 가훈서, 의학서 등 다방면의 서적이 인용되었고, 중국 고대 의서에서부터 명대(明代) 의서, 『태산요록』을 망라하여 총 8종의 의학서를 참고하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의학과 당시 민간의 임신・태교지식이 사주당의 고증과 실증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산과전문의서로 지식 체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주당은 태교의 근본원리를 산모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태아가 감응하여 닮고 배우게 된다고 여겼다. 산모의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물론 산모를 대하는 집안사람 모두의 공동노력을 강조하였다. 또한 산모의 과중한 노동, 정신적인 스트레스, 산모가 한가롭고 태만하게 지내며 너무 오래 누워 잠자는 행위, 임신기간 중 성생활에 대한 금기, 산모에게 침과 뜸, 탕약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금기, 음식에 대한 금기 및 권장 등은 주로 『태산요록』에 근거하였다. 인용문헌 가운데 속신적인 임신・태교지식의 선택적인 배제와 민간에서 행해지는 무격신앙을 배격하는 등 그녀만의 태교관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어 전통 한의학에서 강조하는 의학이론이 여성지식인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잘 보여준다.
임신・태교・출산 지침서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의 탄생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빙허각 이씨가 1809년(순조 9)에 저술한 가정생활백과전서이다. 평양감사 이창수(李昌壽)의 딸로 어머니는 『언문지(諺文誌)』의 저자 유희의 고모이다. 사주당이 빙허각의 외숙모가 된다. 빙허각은 『임원경제지』의 저자 풍석 서유구(徐有榘)의 형 서유본(徐有本)에게로 출가하였는데, 두 집안 모두 당시 유명한 실학 가문이었다. 사주당이 『태교신기』를 저술하자 빙허각이 발문을 지어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남편 서유본 역시 기하학, 역학, 수학, 명물학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 빙허각이 『규합총서』를 저술할 때 서유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규합총서』는 「주사의(酒食議)」, 「봉임칙(縫紝則)」, 「산가락(山家樂)」, 「청낭결(靑囊訣)」, 「술수략(術數略)」등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술과 음식, 바느질, 길쌈, 병 다스리기, 방위 및 여러 환란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기록하였다.

빙허각은 『규합총서』를 저술하면서 집안의 안주인의 역할을 의식주와 살림지식 뿐만 아니라 가정 내 건강과 의약지식까지 관장하는 주체로 보았다. 가정의약 지식이 수록된 「청낭결(靑囊訣)」 편은 태교와 육아, 구급방, 벽온방, 벽충방, 잡방, 약 제조, 우리나라 팔도에서 나는 유명한 약재와 경험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조문을 보면 태교 항목이 가장 첫 구절로 시작하여 임신 중 삼갈 일, 음식 금기, 약물 금기, 태(胎)를 안정시키는 경험방, 너 덧 달 뒤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내는 방법, 날 달 못 되서 딸을 사내로 만드는 법, 태살 금기, 달[月]로 노는 태살 있는 데, 십이지(十二支) 일유태살(日遊胎殺), 방 안에 날로 노는 귀신 있는 곳, 순산, 포의불하(胞衣不下) 외 경험신방, 산후 목이 타거든, 복통과 잡증에 삼 가르기, 동자(童子) 장수경(長壽經), 난산하여 즉시 울지 못하거든, 탯줄 갓 떨어졌을 때, 연생제일방(延生第一方), 장태법(藏胎法), 안산(安産) 장태(藏胎)의 길방(吉方), 어린 아기 처음 젖 먹일 때, 아기 옷, 아기 기르는 열 가지 중요한 법, 아기 뉘는 법, 소아사주(小兒四柱) 살성법(殺星法), 아기 상(相) 보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구급법, 물린 데 치료법, 여러 가지 잡방, 벌레 없애는 법, 우리나라 팔도에서 나는 특산물, 경험방 등이 다양하게 기재되어 있다.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소장 『규합총서』
『규합총서』에서 주로 인용한 의학문헌은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본초강목』, 『부인양방대전』, 『의학입문』, 『득효방』 등이며, 가장 가까운 시기에 저술된 『산림경제』와 『증보산림경제』 또한 인용횟수가 많다. 그러나 『산림경제』와 『증보산림경제』의 의학적 내용은 『동의보감』에 근거하였고, 『동의보감』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원 출처가 『예기(禮記)』와 송대(宋代) 부인과 전문의서인 『부인양방대전』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의서의 유입과 간행을 계기로 조선사회에서 오랫동안 중국의 산과의학지식이 고착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산과(産科)를 비롯한 종합의학지식은 『동의보감』으로 집성되어 조선 후기 민간에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주당과 빙허각은 자신의 학문관 내지 의학관에 따라 산과전문의학지식의 수용양상에 차이를 보인다. 사주당은 고증과 실증을 통해 자신의 시각에서 실용지식을 선택적으로 가려내어 『태교신기』에 수록했다. 반면, 빙허각은 『규합총서』에 여러 인용문헌에 나타난 의학적인 내용을 가감없이 대부분 수록하며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처럼 민간의 실생활에서는 여성 지식인에 의해 산과의학지식이 탈락과 계승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발화되고 있었다.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