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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고 소장 국문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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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고 소장 국문시가 개관
동양문고 소장 국문시가 자료는 대부분 마에마 교오사쿠[前間恭作 : 1868-1942]가 수집하거나 전사하여 동양문고에 기증한 것들이다. 마에마 교오사쿠는 조선의 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국문시가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고시조 집성집 『교주가곡집(校主歌曲集)』을 간행한 바 있다. 마에마 쿄오사쿠가 특별히 시조집에 집중해서 자료를 수집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교주가곡집』을 편찬하고 손진태와 주고받았던 엽서와 편지를 보면 국문시가의 대표 장르라 할 수 있는 시조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동양문고 소장 『가곡원류』
동양문고에 소장된 한국 자료 가운데 국내에 가장 먼저 소재된 것은 국문시가 자료이다. 1920년대 후반 손진태(孫晉泰, 1900-?)와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일부 자료를 전사하여 국내로 들여오면서부터이다. 손진태는 1925년부터 동양문고를 드나들면서 일본으로 유출된 고시조 문헌을 본격적으로 접할 기회를 얻었고 이은상과 함께 1927년 6월에서 1928년 5월 사이에 마에마 교오사쿠의 협조를 얻어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던 국문시가 자료를 집중적으로 전사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남창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가곡원류』와 『남훈태평가』, 『송강가사』, 『가사육종』, 『고금가곡』, 『여창가요록』이 그것이다. 이 전사본들은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조윤제(趙潤濟, 1904-1976)에 의해 재 전사되면서 고전시가 연구의 기초 자료로 널리 활용되었다. 이후 『가요』, 『만언사』, 『고금가곡』 전사본 등이 간헐적으로 소개되어 고전시가 연구에 활용되었으나 아직까지 동양문고 소장 국문시가의 전체 소장 규모가 파악된 바는 없다.

동양문고에 소장된 국문시가 자료는 대부분 악장, 시조, 가사 자료이다. 악장 5종, 시조집 8종, 가사집 5종 등 총 18종으로 결코 양적으로 많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가곡원류』와 『남훈태평가』와 같이 시가사적으로 비중이 만만치 않은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시조집이 8종이나 되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18, 19,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집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가곡창 가집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시조창 가집도 2종이나 된다.
동양문고 소장 『가요』
동양문고 소장 국문시가 자료의 개별적 특성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금가곡』의 경우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던 마에마 쿄오사쿠의 전사본이 소개되면서 연구가 촉발되었고 이후 원본이 발굴되면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단독 여창 가집으로서의 동양문고본 『여창가요록』의 위상이 온전하게 파악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가곡원류』에 대해서는 최근에 주목할 만한 성과들이 제출되고 있지만 초기본으로서의 동양문고본의 특성과 위상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할 실정이다. 『가요』에 대한 논의도 한 편에 불과하다. 『가사육종』에 대한 논의는 이제야 시작되었다. 동양문고 소장 자료는 우리에게 알려진 자료도 있었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전사본 혹은 2차 복사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시조집 소개
〇 가곡원류(歌曲源流)
『가곡원류』는 본디 2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첫 1책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곡 한바탕 중 남창 계면(界面) 삼삭대엽(三數大葉)까지만 수록되어 있고, 사설 454수가 살려 있다. 『가곡원류』는 46장(표지 포함)인데, 내지 첫 면에는 원소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서인이 거듭 네 번 찍혀 있으나 해독이 쉽지 않다. 이 장서인은 셋째와 다섯째 면에서도 세 군데나 확인된다. 이와 함께 마에마 쿄오사쿠의 정서인인 “在山樓蒐書之一”이 찍혀 있고 본문의 맨 마지막 면에는 그의 영문 장서인인 “K. Mayema”가 보인다.
동양문고 소장 『가곡원류』 장서인
동양문고본은 『가곡원류』 계열 18종 가운데, 육당본, 프랑스본과 함께 초기본 계열에 속하는 가집이다. 육당본은 원전이 소실되었고 현재 1929년 등인본(謄印本)이 남아 있다. 프랑스본은 단순 재 필사 과정의 오류 흔적들을 곳곳에 남기고 있어, 적어도 한 번 이상 재 필사된 가집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동양문고본은 단순 재 필사가 아니라, 첫 편집과정에서의 수정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동양문고본은 초기본 계열 3개 이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동양문고 소장 『가곡원류』 중거(中擧)
또한 육당본과 프랑스본은 계면조 부분에서 새로운 파생곡 ‘중거’와 ‘평거’의 배분을 미처 완성하지 못해, 이를 “界 中擧 附平頭”라는 악곡명으로 묶어 편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묶어놓은 작품들 상단 여백 곳곳에 분류에 맞는 악곡명을 메모해 놓았다.

그에 비해 동양문고본은 이 두 악곡의 작품 분류를 제대로 완성해 놓았다. 이는 육당본·프랑스본의 최초 편집이 다시 동양문고본으로 정리되었음을 말해준다. 동양문고본은 초기본에서 악곡과 작품간 분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어갔는지 그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가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양문고본의 필체가 박효관·안민영이 1872년 완성한 『가곡원류』(국악원본)의 필체와 매우 흡사하여 동일한 인물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동양문고본과 국악원본의 필체는 매우 단정하고 유려한 해서체로, 전문 필사자의 글씨로 보인다. 이처럼 초기본과 완성본이 거의 동일한 필체라는 사실은 『가곡원류』가 편집되는 수 년 동안 전문필사가가 계속 동원되었음을 시사한다.
〇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남훈태평가』는 방각본 가집을 필사한 가집이다. “明治二十五年二月六日在韓京客舍畢功 玄界庵主”라는 필사기로 미루어 1892년 서울에서 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에마 쿄오사쿠가 1891년 경응의숙을 졸업하고 한국에 유학생으로 온 직후에 필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동양문고 소장 『남훈태평가』
방각본 『남훈태평가』를 재필사한 가집으로는 이외에도 『남훈전태평가』(여태명 소장), 『남훈태평가』(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남훈평가(권지하)』(권순회 소장)이 있다. 방각본을 충실하게 필사하였는데 필사 후 앞에 작품 목록을 붙였고 “在山樓蒐書之一”라는 장서인을 찍었다. 그리고 다른 가집에 수록된 사설과 대교하여 붉은 글씨로 한자와 사설이 다른 부분을 표시하였는데 이는 필사 후 다른 가집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방각본『남훈태평가』와 같이 사설 시작 부분에 “낙시됴 롱 편 송 소용 우됴 후정화 계면 만수엽 원사청 잡가 가사” 등의 악곡 목록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사설을 수록한 부분에서는 악곡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낙시됴” 항목 아래 시조 224수를 모두 실었다. 사설은 줄글 형식으로 수록되었고 방각본과 달리 장을 구분하는 구점은 보이지 않는다. 종장 마지막 음보는 방각본 『남훈태평가』와 같이 필사되어 있다. 잡가편에는 「소츈향가」, 「매화가」, 「백구」가 수록되어 있다. 가사편에는 「츈면곡」, 「상사별곡」, 「쳐사가」, 「어부사」를 수록하였는데 「츈면곡」, 「상사별곡」, 「쳐사가」3편은 방각본과 달리 4음보 단위로 행을 구분하여 필사하였다.
동양문고 소장 『남훈태평가』 간기와 필사기
가집의 끝에는 ‘癸亥石洞新刊’이라는 방각본 간기가 필사되어 있다. 『남훈태평가』는 여러 차례 재판본이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癸亥石洞新刊”이라는 간기가 명확하게 판각된 것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광문회장본,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소장본, 그리고 프랑스 파리동양어문고소장본 3종이다. 이들은 동일 판본으로 1863년에 판각된 초간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집을 필사할 때 모본으로 활용했던 가집도 이 계열로 판단된다.

한편 색인 목록을 보면 붉은 글씨로 총 66곳에 “歌曲”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보인다. 이는 『가곡원류』와 공출하는 작품을 표시한 것이다. 또 본문에는 순한글로 표기된 옆에 붉은 글씨 혹은 파란 글씨로 한자를 병기하고 또 어떤 부분에는 사설을 적어 놓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가집과 비교하여 사설이 다른 부분을 표시한 것이다. 이 부분은 본문의 필체와 달라 마에마 쿄오사쿠가 추후에 첨록한 것으로 보인다. 마에마 쿄오사쿠가 이 가집을 입수한 후 자신이 소장했던 『가곡원류』 동양문고본과 대교한 결과를 표기한 것이다.
〇 『가요』
『가요』는 총 29장(표지 포함) 필사본 1책의 소규모 시조창 가집이다. 시조 사설 99수와 함께 십이가사 「상사별곡」, 「춘면곡」, 「구」가 수록되어 있다. 원본의 마이크로필름 사본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조는 국한문혼용으로 필사된 반면에, 가사는 순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서발문이나 여타 악곡 정보가 전혀 없다. 사설이 시작하는 부분의 상단에 마에마 교오사쿠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

이 가집의 필사 연대는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원소장자였던 마에마 교오사쿠가 『古鮮冊譜』에서 ‘光緖 癸巳年(1893)’에 필사된 가집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 지질의 상태 등으로 미루어 189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동양문고 소장 『가요』
첫 장을 보면 붉은 글씨로 작품 목록이 추록되어 있다. 또한 『남훈태평가』와 『가곡원류』와 대교한 후 공출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사설 위에 붉은 글씨로 “南”(37수), “源”(13수)이라는 표시를 하였고, 두 가집 간에 사설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해당 부분에 붉은 글씨로 그 내용을 첨록한 부분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마에마 교오사쿠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시조창 대표 가집인『남훈태평가』와 대교한 후 다시 가곡창 대표 가집인 『가곡원류』와의 비교를 통해 가집의 특성을 파악하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가곡원류』(동양문고본)의 경우 여창 부분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공출 작품수가 13수에 불과하였고, 이를 근거로 『가요』를 『남훈태평가』와 친연성이 높은 가집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요』는 대표적 시조창 가집인 『남훈태평가』보다는 오히려 『가곡원류』 여창과의 작품 공출이 두드러진다. 공출 작품 수가 『남훈태평가』와는 34수인데 반해 『여창가요록』(양승민본)과는 61수, 『여창가요록』(동양문고본)과는 63수나 된다. 『가곡원류』(국악원본)과는 남창 28수, 여창 63수, 총 91가 공출하는 데, 이 가운데 남창 21수는 여창과 중복되는 것이어서 실제 공출 작품은 70수이다. 공출 작품 대부분이 여창 사설인 셈이다. 사설의 내용 층위에서. 애정과 관련된 작품이 99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55수나 된다. 이 역시 여타 시조창 가집과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요』가 여창 가곡의 영향권에서 산출된 가집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로 보아 『가요』는 『남훈태평가』와는 다른 계열 특성을 보여주는 가집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 시조창의 연행 양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〇 『녀창가요록(女唱歌要錄)』
『여창가요록』은 1870년에 편집된 단독여창가집으로 박효관과 그 주변인물들이 최근에 발굴된 양승민본 『여창가요록』을 저본으로 재편집한 가집이다. 양승민본이 발굴되기까지 『여창가요록』의 先本으로 평가되던 가집이다. 표지를 제외한 총 면수는 33장(표지 포함)이다. 182수가 수록되었다. 사설 전문을 순국문으로 표기했을 뿐만 아니라 악곡명도 순우리말식 명칭을 취하였다.
동양문고 소장 『여창가요록』
중대엽을 제외하고 모든 사설에 연음표(連音標)가 붙어 있다. 마지막에 ‘계락’에 빠진 사설 한 수를 권 말에 추록하였다. 한 사람에 의해 저본을 대상으로 일관되게 필사된 가집임을 말해준다. 권 말의 “庚午仲春望間愚泉試”라는 간기를 보면 ‘설봉(雪峰)’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우천(愚泉)’을 다시 쓴 흔적이 보인다. 이로 보아 1870년에 편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악곡 목록을 보면 저본인 양승민본보다 세분되어 있다. 무엇보다 양승민본에서 명목을 얻지 못하고 사설만 수록되었던 ‘중거’, ‘평거’, ‘두거’가 이제 완전히 한바탕의 목록 안에 악곡명과 함께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양승민본에서는 보이지 않던 연음표를 추가하여 좀 더 연창의 실질에 다가갔다. 양승민본과 대교해보면 사설의 수록 순서는 대부분 일치한다. 양승민본 157수 가운데 2수를 배제하고 155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27수를 추가하였다. 추가된 사설은 안민영 등 박효관 주변 인물들의 작품이다. 이후 동양문고본은 『가곡원류』 여창의 편집 과정에서 저본으로 활용되었다. 『여창가요록』은 1928년 5월 동경에서 손진태에 의해 전사된 바 있다. 현재 전사본이 서울대학교 남창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〇 『고금가곡(古今歌曲)』
주제별 분류 가집으로 유명한 『고금가곡』은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 1869-1943]가 소장했던 가집으로 그 동안 원본의 행방이 묘연했었다. 최근에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마이크로필름 사본을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동양문고본 『고금가곡』은 마에마 쿄오사쿠가 아사미 린타로에게 원본을 빌려 1928년에 전사한 것이다. 현재 『고금가곡』 전사본은 동양문고본, 남창본, 남창본을 재전사한 가람본과 도남본 4종이 전하는데 한시 사부나 과체시를 생략하고 국문시가를 중심으로 전사한 남창본과 달리 동양문고본은 전사본 가운데 유일하게 완질을 전사한 판본이다. 장가를 수록한 부분을 상권으로 短歌를 수록한 부분을 하권으로 분리하여 2책으로 전사한 것도 다른 전사본과 다른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해제를 작성하여 전사본의 말미에 첨부하였다.

“『고금가곡(古今歌曲)』”이라는 가집명도 전사 과정에서 손진태와 마에마 쿄오사쿠가 상의하여 붙인 것이다. 원본에는 제명(題名)이 결락되어 있다. 동양문고본 표지에는 “一壑松桂一里烟月編抄 失題寫本 古今歌曲”, 손진태가 전사한 남창본에는 ‘古今歌曲集(失名擬題)’이라고 적혀 있는데 “古今歌曲”이라는 假稱은 손진태와 마에마 쿄오사쿠가 編抄者의 자작 시조 “늘거지니 벗이 업고 눈 어두워 글 못 볼싀 / 古今歌曲을 모도와 쓰 은 / 여긔나 興을 브쳐 消日코져 노라”에서 취하여 부여한 것이다.
동양문고 소장『고금가곡』 전사본
동양문고 소장 시조집의 가치
시조집들은 초장기 고시조 연구에서 매우 귀중하게 활용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후반 동양문고와 그 주변 인물들이 소장했던 국문시가 자료에 대해 집중적인 전사가 이루어진다. 손진태는 1927년 6월 이은상과 함께 『가곡원류』와 『남훈태평가』를 전사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1월 25일에는 『송강가사』를 전사하였다. 1928년 2월에는 『가사육종』을 전사한 후 3월에는 이은상에게 『고금가곡』을 轉寫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다시 『여창가요록』을 전사하였다. 이 가운데 『송강가사』, 『가사육종』이 포함되어있기는 하지만 전사의 초점은 시조집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손진태는 시조 문학을 오직 한국 사람만이 가진 넓은 세계를 통하여 다만 하나 밖에 없는 보물이라고 평가하고 이 보물은 오로지 한국 사람만의 보물이 아니요 전 인류의 역사적 보물이며 장래에는 반드시 전 인류의 보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시조 외에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무슨 문학을 가졌겠는가라고 반문한 바 있다.

시조를 조선의 국민문학으로 인식했던 최남선 등 초창기 국문학 연구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손진태는 가사는 한문 취향이 농후하고 현학적이라고 하면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1920년대 고시조가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재인식되면서 조선 후기 필사본 가운데 중요한 가집들을 전사하거나 등사 혹은 활자본으로 간행하여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는 사례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청구영언(육당본), 해동가요(주씨본)을 간행한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손진태 이은상이 동양문고 소장 가집들을 집중적으로 전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관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진태는 자신이 전사한 자료와 동양문고에 소장된 『청구영언』, 『해동가요』를 바탕으로 1929년 고시조 선집인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을 편찬한다. 시조 558수를 선별하여 장가(사설시조)와 단가(평시조)로 나누고 이를 다시 주제별, 작가별 체계에 맞추어 새롭게 편집하였다. 그는 전사를 통해 대략 2천여 수의 시조 작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4분의 1만 선별하여 『조선고가요집』 편찬에 활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고전시가를 일본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일본어로 번역해서 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체의 전례를 깨고 사설시조와 무명씨 작품을 전면에 배치한 점이 이채롭다. 이는 시조가 가지고 있는 조선적인 정서와 가치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고심의 결과이다. 이들은 대부분 俗謠에 가까운 내용을 가진 작품들로 이 가운데 중국적 사상과 감정에 물들지 않은 조선 고유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손진태는 조선의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독서교양물 형태로 재구성하여 가곡의 선율에 익숙하지 않던 일본인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로 『조선고가요집』을 편찬했던 것이다.

마에마 쿄오사쿠는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고시조 집성집 『교주가곡집(校主歌曲集)』을 편찬하였다. 『교주가곡집』은 전집 8권, 후집 9권 총 17권 17책으로 편집되었고 시조 1,745수, 가사 37편, 잡가 7편을 수록하였다. 전집과 후집을 망라하여 무명씨 작품인 유전편과 유유명씨 작품인 작가편으로 나누고. 유전편은 곡조에 따라 분류, 배열하였으며, 작가편은 작가명과 간단한 약전을 든 다음에 그 작품에 해당되는 곡조명을 표시하고 기록하였다.
가곡색인
마에마 쿄오사쿠가 『교주가곡집』 편찬에 활용한 가집은 『가곡원류』와 『남훈태평가』, 『송강가사』, 『가사육종』, 『고금가곡』, 『여창가요록』, 『가사육종』, 『가요』, 『정선조선가곡』, 『時調類聚』, 『大東風雅』 등이다. 김교헌(金喬軒)이 편찬한 『대동풍아』와 최남선이 편찬했던 『시조유취』(1928)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이 수집했던 자료를 활용하였다. 『교주가곡집』은 문헌간 수록 작품을 대교하여 이본 관계를 밝히고 작품마다 출처를 밝힌 대교의 방식으로 편집된 최초의 고시조 집성본이다. 물론 문헌수가 많지 않아 전면적인 대교본으로서의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고시조 문헌 집성에서 처음으로 이본간 대교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이를 위해 마에마 쿄오사쿠는 작품을 일일이 대교하면서 색인카드를 작성했던 것 으로 파악되었다. 최근에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된 『가곡색인』이 그것이다. 색인카드를 보면 새로운 작품이 발견될 때마다 작품 색인을 만들어 추가해나갔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방대한 색인 정보를 바탕으로 『교주가곡집』이 편찬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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