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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학서 출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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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의학서의 등장
10세기 경 동아시아에서 종이의 대량 생산과 인쇄술의 비약적인 발달에 힘입어 집안에서 혹은 의료인들 사이에서 비전(秘傳)되어 오던 의학기술은 책이라는 형태로 공개되고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책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기록이란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으나 책이 보편화된 후로는 책 자체가 사회문화와 기술개발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출판, 보급 그리고 그 책을 보관하고 활용하는 것은, 최근 디지털이 종이를 대체하기 전까지의, 우리 인류문명의 중요한 문명 전승의 과정이었다.
고대의 여러 기술 문명 중에서 인간의 생명과 질병 치료에 관한 의학서적의 이용은 여느 분야보다 활발했다. 최고의 기술, 최신의 기술을 기록으로 남겨 전파하려는 욕구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아시아 문화권이 의학 용어와 이론, 약재이용과 치료기술의 운용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통의 발전 지향점을 같게 된 것도 책을 통한 의학지식의 보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책을 통한 의학지식의 보급 즉 의학서는 다방면에서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생산과 보급 그리고 이용 등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의료정보를 취합하고 배급하는 데이터베이스급의 의학서를 출간하는가 하면, 의학지식의 표준화를 위한 의학서의 출판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의학서 중에서 가장 활발했고, 정식 출판에서 필사본 형태까지, 여러 권 분량에서 몇 페이지짜리 작은 메모 형태의 책자까지 주로 소개한 내용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였다.
10세기에서 15세기까지 동아시아 의학은 의료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는 것이 대세였다. 질병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약재 및 침구술에 대한 인프라가 갖추어지면서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시도가 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학기술은 책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동아시아 의학 컨텐츠를 꾸준히 쌓아가고 있었다. 중국의 『보제방(普濟方)』, 조선의 『의방유취(醫方類聚)』는 그러한 의료정보의 총합을 국가가 주도하여 출판한 형태이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서 정도 이상의 의료정보는 임상치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번잡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반작용으로 보다 집약된 형태의 의학서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대학교에 소장된 의학자료는 모두 이 시기의 간명화된 의학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의 의학서는 그 형태에 따라서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구별한다. 대표적인 금속활자본은 1477년에 간행된 266권 규모의 『의방유취』가 있고, 목활자본으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이 있다. 이미 13세기에 금속활자 조판 기술이 나왔지만, 금속활자는 그 역사적인 의의만큼 보편화되지는 못했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가장 보편적이었던 인쇄는 목판본에 의한 것이다. 의료분야에서는 목판본 이상으로 필사본들이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목판본은 제작 공정이 간편했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문서가 아니라 지방정부에서 혹은 민간에서 보급을 위해 출판할 경우에는 대부분 목판본의 형태를 사용하였다.
의료에서 더 중요한 서적은 필사본의 형태로 된 것들이다. 유통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책의 내용에서 유용한 의료 정보를 필요한 만큼 베껴서 보관하거나 혹은 자신이 경험한 유용한 의학기술을 기록해서 보관하는 것은 고대사회에 일상적인 일들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환자 혹은 의사의 입장에서 정리해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혹은 책을 내기 위해서 준비해 둔 필사본이 결국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가 전해지는 경우도 많다. 어떤 경우에라도 의료에서의 필사본 형태의 의학서는 내용적인 면에서 여전히 연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전염병과 구급의료 전문의학서
의학의 발달에서 국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관료중심사회였던 조선은 그러한 경향이 더 강했다. 역성혁명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조선은 개국초기부터 국가가 주도적으로 의료에 관여하였다. 국내에서 나는 약재의 생산과 재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1433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국산 약재를 기반으로 하는 치료기술 종합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 후인 1477년에는 중국과 조선의 의학서를 총망라하는 데이터베이스급의 의학서를 출간하게 된다. 이러한 대규모 의학서의 출간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질병과 치료에 관한 정보를 국가가 주도해서 위급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벽온방』, 『구황촬요』, 『식물본초』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용도에 맞게 내용을 추려서 간행한 것들이다. 『벽온방』은 주로 당시에 유행했던 전염병 치료법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펴낸 것이다. 『구황촬요』는 백성들이 흉년 등으로 기아에 처했을 때 식량을 대신할 수 있는 자연식품을 어떻게 채취하고 섭취하느냐를 말해주는 지침서이다. 『식물본초』는 말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食物]’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음식 종류와 약재 종류가 모두 포함된다. 국가가 의료를 주도하긴 하였지만 일반인을 위한 구료시설이나 의료행정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중세 사회에서 일반인에게 약이 되는 음식과 일상에서 전문가의 지도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약재에 대한 정보를 책의 형태로 제공하기 위해서 만든 준의학서에 해당한다.
『광제비급향약오십종치법』은 필사본으로 된 책으로, 『광제비급』(1790)에 실린 국내산 약재에 대한 내용을 후대의 누군가 베껴서 정리한 것이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에 대한 목록과 그 약재들이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의 보급을 통해서 국가는 간접적으로 국민들의 의료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였고, 일반국민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꾸준한 재생산을 통해 질병의 치료에 대한 노하우, 의학에 대한 지식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부인과 소아 전문의학서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광제비급향약오십종치법』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독립한 분과로 부인과와 소아과를 들 수 있다. 영아 사망율이 높았고, 출산과 관련된 여자들의 질병과 사망율이 높았던 시기에 그만큼 노동력의 확보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의학도 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필사본의 형태로 전해지는 『보산총론』은 출산을 앞둔 여자가 무엇을 주의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산모와 태아가 모두 건강해지는가에 대한 일종의 지침서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아과 전문의로는 『급유방(及幼方)』(1689)을 지은 조정준(趙廷俊)을 꼽는다. 『급유방』은 소아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대표적인 증상과 치료법에 대한 일종의 소아과질환 종합의서인데, 이 외에도 동아시아 의학의 거의 모든 의학서에는 소아의 질병과 치료에 대해 전문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질병으로는 두창, 즉 천연두에 대한 내용이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에는 이미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옷가지 등을 이용하는 인두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천연두의 증상이 진행하는 단계에 따른 약물치료법 위주이다. 천연두에 대한 전문서는 19세기 후반까지도 계속 등장했는데, 『두진정의록』과 『두창경험방』은 그러한 맥락에서 저술된 의학서이다. 『두창경험방』은 천연두 전문의사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던 박진희(朴震禧)의 저술로 1663년에 처음 목판본의 형태로 출판되었으며, 버클리대학교에 소장된 판본은 1711년에 다시 간행한 판본이다.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보산총론』
정조시대의 2종의 걸작 전문의학서
『광제비급』(1790)과 『제중신편』(1799)은 모두 조선시대 정조 때에 나온 조선시대 한국 의학을 대표하는 의학서이다. 1613년에 『동의보감』을 통해 당시 중국 의학의 정수를 집약시켜 정리한 이후, 조선의 의학계는 더 이상 중국에서 들여오는 새로운 의학기술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의보감』에 정리된 의학기술을 임상에서 활용하고 그 내용을 더 정밀하게 하는 데 주목하였다. 그러한 일관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광제비급』과 『제중신편』이 출간되었다. 『광제비급』은 평안도 벽지의 의사였던 이경화(李景華)가 『동의보감』의 내용 중에서 무의촌의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간편하고 구하기 쉬운 약재를 위주로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다. 『제중신편』은 정조의 주치의였던 강명길(康命吉, 1737-1801)이 왕실과 같은 고급 의료 환경에서 『동의보감』이 어떻게 더 진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대표작이다.

이 두 의학서의 연구를 통해 1800년대에 들어 조선의 의학계는 왕실에서부터 궁촌 벽지에까지 『동의보감』의 컨텐츠가 국가의료의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의보감』보다 작은 분량이면서 내용적으로는 더 긴요했던 이 두 종의 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주변 동아시아국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버클리대학교의 『광제비급향약오십종』은 『광제비급』의 내용중에서 국산약재를 기준으로 정리된 내용을 특별히 발췌하여 별도로 써놓은 것이다.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제중신편』
조선의 침구학과 외과술 전문의학서
동아시아의 가장 권위 있는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침구의 기원이 동쪽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우리의 침구술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역사도 있다.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 중에 침구술을 잘하여 일본인 제자까지 둔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 침구술의 발달은 동아시아 주변국에서도 인정할 정도였다. 게다가 조선사회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학자 출신이었던 까닭에 의학서 한 두 종 쯤 독파하지 않은 지식인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대 지도층과 지식층의 의학지식 수준은 매우 높았다.

이들이 특히 즐겨했던 분야는 맥과 침구이다. 복잡한 세상 변화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을 기본 신조로 삼았던 유학자는 우리 몸의 복잡한 기능이 경락이라는 선으로 표현되고 그 선상을 흐르는 기운을 한군데의 맥을 짚어서 파악한다는 개념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의학자는 아니지만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진맥도결(診脈圖訣)』이라는 맥학 전문서를 저술하였다. 버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침경요결』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의학서이다.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던 유성용(柳成龍, 1542-1607)도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졌는데 그는 당시 최신 중국 의학서인 『의학입문(醫學入門)』의 내용을 토대로 『침경요결』을 저술하였다. 『찬도방론맥결집성』은 중국 의학서에 나온 맥에 대한 내용을 조선에서 다시 정리한 것을 허준(許浚, 1539-1615)이 내의원의 수석의사로 있을 때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조선 의학에서 최고의 의사와 의학서를 말한다면 허준과 『동의보감』이지만, 침구분야에서는 허임(許任)과 『침구경험방』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침구술과 중국 의학의 내용을 종합하여 침구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남겼다. 이 책은 일본의 침구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청나라말기 중국에서 나온 『침구집성』이라는 책은 우리나라 『침구경험방』의 표절본이다.

『치종방』은 조선전기에 조선의 대표적인 외과전문의였던 임언국(任彦國)의 의학서이다. 당시의 외과는 지금의 수술이 아니라 종기치료가 위주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종기가 생기면 ‘치종청(治腫廳)’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전문의를 모아 집중적으로 관리를 할 정도로 위중한 질병 중의 하나였다. 치료는 별개로 하더라도 감염을 제대로 조절하기 어려웠던 당대에 종기를 치료하는 것은 매우 신중함으로 요구하는 의학의 전문 직종의 하나였다. 그 여러 종기전문가 중 임언국은 당시 조선왕의 신임을 받은 몇 사람 중 하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의료인을 선발하면서 일반 의사와 침구의사를 별개로 선발하였다. 침구의사는 침구치료와 함께 종기치료에 대한 기술도 습득해야했다.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침경요결』
질병과의 전투, 그리고 보고서
고대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경험일 것이다. 치료원칙과 질병의 기전에 대해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이야기해도 직접 치료해 본 경우가 아니면 신뢰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경험이 많은 의사를 찾는 것과 통용되는 이치이다. “의사가 삼대의 경험을 쌓지 않았다면 치료받지 않는다”는 『예기』의 말처럼 경험은 매우 중요한 의학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료원칙을 정리한 의학서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이 담긴 의학서가 더욱 더 설득력있고 확산력이 큰 편이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학서에는 ‘경험’, ‘경험방’이란 표현이 들어간 예가 매우 많다. 이러한 경험방서들은 『동의보감』 같은 의학서의 내용 중에서 의사로서 혹은 환자로서 자신이 경험한 사례에 비추어 확실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추려서 다시 책의 형태로 출간하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서적은 목판본 같은 정식 출판보다는 필사본의 형태가 많다. 조선후기만 해도 내용은 다르지만, ‘경험방’이라는 보통명사형태의 이름을 갖는 의학서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경험방류의 서적 중에서 『양병심감』은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이것은 환자의 입장에서 오랜 병고의 과정에서 경험한 의학지식을 투박하게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질병과의 오랜 사투, 결국 저자는 그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의 절절한 삶에 대한 애착과 고군분투의 노력은 『양병심감』이라는 책을 통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인이 애독한 중국 의학서
『의학입문』은 1575년 중국의학자 이천(李梴)이 저술한 의학서이다. 유학자 출신인 이천은 병고에 시달리며 의서를 두루 찾아보다가 내용이 번잡하고 계통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의료정보의 계통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이 책에 잘 반영된 듯하다. 십 수 년 후 한국의 허준은 조선의학을 정리하면서 참고가 될 중국의학서를 찾다가 이 책을 발견하였고, 이후 가장 많이 인용된 중국의학서가 되었다. 『의학입문』은 그렇게 해서 조선의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의학입문』은 질병의 발생과 기전에 대한 논리가 자세히 기술되어있다는 점에서 임상현장의 의사들보다는 의학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조선의 식자층의 환영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의학입문은 싯귀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문을 즐기는 식자층의 기호에 더욱 부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동의보감』이 의학서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다음부터 공부는 『의학입문』으로 하고 임상은 『동의보감』으로 한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의학분야에서 상당한 논리를 담은 『의학입문』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면서 실증과 고증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더 이상 중국식자층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조선에서는 여전히 인기였고, 조선왕실이 주도하여 이 책을 다시 간행할 정도였다. 1800년에는 이 책이 의사국가고시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버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학입문』은 조선왕실에서 다시 간행한 판본이다.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편주의학입문』
조선의학의 꽃, 『방약합편』과 『동의수세보원』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의학서, 가장 많이 팔린 의학서를 꼽는다면 단연 『방약합편』(1884)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동의보감』이 조선후기 한국의학의 대표적인 텍스트이기는 하였지만, 분량이 많고 식자층이 아니면 두루 섭렵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동의보감』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실제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서 임상에서 사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분량이 작으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수록한 『방약합편』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실정에 맞게 약재의 내용이나 분량도 조절하였기 때문에, 전문의료인이 없던 곳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동의보감』과 『제중신편』, 그리고 중국의학서에서 가장 실용적인 치료법을 뽑아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문의료인이 아닌 약재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기본적인 의학지식을 습득하는데 이만한 자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의수세보원』(1901)은 우리나라 의학의 특징인 사상체질의학의 창시자 이제마(李濟馬, 1837-1899)가 자신의 체질이론과 치료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동의보감』의 1/20 정도의 적은 분량이지만 지금까지도 『동의보감』 만큼이나 한국의 전통의학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체질의학은 모두 이 『동의수세보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제마 사후에 제자들이 이 책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이제마는 함경도일대에서 의사생활을 했고 그 일대에서 영향력이 상당했다. 지금은 중국 땅인 길림성 연변 일대의 조선족 사이에서 통행하는 조의학(朝醫學)도 기본적으로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