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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금석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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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금석학이 발달하였다. 그것은 서예와 골동 등 취미의 학이 발달한 것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금석학 발달의 제1원인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가계(家系)의 사실 고증과 관련하여 금석 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예로는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선대묘표첩발(先代墓表帖跋)」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선영에 비표(碑表)를 새로 세우고 그 첩(帖)을 만들어 후대에 비고(備考)가 되도록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후, 자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계와 관계없는 금석 자료들을 역사학의 소재로서 취급하게 되었다. 문헌 자료와 금석 자료의 대조라는 실증적 학문방법이 이로써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에 비문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학자로는 홍양호(洪良浩)가 있다. 그의 금석문 취향은 예술적 취향, 서예에의 관심과 관련이 있지만, 또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도 지닌다. 무엇보다도, 그와 교분이 깊었던 신경준(申景濬)이나 신대우(申大羽)가 금석학 관련 저술을 남기지 않았는데 비하여 그는 유독 동국의 역사와 관련된 비문에 관심을 가지고 과안(過眼)의 제발(題跋)을 남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였던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큰 학자들인 완원(阮元, 1764-1849)·옹방강(翁方綱, 1733-1818)·조강(曹江)‧서송(徐松) 등과 교유하였다. 완원은 기초 언어학을 토대로 하는 한학(漢學)을 중시하여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주장하였던 인물이고, 옹방강은 한학과 철학적 이념을 중시하는 송학(宋學)을 절충하여야 한다고 보았던 인물이다. 김정희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고증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되, 고증학의 번쇄한 학문에 갇히지 않고, 개인의 수양이나 경세적 의도, 민족주의 정신의 발양 등 국내의 현실에 맞게 그 방법론을 활용하였다. 김정희는 특히 주자학이 고수하는 격물론(格物論)을 부정하기 위해 청대의 고증학 연구를 이용하였으며, 『소학(小學)』 등 주자학자들이 신봉하는 문헌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위해 고증적 문헌학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상고시대 음운의 재구(再構)와 같은 고증학적 연구의 핵심 분야에서 직접 연구를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증학에서 이루어진 성운학(聲韻學)이나 훈고학(訓詁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방법을 금석학에 원용하였다.

금석학을 전문하지 않았더라도 조선후기의 문인들은 금석문 자료에 대해 고증적 태도를 어느 정도 갖추었다.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제동해비(題東海碑)」를 작성한 태도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眉叟東海碑, 文辭靈異. 然水鏡圓靈一語, 誤用. 考「月賦」註可知." 강세황은 이 짧은 글에서 미수 허목(許穆)의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에 대해 ‘문사영이(文辭靈異)’라는 간결한 평어로 예찬을 하였다. 위진 시대의 논평 방법을 채용한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허목은 67세 되던 1661년(현종 2)에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동해안에 조석간만(潮汐干滿)이 심하여 바닷물이 시가지까지 올라오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늘 홍수 피해로 시달리는 것을 보고는, 신기한 문장으로 이 비문을 짓고 고전서(古篆書)로 써서 삼척포(三陟浦)에 비를 세운 결과,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익(李瀷)은 허목의 전문(篆文)이 두보의 시가 학질 귀신을 내쫓고 한유의 글이 악어를 몰아낸 것처럼 조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홀려 병들었을 적에 (허목의) 그 비문 한 본을 가져다 곁에 두었더니, 귀신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또 가져다 문병(門屛)의 사이에 두었더니, 귀신이 또한 문밖에 그치고 문안을 넘어들지 못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이덕무(李德懋)도 “동해비는 뛰어나고 기이하고 괴상하여 분명한 일대 기작(奇作)이다.”라고 하였고, 이면백(李勉伯)도 「삼척도호부사 이광도에게 부치다(寄三陟都護李廣度)」에서 그 비를 예찬하였다. 허훈(許薰, 1836-1907)은 「동해비주(東海碑註)」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강세황은 「척주동해비문」의 31행-33행에 나오는 “삼오야 둥실 뜬 달, 하늘의 수경되니, 뭇 별이 광채를 감추도다(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문선(文選)』에 수록된 사장(謝莊)의 「월부(月賦)」에, “柔祇雪凝, 圓靈水鏡”이라 하고 이선(李善)의 주에서 ‘柔祇, 地也’ ‘圓靈, 天也’라 한 것을 근거로, 어구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비평한 것이다. 곧, ‘圓靈=水鏡’이므로 ‘보름달=圓靈之水鏡’이 아니라는 논증이다. 강세황의 논평에는 정녕, 금석문을 완상하는 태도와 고증의 태도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