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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佚文)과 교감(校勘) 자료로서의 금석문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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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佚文) 자료로서의 금석문 활용
금석문 자료는 한문학사상의 주요 작가들이나 그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일문(佚文)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고려초, 중기의 문학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에 이루어진 비지문자(碑誌文字)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1)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고려 문인의 생애와 활동사항을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구묘지명(金坵墓誌銘)」(찬자 미상)과 「김구처최씨묘지명(金坵妻崔氏墓誌銘)」(찬자 미상), 김구(金坵) 찬 「설신묘지명(薛愼墓誌銘)」은 일괄해서 고찰하여야 할 귀중한 자료이다. 설신(薛愼 : ?-1251)의 묘지명을 지을 때 김구는 내시(內侍)에 속하고 장사랑 상서예부원외랑(將仕郞 尙書禮部員外郞)으로 있었다. 그러나 김구의 문집 『지포집』을 보면 설신과의 관계는 물론, 국내 문인들과의 관계를 잘 알 수가 없다. 또 김구가 쓴 묘지명으로는 「진명국사비명(眞明國師碑銘)」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2) 저명한 문인이라 하여도 금석문에서 일문을 채록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배정지묘지명(裵廷芝墓誌銘)」, 「민적묘지명(閔頔墓誌銘)」, 「홍규처김씨묘지명(洪奎妻金氏墓誌銘)」, 「권부처유씨묘지명(權溥妻柳氏墓誌銘)」, 「최문도묘지명(崔文度墓誌銘)」, 「허종묘지명(許琮墓誌銘)」, 「권부묘지명(權溥墓誌銘)」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익재난고』 권7 비명에는 15편의 비명이 있고, 그 가운데 묘도문자는 13편이다. 하지만 이 묘지명들은 그곳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익재난고』를 보완할 자료가 된다. 또한 각 묘지명을 지을 때의 관함을 조사하면 이제현의 생애 사실을 보완할 수가 있으며, 문무에 걸친 그의 교유의 범위를 짐작할 수도 있다.

(3) 자찬 묘지의 예를 볼 수 있다. 현재까지 고려시대 자찬묘지명으로는 『고려사』권112 열전에 수록된 조운흘(趙云仡 : 1332-1404)의 것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금석문 자료에서 광정대부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로 치사(致仕)한 김훤(金晅 : 1258-1305)의 자찬 묘지(墓誌)를 추가할 수 있다. 곧 ‘大德九年乙巳二月三十日’의 일자와 ‘都簽議賛成事金晅自撰墓誌’라는 제액(題額)을 지닌 묘지명이 그것이다. 김훤은 1301년(충렬왕 27)에 「김빈묘지명(金賆墓誌銘)」도 지었다.

(4) 고려 때 죽은 부인을 위해 지은 묘지명을 찾아볼 수 있어서, 당시의 여성관을 살필 수 있다.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과 「최윤의처김씨묘지(崔允義妻金氏墓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염경애(廉瓊愛 : 1100-1146)는 25세에 최루백(崔婁伯 : ?-1205)에게 시집왔다가 47세에 별세하였다.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은 부덕(婦德)을 전하는 일화를 대화체를 이용하여 길게 서술하고, 명(銘)은 3언구의 제언을 이용하였다. 한편 광양군부인 김씨(光陽郡夫人 金氏: 1110-1151)는 호부상서 삼사사(戶部尙書 三司使) 김의원(金義元)의 장녀로 태어나, 21세에 최윤의(崔允儀)에게 시집와서 2남 3녀를 낳고, 의종 5년(1151) 42세로 별세하였다. 묘지명을 쓸 당시의 최윤의의 관직은 조의대부(朝議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지제고(知制誥)였다.

(5) 금석문을 통해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발굴할 수 있다. 고영중(高瑩中, 1133-1208), 염수장(廉守藏, ?-1265)과 윤포(尹誧, 1063-1154)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영중은 전북 옥구현 출신으로, 무신정권기의 문신이다. 고영중은 벼슬에 물러난 뒤 최당(崔讜), 장백목(張伯牧), 백광신(白光臣), 이준창(李俊昌), 현덕수(玄德秀), 이세장(李世長), 조통(趙通) 등과 기로회(耆老會 : 海東耆老會)를 만들어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묘지명은 문학교류의 기제였던 기로회의 실상을 알게 한다. 홍빈연(洪彬然)이 1265년(원종 6)에 지은 「염수장묘지명(廉守藏墓誌銘)」은 고종 때 문인들의 인척관계와 문학활동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염수장묘지명(廉守藏墓誌銘)」의 원 제목은 「조청대부예빈경치사염공묘지명(朝請大夫禮賓卿致仕廉公墓誌銘)」으로, 의론체로 시작을 하며 뒷부분에 운문의 명(銘)이 있다. 윤포는 춘주 횡천현(春州 橫川縣) 사람으로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 知制誥) 등을 역임하였다.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여 왕에게 바쳤고, 치사(致仕) 후에도 왕지(王旨)를 받들어 고사(古詞) 300수를 엮어서 『당송악장일부(唐宋樂章一部)』라고 이름하였다. 또 1146년(인종 24)에도 『태평광기촬요시일백수(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를 편찬하여 표(表)와 함께 올렸다. 그의 이러한 연찬 결과물들은 애석하게도 현전하지 않는다.

(6)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고려 중엽의 일부 묘도문자가 이미 유묘(諛墓)의 부정적 경향을 띠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존중묘지명(金存中墓誌銘)」은 원래 제목이 「증시경숙공김씨묘지(贈諡景肅公金氏墓誌)」이다. 찬자는 알 수 없고, 1156년(의종 10)[金 帝亮 正隆 원년]에 작성되었다. 묘주(墓主) 김존중(金存中, 1111-1156)은 「정과정곡」의 작자 정서(鄭敍)를 무함하였다고 해서 유명하다. 의종 때에는 환관의 힘이 커졌다. 정함은 인종 때 내시서두 공봉관이 되고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는데, 의종 때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가 되어 권세를 부렸다. 당시 첨사부 녹사로 있던 김존중은 내시에 소속되었다가 정함의 힘으로 다시 형부낭중 기거주 보문각 동제학에 올랐다. 김존중은 의종의 행동을 규제하던 정습명(鄭襲明, ?-1151)을 탄핵하여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 일로 우승선에 올랐는데, 그 때 내시낭중으로 있던 정서를 역모죄로 몰았다. 정서는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의 여동생 남편이었으므로 의종에게는 이모부였으나, 의종과는 뜻이 맞지 않았다. 정함과 김존중은 정서가 대녕후 왕경과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정서는 동래로 귀양을 가서, 「정과정곡」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김존중의 묘지명인 「증시경숙공김씨묘지(贈諡景肅公金氏墓誌)」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