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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 자료의 수집 및 정리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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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당시의 문화 복원
금석문 연구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금석 유물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판독과 고증·해석을 통해 기록 당시의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금석문은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어 전체적인 파악이 힘들고,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훼손되거나 글자가 마모된 것도 적지 않다. 현존하는 금석문의 소재지와 보존상태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과 함께 금석문 자체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으면서 지속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탁본은 실물과 크기가 같은 복사물이고, 필사와 달리 내용은 물론 예술성도 빠뜨리지 않고 오류 없이 전한다. 또한 유물이 없어진 경우 이를 거의 동일한 형태로 복원하는 데도 도움이 되며, 유물보다 운반과 휴대가 간편하므로 이를 전시하고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유물이 없어지고 유일하게 탁본이 남아 있다면, 이를 선본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탁본은 거의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것인데, 전지(全紙)를 그대로 연결한 탁본은 없고 행을 오려서 법첩(法帖)의 형태로 보존된 사례가 대부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은 대부분 조선 왕실과 관련된 탁본이다. 일본 천리대학 이마니시(今西) 문고는 이우의 『대동금석첩』을 재편집하여 『대동금석서』로 보급시켰지만 명칭의 오류가 발견된다.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소재)의 아사미(淺見) 문고는 일본 법제사가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이 수집한 도서로서 한국의 많은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금석문 자료에 대한 탁본을 시행하는 일 자체가 많은 인력과 경비가 필요하고, 탁본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금석문 자체의 상태가 악화된 경우도 많으므로 기존에 제작되었던 탁본을 수집, 정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는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다. 시기별, 지역별, 내용별 분류 기준을 만들고, 탁본에 대한 정리작업을 시행한 후 궁극적으로는 금석문 자체에 대한 정보를 담은 종합 목록이 나와야 할 것이다. 19세기부터 금석문을 수집해서 종합 정리한 자료집이 출현했지만, 선본의 탁본과 함께 판독문이 제시된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연구의 기본이 되는 텍스트, 즉 선본의 탁본과 함께 판독문을 제시한 자료집이 간행된다면 금석문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동양문고 소장 탁본
현재까지 수집한 동양문고 소장본은 고구려호태왕비부터 창녕 척경비, 북한산과 함흥의 진흥왕순수비, 점제현신사비, 평양성석각, 대당평백제국비명 등 고대의 금석문과 고려시대 단속사대감국사비 등으로 주요 금석문 자료에 대한 탁본을 수집하였다.

먼저 「고구려호태왕비(高句麗好太王碑)」는 414년(장수왕 3)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소재하고 있다. 1880년경 능비가 재발견된 이후 탁본이 행해졌으나, 비면의 요철이 심하고, 탁본 재료 및 기술의 부족으로 원석(原石) 정탁(精拓)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신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뜬 뒤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한 뒤에 빈자리에 묵을 칠하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 주를 이룬다. 20세기 이후의 것은 석회탁본이 많은데, 1913년 집안(集安) 지역의 유적을 현지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도 이 시기 석회탁본이 성행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동행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비면에 새겨진 문자 하나하나를 탁본과 비교해가면서 읽었다고 한다. 조사 작업 후 두 사람 모두 탁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각각 동경대학 건축학과[關野貞]와 천리대학[今西龍 舊藏本]에 소장되었다. 고구려호태왕비 탁본은 현재까지 100여 점이 전하나 초기 원석 탁본은 13점에 불과하다. 원석 정탁 이외의 탁본은 글자에 대한 오독이나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평양고구려성벽석각(平壤高句麗城壁石刻)」은 「용강점제현신사비(龍岡秥蝉縣神祠碑)」, 「봉산사리원전문(鳳山沙里院磚文)」 「남해전서시제명석각(南海傳徐市題名石刻???)」 등과 한 번호로 처리되어 있다(VII-2-161). 「평양고구려성벽석각」은 고구려 평양성 축조 시 성벽으로 이용한 돌에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5종이 알려져 있다. 공사구간별로 축성을 시작한 연대, 축성 책임자, 공사 담당구간 등이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었던 평양성의 축조 시기나 고구려 관제, 지방통치체제를 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양문고본의 탁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으나, 현재 제1석부터 5석까지의 판독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제4석임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제4석은 1913년 평양 경제리(鏡齊里)의 대동강에 면한 내성 동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된 8행 23자의 석각이다. 첫 부분에 나오는 ‘병술(丙戌)’이란 간지는 내성 축조를 시작한 연대를 지칭하는 듯하며 566년(평원왕 8)로 비정된다.
동양문고 소장 「용강점제현신사비」
「용강점제현신사비」는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어을동토성지(於乙洞土城址)를 조사하면서 토성의 동북 약 150m 지점에서 발견하였다. 비신(碑身)의 윗부분이 약간 파손된 본 비의 건립 연대는 후한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후한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178)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민연 수집본은 ‘대정 7년(1918) 아사미린타로(淺見倫太郞)’가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봉사리원전문」은 1914년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소봉리 1호분에서 출토된 장무이(張撫夷)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전의 탁본이다. 고분에서 동남으로 5km 떨어진 곳에 대방군의 치지로 알려진 토성이 있다. 본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전은 7종으로 명문의 내용은 고분 축조의 기년과 그 책임자를 기록한 것, 피장자의 관직을 기록한 것, 일종의 애도가 등 다양하다. 동양문고 수집본은 애도문 4종 중 2종에 해당한다. 죽은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는 진대(晉代)에 유행한 영회시(詠懷詩)의 일종이다.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VII-2-160)는 현재까지 알려진 4개의 진흥왕순수비 중의 하나이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이 중 창녕비는 561년(진흥왕 22)에 건립한 것으로 비의 앞부분에 다른 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표현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拓境碑)로 부르고 있다. 왕과 신료들의 회맹비(會盟碑)로 보기도 하고, 다른 비와 마찬가지로 순수비로 보기도 한다. 1914년 일본인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橋上里)에 소재하고 있다. 일부 글자는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동양문고 소장볹의 탁본 상태도 좋지 않으며, 대정 7년(1918) 10월 9일 아사미린타오(淺見倫太郞)가 기증한 것으로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의 판독기(判讀記)가 붙어 있다.

「양주신라진흥왕순수비(楊州新羅眞興王巡狩碑)」는 통상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라 불리우며 진흥왕 29년(568)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 비봉(碑峰)에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무학대사왕심비(無學大師枉尋碑)’ 또는 ‘몰자비(沒字碑)’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조선 순조 16년(1816) 김정희(金正喜)가 친구 김경연(金敬淵)과 다불어 승가사에 놀러 갔다가 이 비를 발견하고 탁출하여 ‘진(眞)’자를 확인하였다. 탁본을 중국의 금석가 유연정(劉燕庭)에게 전해주어 『해동금석원』에 실리게 되었다. 이마니시 류 등이 재조사하여 대정 5년(1916) 고적조사보고에 보고문을 실었다. 비의 좌측면에는 “차신라진흥대왕순수지비 병자칠월 김정희 김경연래독(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기미팔월이십일 이제현(李濟鉉) 용인인(龍仁人)”이 새겨져 있으며, 또 예서로 “정축육월팔일 김정희 조인영동래(趙寅永同來) 심정잔자육십팔자(審定殘字六十八字)”가 새겨져 있다. 동양문고 소장본은 3종인데 「VII-2-162」본은 표제가 ‘신라진흥왕비’로 되어 있으며, 상태는 좋지 않다. 「VII-2-162-1」본은 원문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으나, 마에마 쿄사쿠의 장서기와 명치 43년(1910) 아사미가 탁본한 것이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VII-2-162-2」본은 표제가 “양주 신라진흥왕순수비 [신라진흥왕대건 附金正喜等識語拓]’으로 되어 있으며, 대정 7년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기증이라는 문구와 마에마 쿄사쿠의 판독기 및 김정희의 판독기를 마에마가 전사(轉寫)한 낱장이 있다.
동양문고 소장 「함흥신라진흥왕순수비(咸興新羅眞興王巡狩碑)」
「함흥신라진흥왕순수비(咸興新羅眞興王巡狩碑)」(VII-2-162-3)는 진흥왕 29년(568)에 세워진 순수비이다.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 황초령에 있었는데 조선 철종 3년(1852) 관찰사 윤정현이 황초령 아래의 중령진(中嶺鎭)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백겸(1547~1629)의 『동국지리지』에 최초로 이 비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수차에 걸쳐 발견과 매몰을 거듭하다가 1835년 함경도 관찰사 권돈인(權敦仁)이 제1석과 제2석을 찾아냈다고 한다. 철종 2년(1852) 김정희와 학문적 인연이 있는 관찰사 윤정현이 비를 중령진으로 옮기면서 각을 세우는 한편 비의 잔편을 벽에 박고 그 위에 김정희가 쓴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이라는 액을 걸었다. 광무 4년(1900) 도내의 재력가 김씨가 비각을 세우고, 본 비와 윤정현이 옯긴 사실을 적은 소비, 비각중건기비 등 3기를 보존하였다. 민연 수집본은 소장본은 모두 3책으로 되어 있다. 1책은 순순비 탁본, 2책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의 탁본이다. 3책은 “차신라진흥왕비동북정계자야 .... 임자추팔월관찰사윤정현서”라는 문구가 있어 비각중건기임을 알 수 있으며, 탁본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명치 43년(1910) 한성에서 전안변부사(前安邊府使) 서만순(徐晩淳)으로부터 입수했다는 장서기와 마에마의 판독기가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은 소정방이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기록한 비문이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방형 5층 석탑의 제1층 사면에 새겨져 있다. 비명(碑銘)을 새기기 위해서 탑을 세운 것인지, 아니면 전부터 있었던 탑을 이용해서 거기에 비명을 새긴 것인지 논란이 있다. 현재 원문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아 동양문고본의 탁본의 상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버클리 동아시아도서관(아사미문고)본은 현경 5년(660)에 세워졌고, 권회소(權懷素)가 글을 썼다는 기록이 담긴 비문 첫 장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유당신라고국사시진경대사보월능공지탑비명(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 「원주흥법사진공대사탑비(原州興法寺眞空大師塔碑)」 「시흥중초사당간석주기(始興中初寺幢竿石柱記」 3종이 한 번호로 되어 있다(VII-2-165). 동양문고 소장본 3종 모두 대정 7년(1918) 아사미가 기증한 것으로 앞의 2종에는 마에마의 판독기가 붙어 있다. 「유당신라고국사 시진경대사보월능공지탑비명」은 일반적으로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라고 부른다. 원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165번지 봉림사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진경대사는 속성이 김씨[김유신의 후손]이고, 법호는 심희(審希)이며, 선종 9산문의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853년(문성왕 15)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하였으며, 918년(경명왕 2)에 신라 궁궐에 들어가 설법하였고, 이후 봉림사로 돌아와 제자 양성에 주력하다가 923년(경명왕 8)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탑비는 924년에 건립되었다. 민연 수집본의 탁본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시흥중초사 당간석주기」는 흥덕왕 2년(827) 중초사(中初寺)에 당간석주를 만들고 그 조성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현재 안양시 석수동 유유산업 내의 중초사지에 당간지주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동양문고 소장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명(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명(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VII-2-268)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 터에 있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1069~1158)의 비이다. 탄연은 인종 때 왕사로 책봉되었으며, 말년에 단속사에서 지내다가 입적하였다. 이지무(李之茂)가 글을 짓고 기준(機俊)이 글을 써서 1172년(명종 2)에 비가 세워졌으나,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의 탁본만이 문경 금룡사(金龍寺)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한다. 민연 수집본의 표제가 “석기준서(釋機俊書)”로 되어 있는 것은 비문의 서자(書者) 기준(機俊)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며, “전간씨소장(前間氏所藏)”이라는 장서기도 표지에 붙어 있다. 권수에는 “고려국 조계종 청어소 주사개(高麗國 曹溪宗 請於所 住寺開)”, 권말에는 “달마서 미피선(達磨西 未彼禪)”이라는 묵서가 있다. 탁본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