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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대본(京都大本) 『금석집첩(金石集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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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대본 『금석집첩(金石集帖)』의 특징
『금석집첩(金石集帖)』은 조선 팔도에 산재했던 각지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간행한 것으로서, 수록 대상은 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비명(碑銘)의 탁본이다. 교토대 부속도서관 귀중서실에 소장된 『금석집첩』은 속편인 『금석속첩(金石續帖)』 19첩(帖)을 포함해 모두 219첩이며, 탁본의 전체 수량은 총 1,823점에 이른다.

『이문회지(以文會誌)』(경도제국대학이문회, 44호)에서는 본서가 교토대에 입수된 경위와 본서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싣고 있다. ‘『금석집첩』은 영조(正祖) 때의 대제학(大提學) 조인영(趙寅永) 등의 명을 받들어 수집한 조선 전국 금석문의 탁본으로서, 원본인 왕실의 비본(秘本) 이외에 한 부(部)를 조가(趙家)가 소장하고 있었다. 그 자손이 어떤 이유 때문에 매각하게 된 것을, 교토대 문과대 동양사학교실(東洋史學敎室)에서 구입하게 된 것이다. 다소 일실된 것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로 수집된 것은 한국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이다(1911년 11월 7일 「報」, 이상 필자역).’
이 기사를 통해, 교토대 소장본은 전질이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 일부가 일실(逸失)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제첩(製帖)은 조인영(趙寅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金石集帖』의 전체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서근(書根)에 쓰인 한자를 조사하면, 본편은 227번째 문자인 「惡」에서 끝나고, 속편은 37번째 문자인 「露」까지 확인된다. 따라서 본서는 본디 264첩까지 제작되었던 것으로서, 현소장본의 수량(219첩)과 비교해 보면 45책이 일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사 범위를 국내 기관까지 넓히면,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에 기재된 규장각본 『金石集帖』 1帖(古大4016-8, 92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본은 책의 크기를 비롯한 서지 사항이 교토대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또 현재 교토대본에서 찾을 수 없는 「閭巷人」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규장각본은 교토대본에서 산실(散失)된 1첩으로 볼 수 있다.
『금석집첩(金石集帖)』의 편자 조인영(趙寅永)
본서의 편자로 추정되는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은 네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고 풍양(豊壤) 조씨 세도정치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인물이었으므로, 『金石集帖』의 제작과 같은 전국적인 대사업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그는 1816-1817년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조사할 정도로 금석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를 즈음하여 본서와 같은 거질의 집첩(集帖) 제작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石集帖』 第1帖 表紙
『金石集帖』 第1帖 卷首
간행년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편에 수록된 탁본 중에서 시기상 가장 늦은 것은 1760년, 속편은 1795년이므로, 본서는 1795년 이후에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제198첩은 순천 송광면(松光面)의 토지 조사에 쓰인 공문서의 이면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조인영이 전라도관찰사로 제수받았던 1829년(「文忠公趙寅永神道碑」 중, ‘己丑 爲全羅道觀察使’)을 전후하여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제첩(製帖)의 목적, 금석문의 서체 학습과 감상
『금석집첩』에 수록된 탁본은 대부분 표(表)·비(碑)·갈(碣)로 대표되는 비명(碑銘)이고, 고관(高官)의 무덤 앞에 세워지는 신도비(神道碑)가 11점, 현판(懸板)이 8점, 묘지가 7점 수록되어 있다. 개인의 비명 이외에도 상석(床石)·망주(望柱)·방석(傍石), 신주를 모신 사비(祠碑)는 물론, 고적에 세웠던 유허비(遺虛碑), 성곽·교량·사찰의 건설을 기념하는 사적비(史蹟碑)의 탁본도 볼 수 있다.

우선 『금석집첩』은 금석문의 서체 학습과 감상이라는 법첩(法帖)의 기본적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중국의 명필가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 소식(蘇軾)과 함께 조선의 명필가 김생(金生), 한호(韓濩)의 글자를 모은 집자비(集子碑)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의 어필(御筆)로서 ‘북관어필별유비(北關御筆別諭碑)’(권수-탁본번호, 002-10) 등 총 11점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비문의 글자체로서는 전서·예서·해서·행서체가 있고, 그 중에서 전서로 유명한 것에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숭인전비(崇仁殿碑)」(<도판2>)가 있다. 특히 비문을 쓴 명필가의 이름을 기록하여 명가의 서체를 직접 배울 수 있게 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법첩(法帖)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비문 전체가 수록되므로 세자(細字)는 물론 대자(大字)까지 광범위하게 실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비신(碑身) 상부의 제액(題額)과 같이 한 글자의 크기가 본서의 크기를 초과하는 경우, 탁본의 한쪽 끝을 편철한 뒤 나머지 부분을 접어 넣는 방법으로 제첩했다. 이와 같이 본서의 제작자는 가능한 한 금석의 원래 글자를 보전하여 남기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金石集帖』의 편자는 탁본을 단순히 제첩(製帖)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탁본의 결과 선명하지 못한 글자에 대해서는 그 위에 직접 덧칠하거나 그 옆에 묵서(墨書)하였다. 또 마멸에 의해 소실된 문자에 대해서는 선행문헌을 살펴 글자를 보충했다. 예컨대 「領相申公叔舟碑」(38-6)에서는 비문 중에서 닳아 없어진 곳에 대해 『東文選』의 내용을 고증하여 빠진 글자를 주서(朱書)로 기재했다.

편자의 이와 같은 태도는 금석의 원형을 복원하여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의도와 관련된다. 수록 대상이 된 인물의 탁본을 신분과 관직별로 분류한 뒤, 다시 업적과 행적별로 세분하고 이들 탁본을 각 첩에 나누어 싣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금석집첩』의 수록 대상이 된 인물
『금석집첩』의 수록 대상이 된 인물을 보면, 우선 왕가(王家)의 비문은 왕‧왕비·왕세자가 제1∼12첩에, 빈(嬪)·옹주(翁主)·부마(駙馬)가 제110, 111. 187, 189첩에 수록되어 있다. 「상신(相臣)」으로 분류된 승상(丞相)과 판서(判書)의 비문이 제36∼54첩에 들어 있고, 「정경(正卿)」(중앙관리)이 제55∼79첩, 「아경(亞卿)」(지방관리)이 제80∼91첩, 학자(「先賢」「學問」)의 비문이 제15∼28엽에 실려 있다.

특히 왕실 관련의 비문은 빠짐없이 포함되고, 중앙관과 지방관 또는 학자의 비문이 주된 수록 대상이었다. 이는 본서의 제작 의도에 왕조의 권위와 유교적 질서 보전이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인의 업적과 행적과 관련된 비문으로 효자비(孝子碑)·선정비(善政碑)·정려비(旌閭碑)·충신비(忠臣碑)·열녀비(烈女碑)·기공비(紀功碑)가 많이 보이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도판1>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각 첩의 표지에는 수록된 탁본의 명칭을 모두 기록하여 검색의 편리를 기하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사를 익히고 이문(異問)을 넓히는 데 본서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조인(前朝人)」으로 분류된 149~152첩에는 조선 왕조 이전의 것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주목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보면, 신라 시대의 ‘수로왕비(首露王碑)’(001-5, 제작년 미상)와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217-1, 乙酉記)가 확인되고, 통일신라시대의 ‘낭공대사백월탑비(朗空大師白月塔碑)’(192-1, 924년)와 함께, 고려시대의 것으로서는 ‘문인탄연등제진락공문(門人坦然等祭眞樂公文)’(192-2, 1130년) 외 8점이 확인된다.

『금석집첩』의 제작은 이상과 같은 목적 의식을 바탕으로 조인영(趙寅永)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대의 다양한 금석으로부터 탁본한 금석문이 방대하게 수집되어 있다는 점, 기본적으로 금석문 전체가 수록된다는 점, 금석의 내용에 대한 고증을 거쳐 가능한 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토대본 『금석집첩』의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다만 교토대본의 일부는 아직 미발견인 채로 남아 있다. 산실된 45첩 중 1첩만이 현전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나, 나머지 문헌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다. 차후 왕실 보존용으로서 제작된 이본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련 자료를 지속적으로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