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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대학 아사미문고 소장 육신묘비(六臣墓碑) 탁본
육신묘비 개요
육신묘비는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1747년(영조 23)에 작성한 「노량육신묘비명 병서(露梁六臣墓碑銘 幷序)」를 새긴 것이다. 이 비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158-2번지에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8호(동작구)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214cm, 너비 79cm, 두께 42cm이다. 글씨는 「근례비(謹禮碑)」 등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체를 집자했고, 비액은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이라는 글자를 전서로 새겼다. 단, 육신묘비는 1747년 당시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정조 초 민절사(愍節祠)의 유사(有司) 이동직(李東直) 등이 빗돌을 준비하고 박팽년의 후손 전 현감 박기정(朴基正)이 진력하여 1782년(정조 6)에 세웠다. 이때 원임 영의정 완산 이휘지(李徽之, 1715-1785)가 지어(識語)를 썼다. 이휘지는 영조 정묘년 이후 사육신에게 내린 은전을 차례로 적고 비석을 세운 전말을 기록하고, 끝에 ‘崇禎三壬寅 月 日立’이라고 일자를 적었다.
조관빈은 「노량육신묘비명 병서」에서 처음으로,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의 육신묘 조성 전설은 그 이후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도 다루어지는 등, 18세기 중엽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허목과 남구만의 ‘육신묘비’
사육신의 묘에 대해 고증을 하고 처음으로 비문을 남긴 사람은 허목(許穆, 1595-1682)이다. 곧, 효종 2년(1651) 5월 하지의 날에 허목은 「육신의총비(六臣疑塚碑)」를 지었다. 박팽년의 6세손이며 동궁의 좌익찬인 박숭고(朴崇古)가 묘소를 수축한 다음 그곳에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을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허목은 사육신을 장사지내고 묘표를 세운 사람이 김시습이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으며, 노량진의 묘를 의총이라고 했다. 본래 의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단정되지 않는 묘라는 뜻이다. 허목이 그 묘를 의총이라고 한 것은 아직 사육신이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추모하는 뜻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여 그런 듯하다. 허목의 「육신의총비」 비문을 새긴 비는 세워지지 못했다.
허목은 73세 되던 1667년(현종 8)에 『청사열전(淸士列傳)』을 지어서, 김시습ㆍ정희량ㆍ정렴ㆍ정작ㆍ정두ㆍ강서ㆍ조충남 등의 유사를 부록했데, 이때에도 김시습이 육신묘를 조성한 일이나 그와 관련한 전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허목은 김시습을 청사(淸士)의 한 사람으로 존경해서 특별히 입전(立傳)했지만, 김시습이 노량진에 육신묘를 조성했다는 전설은 알지 못했던 듯하다. 어쩌면 당시에는 그러한 전설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1679년(숙종 5)에 숙종은 노량진에서 열병할 적에 강 건너에서 육신묘를 바라보고는 감회를 일으켜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이에 선비들이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사지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숙종이 장릉(章陵)을 참배하러 갈 때 육신묘 앞을 지나가면서, 사육신의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했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후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1708년(숙종 34)에 「노량육신묘비(露梁六臣墓碑)」를 지었다. 박숭고의 손자인 청안현감 박경여(朴慶餘)가 신도비를 세우고자 했을 때, 그들의 청으로 비문을 적은 것이다. 남구만도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시습 육신묘 조성 전설의 형성
김시습의 육신묘 조성 전설은 조선의 역대 군주가 신하들의 충절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제사의 예식의 등급을 올리고 또 시호를 올리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어간 듯하다.
숙종은 1703년(숙종 29) 2월에는 유생들의 소청에 따라, 육신의 신주를 모신 영월의 사우에 ‘창절(彰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처사(處士) 김시습’의 신주를 모신 홍산(鴻山)의 사우에 청일(淸逸)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해 10월에는 경상도 유학(幼學) 곽억령(郭億齡) 등이 함안에 조려(趙旅)의 사당을 짓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생육신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함께 올렸다.
영조는 1736년(영조 12) 6월에 영월의 유학 박현제(朴賢齊) 등이 김시습ㆍ남효온 등 8인의 사우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했다. 또한 영조는 1747년(영조 23)에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육신묘에 비를 세우도록 명했는데, 이 때 유생으로서 민절사의 유사(有司)로 있던 민백흥, 홍인한, 심우 등이 예조판서로서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있던 조관빈에게 비문을 청했다. 조관빈은 이 글에서 처음으로, “대개 당일에 앙화가 일어나 일가 친족이 모두 죽임을 당해 아무도 그 유해를 거둘 수가 없었는데, 어떤 승려가 그 시신을 등에 지고 가서 묻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 승려란 바로 매월당 김시습 공이라고도 말한다.”라고 언급하여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암장했다고 하는 설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널리 유포된 듯하다.
육신묘비 조성과 김시습 육신묘 조성 전설의 정착
정조는 재위 6년(1782) 4월에 김시습ㆍ원호ㆍ남효온ㆍ성담수에게 이조판서를 특별히 추증했다. 재위 8년(1784) 3월 11일에는 김시습에게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우리나라 시호법에 보면 ‘청(淸)’은 ‘피원불의(避遠不義: 불의를 멀리 피함)’의 뜻을 나타내고, ‘간(簡)’은 ‘정직무사(正直無邪: 정직하여 삿됨이 없음)ㆍ‘거경행간(居敬行簡: 경의 자세를 지켜 몸가짐을 잘 지킴)’ 등의 뜻을 지닌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을 추증하고 제사지내는 모든 예식이 정조 때에 매듭지어졌다.
정조는 즉위 7년인 1731년의 정월 17일(음력)에 처음으로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 능)으로 거둥하다가 노량진을 지나게 되자 승지를 보내 육신사(六臣祠)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당시 정조가 작성한 치제문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정조는 그 이후로도 육신사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역시 별도의 치제문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정조가 민절사에 제사를 올린 이후에, 민절사의 유사 이동직 등이 빗돌을 준비하고 박팽년의 후손 전 현감 박기정(朴基正)이 진력하여 조관빈의 「노량육신묘비명 병서」를 빗돌에 새기려 했다. 그들은 1782년(정조 6)에 공역을 마치고 원임 영의정 완산 이휘지(李徽之, 1715-1785)의 지어(識語)를 받았다.
한편, 이긍익(李肯翊, 1736-1806)도 『연려실기술』에서, 김시습이 박팽년․유응부․성삼문․성승 등(다른 한 사람은 기록이 없다)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하는 전설을 채록해 두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사육신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란 논문을 적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에는 하위지가 들어 있지 않고, 또 유성원 대신 성승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위지의 시신은 조리돌려 그의 고향에 이르렀을 때 그 김에 고향 선산(善山)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고, 성삼문의 무덤 남쪽에 성승의 무덤이 있는데,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으면서 유성원을 포함시킨 탓에 노량서원(鷺梁書院)에서는 성승 대신 유성원을 사육신으로 모셔 제사지내고 있다고 했다. 성삼문도 연산(連山)에 팔다리 중 하나가 묻힌 무덤이 있다고도 했다.
또 성대중은 노량진의 육신묘는 사육신이 죽은 곳은 아니라고 했다. 곧, 세간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곳은 옛날에 사람을 처형하던 곳이고 사육신을 묻어 준 자는 승려인데 아마 김동봉(김시습)일 거라고 하지만, 실록을 조사해 보면 병자년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자들은 모두 군기시 앞에서 죽었지 노량진에서 죽은 것이 아니며 박충정(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대중은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 언덕에 함께 묻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곧, 이 일은 지혜와 의기를 겸비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시습이 과연 사육신의 시신을 업고 가서 노량진에 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대중이 말했듯이, 육신을 묻어 주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믿어 온 것이다.
아사미문고 소장 「육신묘비 탁본」의 가치
버클리대학 아사미(淺見)문고에는 「육신묘비」의 탁본이 전한다. 1980년대의 탁본이 명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사미문고의 탁본은 명지대박물관 소장본보다 빠른 1930년대에 탁본된 것이어서, 원래의 비문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하다. 아사미문고 소장 탁본을 보면 조관빈의 문집 『회헌집(悔軒集)』에 수록되어 있는 글과는 몇 군데 다른 곳이 있다. 중요한 사실은, 문집 수록 글에는 홍인한(洪麟漢, 1722-1776)의 이름이 있으나 탁본에서는 그 이름이 아예 빠져 있고, 문집 수록 글에는 심우(沈 *金+禹)의 성만 있었으나 탁본에서는 이름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홍인한은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지만 벽파(辟派)에 가담해서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한 인물의 이름을 비석에 남겨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비석을 세울 때 그의 이름을 삭제한 듯하다. 심우의 이름을 명시하게 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다.
참고문헌
심경호, 「버클리大學 아사미文庫 所藏 六臣墓碑 拓本을 통해 본 金時習 六臣墓 造成 傳說의 定着 過程」, 『어문연구』 39-2,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1.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문고 소장, 「有朙朝鮮國六臣墓碑銘幷序」 탁본, 1930년대.
심경호,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3.
조관빈은 「노량육신묘비명 병서」에서 처음으로,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의 육신묘 조성 전설은 그 이후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도 다루어지는 등, 18세기 중엽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허목은 73세 되던 1667년(현종 8)에 『청사열전(淸士列傳)』을 지어서, 김시습ㆍ정희량ㆍ정렴ㆍ정작ㆍ정두ㆍ강서ㆍ조충남 등의 유사를 부록했데, 이때에도 김시습이 육신묘를 조성한 일이나 그와 관련한 전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허목은 김시습을 청사(淸士)의 한 사람으로 존경해서 특별히 입전(立傳)했지만, 김시습이 노량진에 육신묘를 조성했다는 전설은 알지 못했던 듯하다. 어쩌면 당시에는 그러한 전설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1679년(숙종 5)에 숙종은 노량진에서 열병할 적에 강 건너에서 육신묘를 바라보고는 감회를 일으켜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이에 선비들이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사지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숙종이 장릉(章陵)을 참배하러 갈 때 육신묘 앞을 지나가면서, 사육신의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했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후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1708년(숙종 34)에 「노량육신묘비(露梁六臣墓碑)」를 지었다. 박숭고의 손자인 청안현감 박경여(朴慶餘)가 신도비를 세우고자 했을 때, 그들의 청으로 비문을 적은 것이다. 남구만도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숙종은 1703년(숙종 29) 2월에는 유생들의 소청에 따라, 육신의 신주를 모신 영월의 사우에 ‘창절(彰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처사(處士) 김시습’의 신주를 모신 홍산(鴻山)의 사우에 청일(淸逸)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해 10월에는 경상도 유학(幼學) 곽억령(郭億齡) 등이 함안에 조려(趙旅)의 사당을 짓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생육신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함께 올렸다.
영조는 1736년(영조 12) 6월에 영월의 유학 박현제(朴賢齊) 등이 김시습ㆍ남효온 등 8인의 사우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했다. 또한 영조는 1747년(영조 23)에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육신묘에 비를 세우도록 명했는데, 이 때 유생으로서 민절사의 유사(有司)로 있던 민백흥, 홍인한, 심우 등이 예조판서로서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있던 조관빈에게 비문을 청했다. 조관빈은 이 글에서 처음으로, “대개 당일에 앙화가 일어나 일가 친족이 모두 죽임을 당해 아무도 그 유해를 거둘 수가 없었는데, 어떤 승려가 그 시신을 등에 지고 가서 묻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 승려란 바로 매월당 김시습 공이라고도 말한다.”라고 언급하여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암장했다고 하는 설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널리 유포된 듯하다.
정조는 즉위 7년인 1731년의 정월 17일(음력)에 처음으로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 능)으로 거둥하다가 노량진을 지나게 되자 승지를 보내 육신사(六臣祠)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당시 정조가 작성한 치제문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정조는 그 이후로도 육신사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역시 별도의 치제문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정조가 민절사에 제사를 올린 이후에, 민절사의 유사 이동직 등이 빗돌을 준비하고 박팽년의 후손 전 현감 박기정(朴基正)이 진력하여 조관빈의 「노량육신묘비명 병서」를 빗돌에 새기려 했다. 그들은 1782년(정조 6)에 공역을 마치고 원임 영의정 완산 이휘지(李徽之, 1715-1785)의 지어(識語)를 받았다.
한편, 이긍익(李肯翊, 1736-1806)도 『연려실기술』에서, 김시습이 박팽년․유응부․성삼문․성승 등(다른 한 사람은 기록이 없다)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하는 전설을 채록해 두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사육신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란 논문을 적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에는 하위지가 들어 있지 않고, 또 유성원 대신 성승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위지의 시신은 조리돌려 그의 고향에 이르렀을 때 그 김에 고향 선산(善山)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고, 성삼문의 무덤 남쪽에 성승의 무덤이 있는데,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으면서 유성원을 포함시킨 탓에 노량서원(鷺梁書院)에서는 성승 대신 유성원을 사육신으로 모셔 제사지내고 있다고 했다. 성삼문도 연산(連山)에 팔다리 중 하나가 묻힌 무덤이 있다고도 했다.
또 성대중은 노량진의 육신묘는 사육신이 죽은 곳은 아니라고 했다. 곧, 세간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곳은 옛날에 사람을 처형하던 곳이고 사육신을 묻어 준 자는 승려인데 아마 김동봉(김시습)일 거라고 하지만, 실록을 조사해 보면 병자년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자들은 모두 군기시 앞에서 죽었지 노량진에서 죽은 것이 아니며 박충정(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대중은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 언덕에 함께 묻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곧, 이 일은 지혜와 의기를 겸비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시습이 과연 사육신의 시신을 업고 가서 노량진에 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대중이 말했듯이, 육신을 묻어 주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믿어 온 것이다.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문고 소장, 「有朙朝鮮國六臣墓碑銘幷序」 탁본, 1930년대.
심경호,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