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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서인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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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삼국시대부터 장서가가 등장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증할 방법은 없고 안압지나 절터에서 발굴된 신라 인장 13과를 통해 짐작만 가능하다. 고려시대에도 장서인 사용의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최초로 장서인이 사용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의 일로 『세조실록』에 양성지가 세조에게 올린 글에서 볼 수 있다. 양성지는 고려 숙종 때의 전례와 같이 조선에서도 왕실 소장의 도서에 장서인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당시 양성지가 예로 든 고려 숙종의 어장서의 인가는 ‘高麗國十四葉辛巳歲/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建通元年’과 ‘高麗國御藏書’이다. 이 장서인은 실제 검인된 사례가 국내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 궁내청 서릉부 등에 5종의 도서에 날인되어 현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문헌이 풍부하였으므로 개인 장서가들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전란으로 인해 전본이 드물고 검인 사례도 드물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우리나라의 장서가들은 시대별로 임란이전, 임란이후-광해군, 인조-현종조, 숙종조, 영・정조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장서인
임란 이전 장서인의 가장 큰 특징은 형태상 정방형 인재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례를 보면 성명인, 직관인 등 용도를 물론하고 가장 많은 형태를 차지하고 있는 형태가 정방형이다. 또 다른 특징은, 외곽이 원형인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내부에 정방형의 공간을 구획하고 그 속에 전각을 하는 천원지방형(天圓地方形)인에 대한 영남권 인사들의 기호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또한 각종 기물의 형태를 도용하여 인장의 수식적 기능을 강조한 기물형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로나 정(鼎)의 형태로 판단되는 삼족(三足) 정형(鼎形)인이 주를 이루고, 원대에 유행했던 종형(鐘形) 물형인도 확인할 수 있다. 종형 물형인의 경우 초기에는 아가리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상단 장식부의 선후를 구분할 수 있는 형태로 도안되었고 후기에는 평면화, 도안화 되면서 입체감이 사라졌다는 특징이 보인다.
전법에 있어서는 주문양각인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고 서체에 있어서는 대체로 대전(大篆) 계통으로 새겨지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다. 성수침(成守琛)의 경우 글자당 각각 다른 전법을 활용하여 유엽전(柳葉篆), 기자전(奇字篆), 예서(隸書), 조적전(鳥跡篆) 등을 안배하였다. 김순(金珣)의 예에서는 용이나 기린의 두상을 새긴 조충전이 보인다. 이와 같이 서체가 다양하게 확인되기 때문에 서체 자체만을 가지고 인장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에는 주의를 요한다.
임진왜란 이후에서 광해조의 장서인
임진왜란 이후 사고(史庫)의 소실로 조선 전기의 중요한 전적들이 대부분 멸실되었고 고려 왕실의 서적들이 약탈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서적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명나라 서적을 많이 수입하였다. 중국 서적의 수입은 기본 서적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새로운 문화나 유행을 담은 신간 서적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분야로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문학과 사상에까지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일고 있던 전각 열풍이 함께 수입되며 조선에 장서인 보급을 촉진하게 되었다. 임란 이후 광해조에 걸친 시기에 장서인의 검인 사례는 약 36명의 인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주목할 변화 양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용하는 장서인의 수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임란 이전의 장서인은 많아야 3-4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와서는 5방 이상 때로는 16방까지 검인하는 사례가 확인된다. 또한, 특수한 용도의 인장들이 등장하여 기존에 본관, 성명, 자호로 구성된 장서인의 기본 구성에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좋은 글귀를 담은 성어(成語)인이나 다양한 기물 형태의 한장(閑章) 등이 검인되고 있다.
인장에 사용되는 용어의 경우에도 임란 이전에는 대부분 본과만 표기하여 두 글자만 새기거나, ‘後學’, ‘後人’등의 용어가 첨부되어 네 글자가 새겨졌으나 이 시기에는 세가(世家)인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표자(表字)인의 대표적인 조자(助字)인 甫(父)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서체와 전문(篆文)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다. 전각에 주로 사용되는 전서는 소전체(小篆體)인데, 소전체 중에서도 특히 용필(用筆)이 둥글고 원만하며 수필(收筆)이 풍부하고 균형잡힌 옥저전(玉箸篆)이 많이 쓰였고, 이 외에 수로(垂露), 전력(剪力), 유엽전(柳葉篆) 등 독특한 전서체들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장법에 있어서는 주백상간법이 시도되었으며 소밀법, 반곡전밀법, 나양법 등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물형인도 다양하게 등장하였고 정방형 위주의 기호에 약간의 균열이 보이고 있다. 2-3방의 세트로 구성된 인장에서도 주문양각이 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백문음각인이 대비적 효과를 위해 안배되기도 하였다.
경화권에 거주한 이물들의 일부에서 소형 인장의 사용례가 다수 확인된다. 이 장서인군은 임란 이전 조선 장서인의 평균적 크기보다 확연히 작다. 또한 광해조에 와서 청음 김상헌 같은 문인 전각가가 등장하였고, 그의 전각작품 감평문인 『군옥소기』를 통해 인장에 대한 예술적 감평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인조에서 현종조의 장서인
병자호란・정묘호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 문물의 유입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청조가 시작과 함께 소중화주의 사상이 나타나면서 조선전각에도 내재적 발전 요소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문인 전각가의 등장이다. 청음 김상현, 선원 김상용을 시작으로 장동김문의 장서인을 통해 그들만의 독특한 인장문화가 구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전서 자체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이 증가하여 김진흥의 『전대학』과 같은 각종 전서체 교본이 간행되었고, 전서 전문 사자관(寫字官)에 일류 문인이 보임되어 그 기예를 공인받는 등 전각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본 요소가 갖추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홍석구와 같은 문인 전각가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장서인의 주목할 만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인장의 크기가 대형화 되었다. 또한 다양한 전서체를 활용하여 인면을 이채롭게 하는 경향이 대부분의 장서인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수로전, 유엽전 등 독특한 전서체로 인장을 구성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성명인의 경우 윤택하고 원만한 형태의 옥저전이 대세를 이루었고, 장법에 있어서는 필획의 끝을 늘어뜨리는 형식적 기교가 많이 나타난다. 필획의 끝을 늘어뜨려 끝을 수로전이나 전도전 등의 형태로 분식(粉飾)하는 경우도 상당수 보이는데, 주로 적관인이나 표자인 등에 자주 사용된다. 앞선 시기에 도입된 주백상간법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였는데 인면을 화려하게 수식하기 위한 의도이다. 음양각을 번갈아 배치하는 주백상간법이나 혹은 필획의 수비(瘦肥)를 달리한 문자를 번갈아 배치하는 등의 변형태로 발전하였다.
숙종조의 장서인
장서인의 사용이 이전 시기에 비해 확연히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현종실록자, 무신자를 기반으로 한 중앙정부의 서적 간행이 이전 시기보다 활발했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장기간 침체되었던 활자 중심의 국가 출판 업무가 정상화되었고 인쇄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서적을 짧은 시간 안에 간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각 예술에 있어서도 변화가 발생하는데, 전각 자체에 당파적 기호와 특징이 개재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허목의 미수전(眉叟篆)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로, 특히 기호남인을 중심으로 미수전의 수용과 양식적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노론 및 경화세족들의 장서인은 이전시대 장동 김문과 홍석구 등에 의해 발전되어온 경화권 전각양식이나 특징을 사용하였다.
전각된 문자를 인면 상단으로 게양한 듯한 형태가 거의 모든 인장에서 빠짐없이 확인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 시기에 인면을 4등분하여 만실(滿實)하게 문자를 전각하던 관행에 “인면의 여백 처리”라는 화두가 제기되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생긴 것이다. 전각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장동김문의 옥저전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각된 문자의 양 끝 획을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끝을 둥글게 연마하여서 마치 옥 젓가락을 늘어뜨린 것처럼 시원하면서도 방저한 아름다움을 도출했던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것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수직으로 늘어뜨리는 이전 형태에서 필획의 끝을 좌우로 자연스럽게 만곡시킨 형태들이 다수 보인다는 것이다.
성명인에 있어서는, 이전에는 인장용 보자를 삽입한 4글자 2단 구성이 기본 형태였는데, 이 시기에는 인장용 보자의 삽입 없이 이름만 세 글자(혹은 두 글자)로 가로쓰기로 전각하는 형태가 유행하고 있다.
기물형 인장의 사용이 현격하게 줄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화려한 인장의 사용을 자제하는 경향과 화려한 주백상간인의 사용이 필획의 수비조절을 통한 주백상간 효과 창출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에 따른 변화이다.
지방문인의 장서인만 놓고 보면 영남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복고적 양식의 선호가 확인되며, 인재의 선택에서도 원형인+정방형인의 구성을 택하거나, 장방형의 인재를 선택하는 등 시대양식과 동떨어진 형태가 보인다. 동시기 경화쪽 전각의 경우에는 인면의 구성과 장법의 변화 등에 치중하였다. 인면의 일률적인 균분이 지양되며, 사선과 원형 필획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도한 필획과 필획이 만나는 지점에 마름모꼴의 용접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정조조의 장서인
영조와 정조가 재위한 약 75년간은 민생이 안정되고 문화를 꽃피운 조선의 중흥기로 평가된다. 왕권 역시 강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의 국가사업들이 진행되었다. 문화적 방면에 있어서는 새로운 활자들을 주조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보급하였다. 조선 내부의 출판 융성 이외에도 사행이나 역관을 통해 수많은 당판서적들이 유입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장서가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하곤, 심상규등은 수장하고 있는 서적의 규모가 만권을 넘었다. 이에 수반된 현상으로 장서인의 사용이 매우 보편화되어 상당히 많은 인물들의 인영을 확인할 수 있다.
전각사적으로는 숙종조의 양식적 특성을 유지하는 기조 아래 청나라 전각의 특징적 요소들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먼저, 숙종조 조선의 전각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거론할 수 있는 특징적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서법, 도법, 장법의 세 요소 중 장법에 속하는 인면의 구성과 조화에 있어 이전 시기보다 더 기교적 진보와 단련이 확인된다. 특히 성명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전 시기 인장용 보자를 삽입하여 2/2의 네 글자로 구성되던 성명인이 숙종조 초기부터 성명 3자만 가로쓰기 형태의 시도가 확인되었는데, 영정조 시기에는 성명 세 글자(혹은 두 글자)로 성명인을 구성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주로 정방형 인재를 사용하였으므로 성명 세 글자만을 전각할 경우 네 글자를 만실하게 전각할 때보다 여백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필획의 일부가 상하로 이동하는 것이 많이 확인되었다. 이광자의 적관인, 이증록의 성명인, 김시제의 ‘관란’인, 이정매의 ‘여일재’인, 신만의 성명인, 이명천의 표자인, 심일진의 적관인, 권중립의 표자인에서 이가 보인다. 다음, 인문의 자간을 조절하여 인면 전체가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변형한 형태의 인장구성이 많이 확인된다. 이는 문자의 대칭성을 추구하면서 인면의 아름다움을 제고시키는 효과를 준다. 다음, 인재의 석문을 그대로 드러낸 형태의 인장이 다수 확인된다. 사선의 활용도 확인되는데 조형미를 위한 의도적 변용의 사례로 보인다. 다음, 숙종조 미수전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던 것이 보다 많은 인물의 장서인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남인계열의 문인들에서만 확인되어 여전히 당파적 기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경화권 장동김문의 전각은 이덕부와 김시제, 신정하 등의 인장에서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계승되고 있는데, ‘川’자 형태의 세로 3단 구성의 인장 사용이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로 두드러진다.
우선 필획의 일부가 상하로 이동하는 것이 많이 확인되었다. 이광자의 적관인, 이증록의 성명인, 김시제의 ‘관란’인, 이정매의 ‘여일재’인, 신만의 성명인, 이명천의 표자인, 심일진의 적관인, 권중립의 표자인에서 이가 보인다. 다음, 인문의 자간을 조절하여 인면 전체가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변형한 형태의 인장구성이 많이 확인된다. 이는 문자의 대칭성을 추구하면서 인면의 아름다움을 제고시키는 효과를 준다. 다음, 인재의 석문을 그대로 드러낸 형태의 인장이 다수 확인된다. 사선의 활용도 확인되는데 조형미를 위한 의도적 변용의 사례로 보인다. 다음, 숙종조 미수전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던 것이 보다 많은 인물의 장서인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남인계열의 문인들에서만 확인되어 여전히 당파적 기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경화권 장동김문의 전각은 이덕부와 김시제, 신정하 등의 인장에서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계승되고 있는데, ‘川’자 형태의 세로 3단 구성의 인장 사용이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로 두드러진다.
새로운 사조로 청에서 유입된 청나라 전각들의 특징적 요소들이 수용되었는데, 용접점, 변곽의 잔파, 금석문자의 영향으로 인한 자형의 변화, 도법(刀法)상의 결구처리의 변화, 인장의 소형화와 종류의 다양화가 대표적이다.

구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