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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기와필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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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기, 필사기는 무엇인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장서기(藏書記)와 필사기(筆寫記)는 자료의 소장자가 자신의 장서에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을 구입했을 경우에는 장서기만 남아 있지만, 전사(轉寫: 베껴 쓰기)의 방식을 통해 복제본을 만들었을 경우에는 필사기가 장서기를 겸하기도 한다.

장서기는 책의 입수와 관련하여 자료의 맨 앞이나 끄트머리에 남긴 기록이다. 전근대시기에 책의 소유 표시는 전각(篆刻)으로 새긴 장서인(藏書印)을 사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장서인은 기본적으로 책의 소유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경우에는 이전 소유주를 확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책의 유전(流傳) 경로를 파악할 수도 있다. 또한 운이 좋은 경우에는 책의 입수 시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장서인은 자료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정보원이다.

그런데 어떤 자료를 보면 간혹 장서인 외에 자료의 구입처, 구입 시기, 구입 내력 따위를 글로 남겨 놓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자료를 입수한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서 이를 장서기(藏書記)라고 부를 수 있다. 기록을 남길 당시에는 이 장서기가 간단한 메모 혹은 비망록(備忘錄)에 불과했을 수도 있으나,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뒤에는 해당 자료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기록원이 된다.
필사기는 자료를 베껴 쓰는 작업을 마친 후에 남긴 기록이다. 마음만 먹으면 크지 않은 돈을 들이고도 원본과 거의 같은 복본이나 복제 파일을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전근대 시기에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사리 원본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원본과 같은 복본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손수 베끼거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시켜서 원본의 내용을 옮겨 적는 필사가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베껴 적은 저술이라고 해서 모두 필사기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사기가 남아 있는 경우, 소장자가 필사에 들인 노력, 소요한 시간, 자료의 입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 자료의 내력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닌다.
마에마 쿄사쿠, 아사미 린타로의 장서에 남은 장서기와 필사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외국으로 흘러나간 한국 고문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컬렉션은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 1868~1942]와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의 장서이다. 마에마와 아사미가 수집했던 한국 고문헌 자료들은 거의 한 세기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전한 면모를 갖춰 개별 컬렉션으로 보존되어 있다. 마에마의 장서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1924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東洋文庫에 기증된 후 854종 2,478책 규모의 장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아사미의 장서는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미쯔이문고로 보내졌다가 1950년에 미국 버클리대학[U. C. Berkeley]에 팔리게 되었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아사미의 구장서는 탁본 155종을 포함하여 총 839종 4,013책의 규모이다. 오늘날 동양문고와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들의 구장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전하는 단일 컬렉션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손꼽힌다. 그리고 규모는 물론 질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를 받아왔다. 이들 컬렉션 소장 자료를 대상으로 한 학술 논문이 수십 편 제출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들은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자료를 구입하는 한편으로, 구하기 어려운 자료에 대해서는 해당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다른 학자로부터 빌려와 복본을 만드는 방법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채워나갔다.
<사진 1-1> 표제면 / <사진 1-2> 표지 뒷면 필사기 / <사진 1-3> 뒷표지 앞면 필사기
<사진 1> 『鏤版考』 / 버클리대 소장본(소장처 청구기호: 25.2)
위의 자료는 목록집 확보를 위해 아사미가 보여준 노력의 일단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자료이다.

<사진 1-1>은 『누판고』의 표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 대신 일본식 장정법인 사침안정법(四針眼訂法)을 사용하였다. 이 책은 본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 1863~1957]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로서, 상・중・하 3책 가운데 중책만 남은 영본(零本)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진 1-2>에 보이는 필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본이라 애석하다. 훗날 상책과 하책을 구해 완질본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명치 45년(1912) 4월 21일. 도쿠토미 소호.
사실 이 필사기는 아사미가 도쿠토미 소장 『누판고』를 빌어 전사할 때 도쿠토미가 책을 구했을 때 적어둔 장서기를 그대로 다시 한 번 옮겨둔 것이다. 또한 권수제면에는 본래 도쿠토미 소장본에 찍혀 있었을 장서인 ‘德富氏印’과 ‘靑山仙客’까지도 그대로 따라 그려 두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록 전사본이라고 하더라도 가급적 원본의 형태에 가깝게 남기고 싶었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든 필사를 마친 후에 자신의 필사기를 <사진 1-3>과 같이 남겨 두었다.
도쿠토미 소호씨가 소장한 영본을 빌려서 베껴 쓰는 작업을 마쳤다. 대정 3년(1914) 2월 17일 경성 梨洞의 관사에서. 아사미 린타로가 기록한다.
일본의 괴벨스라 불리는 도쿠토미 소호는 1910년에 데라우치의 요청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와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監督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1912년에 『누판고』 영본을 입수하여 소장하게 되었고, 이후 1914년에 아사미가 그의 소장본을 빌어 복사본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은 일본인 장서가들이 한국 고문헌 컬렉션을 만들어갈 때 책의 구입을 넘어 서로가 가진 장서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자료의 경우 필사를 통해 소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필사기 가운데에는 단순히 자료의 수집 경위만을 적는 정도를 넘어, 자료에 대한 학술적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 2-1> 표제면 / <사진 2-2> 본문(교정) / <사진 1-3> 권말 필사기
<사진 2> 『西序書目草本』 / 버클리대 소장본(소장처 청구기호: 25.3)
위의 자료는 버클리대학교 아사미 컬렉션에 있는 『서서서목초본』이다. 이 자료는 아사미가 오카다 노부토시[岡田信利, 1857~1932]의 소장본을 빌려 필사의 방법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서 <사진 2-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펴본 『누판고』와 마찬가지로 일본식 선장법인 사침안정법으로 장정을 하였다. 또한 <사진 2-2>에서 보듯, 오카다 소장 원본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후 수정할 내용이나 덧붙일 내용, 권차의 오류 등을 붉은 색으로 부기해 두었다. 이를 통해 아사미가 전사(轉寫) 작업과 병행하여 교감 작업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사진 2-3>에 보이는 두 건의 필사기이다.
① 이상 오카다 노부토시씨의 소장본을 빌려 보고 對校를 마쳤다. 대정 원년(1912) 9월 9일에 남산 아래 정씨 집안의 관사에서. 아사미 린타로.
② 동경의 가나자와 박사 소장본 가운데 이 책이 있는데 선본이다. 책에 수록된 내용이 건륭 경술년(1790)까지이니 규장총목과의 거리는 10여년 후에 지은 것이다. 분류에 작은 차이가 있으며 본서 초본에 실린 차례 또한 같지 않다. 마땅히 가나자와 소장본을 정본으로 삼아야 한다. 아사미가 다시 적는다.
이 자료에는 두 건의 필사기가 실려 있다. 하나는 1912년 9월 9일에 오카다 소장본을 빌려다 베껴 쓰고 교정까지 완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한 건의 필사기는 異本의 존재 유무, 해당 자료에 대한 가치 판단이 함께 들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필사기에서 언급한 가나자와 박사는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郎, 1872~1967]를 가리킨다. 가나자와는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우리나라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서서서목첨록』을 입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사미는 1906년에 입국하였으므로, 가나자와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갔던 자료를 자신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보았던 듯하다. 아사미는 오카다본을 베끼면서 자신이 일전에 보았던 가나자와본을 언급하고 그 차이와 수준의 고하까지 함께 언급하였다.

또한 필사기는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장서가들의 학술적 교유와 한국 고문헌 수집열의 일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경대 오구라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재산루서목(在山樓書目)』은 그런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진 3-1> 표제면 / <사진 3-2> 권수제면 / <사진 3-3> 권말 필사기
<사진 3> 『在山樓書目』 / 동경대 오구라문고 소장본(소장처 청구기호: L174667)
위의 자료는 현재 동경대 오구라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재산루’는 마에마 쿄사쿠의 당호(堂號)이므로, 『재산루서목』은 본래 그의 장서 목록을 가리킨다.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는 마에마의 장서목록을 빌려서 복제본을 만들고서 “이상은 마에마 쿄사쿠씨의 장서목록을 베껴 적은 것이다. 경성에서. 명치 44년(1911) 7월 15일.”이라는 필사기를 남겨두었다.

그런데 오구라가 총독부 편수서기 직책으로 조선에 건너온 것이 1911년 6월이고, 마에마가 사직을 하고 돌아간 시기가 1911년 3월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자료의 작성에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간 마에마의 자료를 빌려와 경성에 머물던 시기에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마에마의 장서목록이 이미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해 필사되었고, 오구라가 그 가운데 하나를 빌려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간에 당시에 일본인 장서가들이 자신이 모은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필요에 따라 일본인 수집가들과 공유하는 활동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서기와 필사기의 가치
그간 장서기와 필사기는 해당 자료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원 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해외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고문헌들을 점차 컬렉션(또는 소장처) 중심으로 확인해나갈 수 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소장자가 직접 남긴 장서기와 필사기를 정밀하게 조사한다면 이전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던 중요한 정보들을 새롭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주요 장서가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의 우리나라 고문헌 이해 수준을 함께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국인들의 우리나라 고문헌 자료 수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의 서적 유통 양상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필사기와 장서기를 통해 자료의 원소장자로 언급되는 인물들을 조사함으로써 지금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장서가들의 존재와 활동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백진우, 「20세기초 일본인 장서가의 필사기와 장서기 연구-마에마 쿄사쿠와 아사미 린타로의 장서를 중심으로-」, 『대동한문학』 49집, 대동한문학회, 2016.

백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