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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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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인이란 무엇인가?
장서인(藏書印)은 책을 소장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임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따라서 장서인은 해당 전적의 진위 여부나 제작 시기를 감정할 때에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며, 장서인을 통해 자료의 수득 경위와 유전(流轉)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인장을 직접 새겨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임란 이후의 일이다. 이와 함께 장서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장서인은 책의 소장자가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찍은 인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인들이 직접 인장을 새기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인장을 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구를 새긴 한장(閑章)의 사용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낭선군장(朗善君章) | 동계선생문집(桐溪先生文集) | 일본 동양문고
인장의 용도도 다양해졌다. 그중에서도 장서인은 문인들에겐 가장 중요한 용도였고, 자신만의 멋을 부린 인장들을 사용했다. 또한 당파에 따라 그 각법도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장서인은 한 개인의 장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이 아니라, 한 시대 전각예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특히 장서인을 통해 한 시대 인장 문화의 일단을 살필 수도 있지만, 서적의 유통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청송심씨연고당도적(靑松沈氏淵古堂圖籍) | 정화선존(精華選存) | 일본 동양문고
장서인의 활용
1) 장서의 재구

장서인의 확인을 통해 우리는 먼저 서적의 소장자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한 개인의 장서를 재구할 수 있게 된다. 목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장서인을 통해 한 개인의 장서목록을 만들 수 있고, 장서목록이 남아 있는 경우라도 장서목록에 실린 서적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낭선군 이우나 심의평의 경우 손꼽을만한 조선의 장서가였지만 그들의 장서목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부이지만 이러한 장서인의 확인을 통해 이들의 장서목록을 만들 수 있다면 개인의 독서편력은 물론, 한 시대의 장서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동양문고에 소장된 조선본 구장자의 여러 장서들이 국내외에서 자주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 활용 가치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2) 고증적 활용

장서인의 확인은 장서인이 찍힌 책에 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필사본의 경우 장서인의 유무는 그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1) 고본(稿本)과 전사본(轉寫本)의 구분

동양문고본 『삼산가숙사물서몽(三山家塾事物筮蒙)』은 남형수(南衡秀, 1727~?)의 저작이다. 오사란지(烏絲欄紙)에 해정하게 필사되었으며 본문에는 청홍(靑紅)의 비점(批點)이 가득하고 서미(書眉)에도 주석이 가득하여 저자의 고본(稿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 표시 위쪽과 서미 부분에 홍이섭(洪履燮, 1778~?)의 인장 4과가 찍혀 있다. 이는 저자의 수고본이 아닌 홍이섭의 수택본임을 알려준다.

<山澤之臞>

<唐城>

<洪履燮印>

<綏卿>

『三山家塾事物筮蒙』

동양문고본『지명당시고(知命堂詩稿)』는 저자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고, 국내외에 이본이 없는 유일본이다. 끝에는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1716년에 쓴 묘표(墓表)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묘표에 따르면 김성대(金盛大, 1651~1710)는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호연(浩然)이다. 생부는 김수일(金壽一)인데, 김수익(金壽翼)에게 입계(入系)되었으며, 음직으로 인제 현감을 지냈다. 한편 이 책의 표제는 ‘만록(漫錄)’인데, 작은 글씨로 ‘지명당시고(知命堂詩稿)’라 하였다. 또한 표지 우측 상단에는 인재공문초(麟蹄公文抄)라 써놓았다. 이 책이 김성대의 시집인 『지명당시고』의 수고본(手稿本)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첫 장 <호연(浩然)>이란 장서인이 남아 있다. 바로 김성대의 자를 새긴 인장이다. 이 책이 김성대가의 시집 『지명당시고』의 수고본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저자의 수고본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확정시켜준 것은 바로 그의 장서인이었던 것이다.
(2) 전용 원고지의 확인

박흥수(朴興壽, 1806~?)와 박제홍(朴齊弘, 1827~?)은 부자지간이다. 두 사람 모두 필사본을 남겼는데 ‘십수매화서옥(十樹梅花書屋)’이라 새겨진 전용원고지를 사용했다. 19세기 필사본의 큰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서재이름을 새겨넣은 자신만의 전용원고지를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고지의 주인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십수매화서옥’도 그 중의 하나인데, 박흥수 부자의 장서인을 통해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3) 장서인의 모각(模刻) 사례 확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인장은 일찍부터 많은 문사들이 모각하여 사용했다.『수산집초(修山集抄)』에 보이는 <녹갑천하(鹿甲天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침사한조(沈思翰藻)>는 모두 김정희가 사용한 인장이지만, 김정희의 인장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모각(模刻)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평산세가(平山世家)>란 인장이 함께 있어 다른 사람의 인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다음 장서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허목(許穆)의 장서인을 모각한 것인데, 허목의 것과는 차이가 있어 모각임을 알 수 있다. 장서인의 판독과 이용에 있어서 유의해야 하는 사례 중의 하나다.
이러한 점은 다음 장서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허목(許穆)의 장서인을 모각한 것인데, 허목의 것과는 차이가 있어 모각임을 알 수 있다. 장서인의 판독과 이용에 있어서 유의해야 하는 사례 중의 하나다.
참고문헌
박철상, 「日本 東洋文庫 소장 朝鮮本 古書의 藏書印」, 해외한국학자료센터 학술대회(2014년 2월 27일) 발표문 중에서
박철상,「미수전과 낭선군의 장서인」, 『문헌과해석』 19호, 2002년 여름.
백진우,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서에 대하여」, 『열상고전연구』 3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2 중에서 中善寺 愼,「東洋文庫所藏本に押捺された藏書印について(一)~朝鮮本に押捺された朝鮮の藏書家の藏書印~」,『東洋文庫書報』 第35号, 東京, 東洋文庫, 2004.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