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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장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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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官印)
(1) 내사인(內賜印)

내사인(內賜印)은 임금이 책을 반사(頒賜)할 때 찍는 인장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장서인은 아니지만, 내사기(內賜記)가 함께 있는 경우 장서인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한다. 특히 임란 이후의 내사본과 달리 임란 이전의 내사본은 그 전본이 드물다.

동양문고에는 내사본 『이단변정(異端辨正)』(乙亥字)과 『예문류취(藝文類聚)』(甲辰字)가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두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내사인과 내사기가 남아 있다. 『이단변정』은 1551년 6월에 안위(安瑋, 1491~1563)에게 내사한 것이고, 『예문류취』는 1552년에 박충원(朴忠元, 1507~1581)에게 내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명종 6년 3월 27일)에는 『이단변정』을 중외(中外)에 인포(印布)하라는 전교가 있는데, 안위에게 내사한 책은 석 달 뒤 인쇄하여 반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예문류취』에는 임난 당시에 약탈된 조선본 고서에 찍혀 있는 <양안원장서(養安院藏書)> 인장이 찍혀 있어 이 책이 임란 때 약탈된 책임을 방증하고 있다.
동양문고 소장 내사본 『이단변정(異端辨正)』
(2) 승문원(承文院)의 인장

승문원(承文院)은 조선시대에 외교문서와 이문(吏文)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서를 가리킨다. 『이문(吏文)』은 임란이전에 간행된 을해자 복각본인데, 여기에 찍혀있는 <승문원(承文院)>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장서인이다. 더욱이 임란 이전 관청의 장서인이 남아있는 책은 그 전본이 아주 드물다. <승문원>의 장서인이 확인된 것도 동양문고 소장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동양문고 소장 『이문(吏文)』
사인(私印)
(1)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의 장서인

이우는 자가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이며, 선조의 12번째 아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1604~1651)의 큰아들로 낭선군(朗善君)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어나 왕희지의 필법을 깊이 체득하였고, 수많은 서화를 수장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연경 사행을 통해 각종 금석문 자료 및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인장을 좋아하여 『군옥청완(群玉淸玩)』이란 인보(印譜)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수장했던 서적에는 이들 인장이 앞뒤로 찍혀있다. 그의 장서인이 찍힌 수택본은 국내외 공사(公私) 서가에 흩어져 있는데, 동양문고에서도 현재까지 12종이나 확인되었다. 그 서명을 들면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모재선생집(慕齋先生集)』,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 『인재유고(麟齋遺稿)』, 『보한집(補閑集)』, 『남창잡고(南窓雜稿)』, 『충암집(冲庵集)』, 『서화담선생집(徐花潭先生集)』, 『익재난고(益齋亂藁)』, 『동계선생문집(桐溪先生文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다.

이 중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제외한 서적에는 <석경(碩卿)>, <낭선군장(朗善君章)>, <목릉왕손호산택상(穆陵王孫壺山宅相)>, <인흥윤사문단외파(仁興胤嗣文端外派)> 등 4과의 장서인이 찍혀있다.
<목릉왕손호산택상(穆陵王孫壺山宅相)>은 ‘목릉(穆陵, 선조)의 왕손이며 호산(壺山)의 택상(宅相, 외손)’이란 의미이다. 호산은 여산(礪山)의 옛 지명인데 외가가 여산 송씨이므로 ‘호산의 외손’이라 한 것이다. <인흥윤사문단외파(仁興胤嗣文端外派)>는 낭선군이 ‘인흥군(仁興君)의 맏아들이고 문단공(文端公)의 외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낭선군이 인흥군의 장자이고 이암(頤菴) 송인(宋寅, 1516~1584)의 외손이기 때문에 이런 인장을 사용하였다. 문단은 송인의 시호이다. 낭선군의 인장 중에는 자신이 왕손임을 나타내는 인장이 많은데, 이것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서적의 마지막 부분 여백에 종종 이 인장을 찍어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낭선군장(朗善君章)>, <석경보(碩卿父)>, <척연정장(滌硯亭藏)> 등이 찍혀 있다. ‘척연정(滌硯亭)’은 ‘벼루를 씻는 정자’란 뜻인데, 글씨를 좋아했던 낭선군과 잘 어울리는 정자 이름이다. 이 인장이 장서인으로 사용된 예는 잘 보이지 않는다.
(2) 심의평(沈宜平, 1836〜1919)의 장서인

심의평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승여(昇如), 호는 석란(石蘭), 승재(昇齋), 연고당(淵古堂) 등이다. 초명은 노일(魯日)인데 의평으로 개명하였다. 심의평은 일찍이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문하에 출입했지만 크게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은 음직으로 군수를 지냈다. 황현(黃玹, 1855〜1910)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전군수 심의평은 평생 모은 책이 1만 4천권이나 되었지만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장서가로서 이름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본의 수집과 제작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수장했던 상당수의 필사본은 판심 하단에 ‘옥로산방(玉露山房)’이란 글자를 새긴 오사란(烏絲欄)의 전용 원고지에 직접 필사한 것이다. 또한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던 심의평은 추사가 사용했던 인장을 모각(模刻)하여 자신의 장서인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저서로는 1906년경에 간행된 『전운산려집(全韻散廬集)』과 필사본으로 전하는 『석란실신정예원삼매(石蘭室新訂藝苑三昧)』, 『하소정전휘주(夏小正傳彙注)』 등이 있다. 특히 심의평은 북학파 문사들의 저술을 직접 필사하여 소장한 경우가 많았다
동양문고에는 『개자원도장회찬(芥子園圖章會纂)』과 『정화선존(精華選存)』 등 2종이 소장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장서마다 많은 인장을 찍었는데, 『개자원도장회찬』에는 9과, 『정화선존』에는 4과가 확인된다. 사용된 인장도 성명인(姓名印), 자호인(字號印), 재관인(齋館印), 수장인(收藏印), 한장(閑章) 등 다양하다. <고향서옥(古香書屋)>이란 인장은 심의평 이전에도 김유근(金逌根), 김명희(金命喜) 등이 상용한 적이 있지만, 심의평도 인장에 새겨 자신이 소장한 여러 책에 두루 찍었다.
(3) 김세균(金世均, 1812~1879)의 장서인

김세균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익(公翼), 호는 만재(晩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34년 진사시에 합격, 184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성, 대사헌,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거쳤으며 1873년 왕명으로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속편을 편집하였고, 저서로는 『완염통고(琬琰通考)』가 있다. 김세균의 장서도 일찍이 흩어져 국내외 공사의 서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동양문고에서도 『동전고(東銓攷)』,『문헌지장(文獻指掌)』,『동경잡기(東京雜記)』,『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송계집(松溪集)』 등이 확인된다.
참고문헌
박철상, 「日本 東洋文庫 소장 朝鮮本 古書의 藏書印」, 해외한국학자료센터 학술대회(2014년 2월 27일) 발표문 중에서
박철상,「미수전과 낭선군의 장서인」, 『문헌과해석』 19호, 2002년 여름.
백진우,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서에 대하여」, 『열상고전연구』 3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2 중에서 中善寺 愼,「東洋文庫所藏本に押捺された藏書印について(一)~朝鮮本に押捺された朝鮮の藏書家の藏書印~」,『東洋文庫書報』 第35号, 東京, 東洋文庫, 2004.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