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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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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고지도(혹은 옛지도)는 근대적 제작방식을 채택하지 않은 전통시대 지도를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측량에 의해 지도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900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 시점이 우리나라 근대지도의 상한선이자, 고지도의 하한선이다. 고지도는 일반적으로 대상이 되는 지역의 범주에 따라 군현지도, 도별지도, 조선전도, 동아시아지도, 세계지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고지도들은 일정한 형식과 체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완벽하게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이밖에 편찬주체에 따라 관찬지도와 사찬지도로 구분하기도 하고, 제작기법에 따라 기호식지도와 회화식 지도로 구분하기도 한다. 관찬지도는 국가가 편찬한 지도이며, 사찬지도는 개인이 만든 지도이다. 기호식 지도는 축척과 윤곽을 중시한 지도이며, 회화식 지도는 회화적인 표현과 구도를 가진 지도이다.
정상기, 신경준의 지도
제작기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에서 만든 지도 역시 회화식 지도와 기호식 지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회화식 지도가 미적 감각이나 풍수지리적 명당관을 표현하는 데 치중한 그림이라면, 기호식 지도는 축척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각종 기호를 사용한 도면을 말한다. 기호식 지도 중에는 모눈 형식을 채택한 것들이 있었다(방안좌표지도).

방안좌표지도를 제작한 역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물로 남아 있는 것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영조 때 것들이다. 비변사는 1747년(영조 23)~1750년(영조 26) 경부터 대축척의 도별 군현 지도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지도집 안에 들어 있는 군현 지도들의 도면 바탕에는 모두 1리 눈금의 모눈이 그려져 있다. 이 군현 지도들의 축척은 1:64,000~1:53000 정도에 해당한다.

영조 자신도 지도와 지리지에 대한 관심이 비상했다. 1757년(영조 33) 영조는 백리척(百里尺)이라는 새로운 자를 사용한 조선전도 한 폭을 보게 되었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정항령(鄭恒齡, 1700~?)이 그린 8도의 도별 지도도 있다고 보고했다. 이 지도 역시 백리척을 사용해 그린 것이었다. 영조는 이 지도들을 베껴 그리고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게 했다. ‘동국지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조선 전도와 도별 지도를 처음 그린 사람은 정항령의 아버지인 정상기(鄭尙驥, 1678~1752)였다.

정상기는 서울에서 출발해 전국 300여 개의 군현에 이르는 거리에 관한 지리지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직선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그는 평지에 대해서 100리를 1척으로 하면서도, 도로 굴곡이 심한 지역은 120~130리를 1척으로 계산했다. 그는 직선거리를 실측하지 않고서도 실측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지도로 인해 한반도의 윤곽은 다시 한차례 크게 개선되었다. 정상기의 아들 정항령, 손자 정원림 등은 정상기의 지도를 수정 보완했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와 정후조(鄭厚祚) 등 해주 정씨들도 정상기의 지도를 수정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특히 해주 정씨들은 정상기의 원본을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조선 지도학에 많은 성과들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군현 지도-도별 지도-전도를 하나의 일관된 원칙에 따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영조의 왕명을 받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군현 지도를 만들면서 도면상에서 방안 간격을 임의로 조절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경우 군현 지도의 모눈 간격은 20리가 된다. 현재 20리 모눈 좌표를 채택한 군현집들이 남아 전하는 것은 신경준 지도가 남긴 흔적이다.
동양문고 소장 『근구팔폭(槿邱八幅)』
정상기, 신경준에 기원하는 사본들
「근구팔폭」(동양문고)은 정상기 동국지도의 원도 계열에 속하는 사본이다. 지명이 가지는 시간적 속성을 근거로 해서 보면, 대체로 1800~1823년 사이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줄기와 물줄기, 대로, 사잇길과 고갯길, 산성 봉수 등 각종 자연지리적 인문지리적 정보는 원도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8장이 지도가 함북 함남 평안 황해 기호 강원 영남 호남 등으로 나뉘어 있는 것, 함북 지도에 백리척이 그려져 있는 것도 일반적인 원도 계열의 사본과 동일하다. 대개의 원도 계열 사본들이 기호 영남 호남 강원 황해 평안 함남 함북의 순으로 지도를 편집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이 사본은 도별 지도의 편집 순서가 다를 뿐이다.

「좌해지도」(동양문고)는 정후조의 수정본을 따르는 도별지도첩의 사본이다. 지명은 19세기 초의 시간값을 반영하고 있다. 강원 평안 황해 경상 충청 함남 함북 경기 등 총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사자는 경기와 충청을 9폭으로 된 지도집을 만들었으나, 현재 전라도가 빠진 채 8폭이 남은 상태다. 이 사본의 윤곽은 기본적으로 정후조의 수정본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같은 계통의 다른 사본들에 비해 크기가 작고, 그 때문인지 군현의 경계, 면이름, 창고이름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정후조 수정본 계열의 사본들이 다양하게 형태로 제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강역전도」(동양문고)는 20리 방안 군현지도집으로, 지명은 1776년 이후 1800년 이전의 시간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1책에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군현지도들이, 2책에는 강원 황해 평안 함경의 군현지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3책은 이들 군현들에 관한 통계자료를 실은 것이다. 지도의 내용만으로 보면,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동여지도(보물 제 1593호)와 같다. 이 지도들은 128개의 가로선, 76개의 세로 선으로 이루어진 좌표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남북방향으로 바다의 폭을 빼고 계산하면, 신경준의 좌표체계와 유사하다.
김정호의 지도
김정호(金正浩, ?~1866)가 순조 34년(1834)에 펴낸 「청구도(靑邱圖)」에는 정조 때의 지도에 관한 설명이 있다. 정조 때 여러 군현에 명하여 그 지방을 그려 올리게 함으로써 비로소 경위선표, 즉 모눈을 사용한 도지도와 군현 지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도지도는 팔도로 나누고 군현 지도는 군현별로 나누어 제작하였으나, 어느 경우든 한정된 크기의 종이 안에 그려 넣은 것들이었다. 김정호는 자신이 본 지도들을 모두 정조 때의 성과로 여겼음 직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영조 때 신경준의 성과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김정호에 따르면, 제한된 종이 크기로 인해 자세한 도내 행정구역과 그 경계를 모두 그릴 수 없는 도지도나, 그 영역의 크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괄적으로 각각 한 면에 그려 넣은 군현 지도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모눈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리에 의해 같은 축척으로 제작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이 지도들은 축척의 정확도를 기하기 위해 사용한 모눈이 산줄기와 물줄기를 가로지르며 끊어놓으니 더 큰 문제다.

김정호는 ‘대형 조선 전도를 사용하여 층과 판을 나누고 고기비늘처럼 잇대어’ 지도책을 만들면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청구도」가 탄생했다. 「청구도」에 대해 자부심을 숨기지 않던 김정호는 이렇게 말했다. “지리지에 실려 있는 내용과 옛 사람들이 만든 지도 역시 이 「청구도」를 가지고 검증할 수 있으리라.” 김정호는 「청구도」를 통해 신경준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1861년(철종 12) 김정호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라는 또 하나의 지도를 완성했다. 조선 후기 지도들에서 이어져 온 모눈 도법의 원리와 기호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전체 길이 6.7m에 달하는 22책의 대축척 조선 전도를 완성했던 것이다(신유본). 그는 자신이 새겨낸 이 목판지도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864년 그는 수정 보완된 판본을 완성했다(갑자본).
동양문고 소장 『동여도(東輿圖)』
김정호에 기원하는 사본들
「동여도」(동양문고)는 청구도의 초기 유형에 해당하는 사본 중 하나다. 상하 2책으로, 전국을 동서 70리, 남북 100리 간격으로 나누어 전국을 그린 것이다. 1책의 첫 면에는 경위선표목록, 팔도분표, 주현총도목록, 제표목록 등이 적혀 있다. 경위선표목록은 지도에 적용된 좌표 체계에 관한 설명이다. 팔도분표는 남북 28층, 동서 22편의 번호가 쓰여 있는 조선전도를 가리킨다. 주현총도목록에는 도별로 소속 군현 이름이, 제표목록에는 기호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사용자는 이 내용을 파악한 뒤 1책과 2책을 연결하면 원하는 지역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책자는 표지와 판심 부분에 모두 ‘동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청구도 유형의 ‘동여도’에 관한 정보는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이라는 인물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한장석은 어린 시절부터 오창선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한장석이 기억하는 오창선은 총명한 친구, 경세에 뜻이 있어 다양한 책을 섭렵하던 친구였다. 그런 오창선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동국지도』를 편찬했다는 것이다. 한장석은 이 지도의 간략함과 정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창선은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10여 년 뒤 한장석이 용강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박규수의 제자이자 오창선의 친구인 안기수를 만나게 되었다. 한장석과 안기수 두 사람 모두 요절한 오창선의 친구이니 자연스럽게 오창선을 화제로 올리게 되었다. 안기수는 오창선과 박규수가 만든 지도의 부본(副本)이 김선근(金善根)에게 있다는 사실을 한장석에게 흘렸다. 김선근은 황강(黃岡)의 지방관으로 재임 중이었고, 황강은 한장석이 부임해 있던 용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장석은 김선근에게 이 지도를 빌려다가 안기수에게 부탁해 또 하나의 사본을 만들었다.

한장석이 지은 ‘동여도의 서문’이라는 글에 따르면, 오창선과 박규수가 만든 지도는 10리 방안(方眼)을 채택한 전국지도였다. 방안(方眼)은 모눈을 말한다. 지도책은 2권의 두루마리 형태인데, 각 군현별 경계와 넓이가 색깔로 구분되어 있었다. 군현별 지도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용자는 상권과 하권을 펼친 뒤, 연결 부분을 맞추어가며 보아야 하는데, 각 권에 ‘표목(標目)’, 즉 색인이 있어서 찾고자 하는 해당 부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다. 「대동여지도」가 제작되고 있던 그 시점에서도 한편에서 청구도 유형의 지도들이 ‘동여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버클리대학에 한질, 동양문고에 6질이 소장되어 있다. 버클리대학 아사미 문고본은 1861년본(신유본) 수정본들 가운데 거의 마지막 단계의 사본에 해당한다. 동양문고에는 1861년본(신유본)과 1864년본(갑자본)이 모두 소장되어 있는데, 22첩으로 된 것뿐만 아니라 18첩, 20첩, 24첩 등으로 된 것들도 있다.

「대조선국전도」(버클리 소장)는 대조선국전도, 한양경성도, 경성부근지도, 팔도지도 등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도책이다. 지명은 19세기말~20세기 초의 시간값을 반영하고 있다. 도엽의 우측 상단에 방위표가 삽입되어 있고 우모식 표현기법을 채택하고 있어서 전통지도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한양경성도와 경성부근지도는 대동여지도의 도성도와 경조오부도의 윤곽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대동여지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천리대 소장 『동여도』의 한장석 서문
버클리대학 및 동양문고 소장 고지도의 사료적 가치
1925년, 최남선은 동아일보의 지면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 지도가 있어온 역사가 오래이며 의미 있는 발달이 있어 왔다.”(동아일보 1925년 10월 8일, 古山子를 懷함(上)-드러나가는 大潛龍)-) 최남선은 이 글에서 조선은 유사 이래 지도학이 특별히 발전해온 나라이며, 모든 조선지도학의 업적들은 결국 「대동여지도」로 집대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최남선과 국학 분야에서 쌍벽을 이루던 정인보도 다양한 지도와 사료를 인용해가면서 조선의 지도학이 정상기 신경준 등을 거쳐 김정호로 이어질 수 있었음을 밝혔다. 버클리대학 및 동양문고에는 최남선과 정인보가 강조해 마지않던 그 업적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본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지도학발달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토가 필요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