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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이유태(李維泰) 납속첩(納粟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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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영조 51)에 이유태(李維泰)란 인물이 받은 四品以上告身 1건, 이유태의 妻가 받은 堂上官妻告身 1건, 祖妣, 曾祖妣가 받은 追贈敎旨 2건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納粟의 대가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75년(영조 51)에 이유태(李維泰)란 인물이 받은 四品以上告身 1건, 이유태의 妻가 받은 堂上官妻告身 1건, 祖妣, 曾祖妣가 받은 追贈敎旨 2건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納粟의 대가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실제 문서의 발급 원리를 보면 다음가 같다.
1775년 이유태(李維泰) 고신(告身)
이유태(李維泰)가 四品以上告身에서 제수된 직함은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이다. 龍驤衛 副護軍은 조선전기에 설치된 五衛에 소속된 軍職이다. 관직이 西班職이기 때문에 관계 역시 서반의 정3품 당상에 해당하는 관계인 折衝將軍을 받은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五衛의 兵制가 모두 파해지고, 단지 官名만 남아있는 상태로, 五衛將과 部將이 分番入直하는 것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五衛의 관직인 護軍, 司直, 司果, 司正, 司猛, 司勇 등은 각색 관원이 겸대하게 했고 실무는 없으나 녹봉만을 지급하는 原祿遞兒職으로 활용했다.
[兩銓便考] 東銓 處置條에 "삼사나 춘방의 관원이 순조롭게 체직[順遞]되면 서반직으로 보내어 군직을 준다.(당하의 경연관이 실직을 체직당하면 또한 군직을 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책 西銓 軍職條에 "文蔭武 당상 이상의 관원 및 삼사, 춘방의 관원이 실직을 체직당하면 서반직으로 보내어 군직을 준다."라고 하고 있고, 오위의 군직 가운데 副護軍은 정3품 당상 이상의 관원에게 주는 것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조선후기에 五衛의 군직은 현직 관원이 관직을 이동하는 사이에 생기는 공백기간에 녹봉을 지급하여, 관료예비군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나머지 3건의 문서는 모두 이유태가 嘉善大夫(종2품)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으로써, 부수적으로 발급된 임명장이다. 이유태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을 때 부인은 생존해 있었기에 堂上官妻告身을 받았고, 祖母와 曾祖母는 이미 세상을 떠난 신분에서 추증을 받았다.
『經國大典』 吏典 外命婦條에는 '封爵은 夫의 職을 따른다.'라고 되어 있고, 禮典에는 堂下官과 堂上官 妻에게 외명부 봉작을 부여하는 告身의 서식이 별도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堂下官의 처에게 봉작을 부여하기 위한 고신은 발급되지 않았고, 실제 고신은 堂上官의 妻에게만 발급되었다.
조선시대 추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문무관 종2품 이상의 실직을 제수 받은 자의 三代, 즉 考, 妣, 祖考, 祖妣, 曾祖考, 曾祖妣)였다. 다만 추증을 받은 관직이나 외명부봉작의 품계는 考, 妣의 경우 같은 등급이었고, 祖考, 祖妣는 한 단계 아래, 曾祖考, 曾祖妣는 두 단계 아래의 등급을 받았다. 祖妣인 朴氏가 정3품 당상인 淑夫人을, 曾祖妣인 朴氏가 정3품 당하인 淑人을 받은 것은 이런 규례에 따른 것이다. 李維泰의 考, 妣, 祖考, 曾祖考 역시 追贈敎旨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追贈敎旨에는 堂上官妻告身과 마찬가지로, 추증의 원인을 제공한 관직자와 그 관직, 또 그 根因者와 추증을 받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표시되어야 했다. 이때 기재순서는 '추증 근인자의 관직과 성명'+'추증자 와의 관계'를 기록한 뒤 '추증 받는 자의 관계와 관직'을 기록하는 순이다. 이때 추증을 받는 자의 성명과 추증된 관계 관직의 사이에는 '贈'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贈'은 죽은 자를 따라서 높인다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곧 임명장에서 '贈'자가 쓰였다면 반드시 죽은 사람에게 내린 것이 된다.
한편, 4건의 문서 모두 발급된 月과 日도 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보인 施命之寶의 답인 상태를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기울어져 있다. 이는 대량에 문서를 한 번에 생산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해 『承政院日記』의 기사에는 실려 있는 政目에는 李維泰를 관직에 제수한 사항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본 告身 및 追贈敎旨는 모두 納粟의 대가로 받은 納粟帖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貞夫人(정,종 2품)의 봉작을 받고 있는 李維泰의 처 朴氏의 이전 봉작이 孺人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孺人은 정,종9품 관원의 妻 또는 관직이 없는 자의 아내를 관습적으로 높여 부르는 칭호였다. 따라서 李維泰는 1775년 어느 시기에 納粟을 하여 두 차례에 걸쳐 折衝將軍과 嘉善大夫에 해당하는 官職이 적혀 있는 納粟帖을 받은 것이고, 嘉善大夫를 받았을 때는 부인을 포함한 3대의 추증교지를 함께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775년 이유태(李維泰) 고신(告身)

국왕(國王)

이유태(李維泰)

2

1775년 이유태(李維泰) 처(妻) 유인(孺人) 박씨(朴氏) 고신(告身)

국왕(國王)

박씨(朴氏)

3

1775년 이유태(李維泰) 조비(祖妣) 숙인(淑人) 박씨(朴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국왕(國王)

박씨(朴氏)

4

1775년 이유태(李維泰) 증조비(曾祖妣) 의인(宜仁) 박씨(朴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국왕(國王)

박씨(朴氏)

※ 참고문헌
유지영, 『朝鮮時代 任命文書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