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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1846년 조병현(趙秉鉉) 고신(告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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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현(趙秉鉉 1791-1849)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조만영(趙萬永), 조인영(趙寅永), 조병구(趙秉龜) 등과 함께 안동 김씨와 권력 투쟁을 한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839년(헌종 5)에 형조판서에 재직 중에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하여 신부 샤스탕,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부를 처형한 기해박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조만영(趙萬永), 조인영(趙寅永), 조병구(趙秉龜) 등과 함께 안동 김씨와 권력 투쟁을 한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839년(헌종 5)에 형조판서에 재직 중에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하여 신부 샤스탕,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부를 처형한 기해박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관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44년 조병현(趙秉鉉) 고신(告身)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司憲府 持平과 弘文館 校理를 거쳤다. 1827년에는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도 했다. 그 뒤 조만영(趙萬永)·조인영(趙寅永)·조병구(趙秉龜) 등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1832년 세자시강원의 겸보덕(兼輔德), 이듬해에는 공충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판서에 올랐다. 다음 해에는 다음 해 병조판서·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1840년에는 호조판서을 역임했고, 이 때 『동문휘고(同文彙考)』 편찬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하기도 했다.
본 일련 문서는 조병현(趙秉鉉)이 관직을 제수 받은 四品以上告身 2건이다. 1844년(헌종 10) 5월에는 平安道觀察使를, 1846(헌종 12) 8월에는 禮曹判書 재직 중에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제수받고 있다. 1844년의 평안도 관찰사 제수는 당시 발생한 과거 부정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인한 좌천성 인사였다. 이후 다시 병조판서 등의 관직에 올랐지만, 다시 안동김씨파의 정언 윤행복(尹行福), 대사헌 이목연(李穆淵) 등의 탄핵상소를 받아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나,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그 해 9월 사사되었다. 저서로 『성재집(成齋集)』이 있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844년 조병현(趙秉鉉) 고신(告身)

국왕(國王)

조병현(趙秉鉉)

2

1846년 조병현(趙秉鉉) 고신(告身)

국왕(國王)

조병현(趙秉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