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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1692년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 지역 토지매매 문서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총 4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문(明文)은 전답이나 노비 등 개인의 소유 재산을 거래할 때 내역을 정리해주는 문서이고, 함답(緘答)은 관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을 사람이 직접 출두하지 않고 서면(書面)으로 올리는 진술서를 말한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②1644년 상선(尙膳) 고(高)댁 호노(戶奴) 수남(守男)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③1692년 절충(折衝) 양시립(梁時立)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④1692년 답주(畓主)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 함답(緘答) 등 총 4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문(明文)은 전답이나 노비 등 개인의 소유 재산을 거래할 때 내역을 정리해주는 문서이고, 함답(緘答)은 관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을 사람이 직접 출두하지 않고 서면(書面)으로 올리는 진술서를 말한다.
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이 문서들에서 거래되는 토지는 모두 동십리 돌곶이에 소재하였다. 동십리는 조선후기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된 면(面)의 이름이었다. 동십리는 도성(都城)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서 지금의 우이천(牛耳川)과 중랑천(中浪川) 일대에 해당했다. 동십리에 속한 돌곶이는 조선 경종(景宗)의 능(陵)인 의릉(懿陵)이 있는 곳으로 천장산(天藏山) 인근 지역이었다. 동십리면은 양주목 읍치에서 70리나 떨어져 있어서 도성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 인해 동십리에는 궁방과 중앙각사의 토지가 많이 소재하였고, 지역민들은 각종 잡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관료나 도성(都城)에 거주하는 부자들도 도성 인접 지역인 이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서들은 왕실에서 근무하는 내시(內侍)들이 도성(都城) 인근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고 상속하는 정황을 보여준다. ①번 문서는 상전(上典) 최(崔)가 노(奴) 응천(應千)에게 토지를 팔아오라고 지시하면서 작성해준 패지(牌旨)이다. 패지에는 토지의 위치, 자호(字號), 면적, 사표(四標) 등이 표기되었다. ②번 문서는 석이가 상선(尙膳) 고(高)댁 노(奴) 수남(守男)에게 토지를 매매하고 작성해준 매매명문이다. 이 문서를 통해 해당 토지가 내시부 상선(尙膳) 고(高)에게 정은자(正銀子) 70냥에 매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③번 문서는 같은 토지가 약 5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매매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박헌(朴瀗)은 양조부 고(高)로부터 토지를 전해 받았고, 이를 다시 정은자(丁銀子) 70냥에 팔았다. 같은 은자(銀子) 70냥이지만 정은(正銀)에서 정은(丁銀)으로 순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전보다 토지매매 가격이 하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④번 문서는 답주(畓主)였던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이 토지를 매각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한성부 관아에 진술하는 내용이다. 함답에는 토지의 소유경위, 위치, 자호, 면적, 매매가격 등을 기재하였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토지매매 방식과 지불수단, 행정절차 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후사(後嗣)를 직접 가질 수 없었던 내시(內侍)들이 양자(養子)를 두고 재산을 상속해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상전(上典) 최(崔)
노(奴)응천(應千)
2
1644년 상선(尙膳) 고(高)댁 호노(戶奴) 수남(守男)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노(奴) 응천(應千)
노(奴)수남(守男)
3
1692년 절충(折衝) 양시립(梁時立)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박헌(朴瀗)
양시립(梁時立)
4
1692년 답주(畓主)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 함답(緘答)
박헌(朴瀗)
한성부(漢城府)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총 4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문(明文)은 전답이나 노비 등 개인의 소유 재산을 거래할 때 내역을 정리해주는 문서이고, 함답(緘答)은 관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을 사람이 직접 출두하지 않고 서면(書面)으로 올리는 진술서를 말한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②1644년 상선(尙膳) 고(高)댁 호노(戶奴) 수남(守男)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③1692년 절충(折衝) 양시립(梁時立)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④1692년 답주(畓主)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 함답(緘答) 등 총 4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문(明文)은 전답이나 노비 등 개인의 소유 재산을 거래할 때 내역을 정리해주는 문서이고, 함답(緘答)은 관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을 사람이 직접 출두하지 않고 서면(書面)으로 올리는 진술서를 말한다.
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이 문서들에서 거래되는 토지는 모두 동십리 돌곶이에 소재하였다. 동십리는 조선후기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된 면(面)의 이름이었다. 동십리는 도성(都城)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서 지금의 우이천(牛耳川)과 중랑천(中浪川) 일대에 해당했다. 동십리에 속한 돌곶이는 조선 경종(景宗)의 능(陵)인 의릉(懿陵)이 있는 곳으로 천장산(天藏山) 인근 지역이었다. 동십리면은 양주목 읍치에서 70리나 떨어져 있어서 도성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 인해 동십리에는 궁방과 중앙각사의 토지가 많이 소재하였고, 지역민들은 각종 잡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관료나 도성(都城)에 거주하는 부자들도 도성 인접 지역인 이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서들은 왕실에서 근무하는 내시(內侍)들이 도성(都城) 인근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고 상속하는 정황을 보여준다. ①번 문서는 상전(上典) 최(崔)가 노(奴) 응천(應千)에게 토지를 팔아오라고 지시하면서 작성해준 패지(牌旨)이다. 패지에는 토지의 위치, 자호(字號), 면적, 사표(四標) 등이 표기되었다. ②번 문서는 석이가 상선(尙膳) 고(高)댁 노(奴) 수남(守男)에게 토지를 매매하고 작성해준 매매명문이다. 이 문서를 통해 해당 토지가 내시부 상선(尙膳) 고(高)에게 정은자(正銀子) 70냥에 매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③번 문서는 같은 토지가 약 5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매매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박헌(朴瀗)은 양조부 고(高)로부터 토지를 전해 받았고, 이를 다시 정은자(丁銀子) 70냥에 팔았다. 같은 은자(銀子) 70냥이지만 정은(正銀)에서 정은(丁銀)으로 순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전보다 토지매매 가격이 하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④번 문서는 답주(畓主)였던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이 토지를 매각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한성부 관아에 진술하는 내용이다. 함답에는 토지의 소유경위, 위치, 자호, 면적, 매매가격 등을 기재하였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후반 토지매매 방식과 지불수단, 행정절차 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후사(後嗣)를 직접 가질 수 없었던 내시(內侍)들이 양자(養子)를 두고 재산을 상속해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순서 |
자료명 |
발급 |
수취 |
1 |
1644년 노(奴) 응천(應千) 패지(牌旨) |
상전(上典) 최(崔) |
노(奴)응천(應千) |
2 |
1644년 상선(尙膳) 고(高)댁 호노(戶奴) 수남(守男)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
노(奴) 응천(應千) |
노(奴)수남(守男) |
3 |
1692년 절충(折衝) 양시립(梁時立)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
박헌(朴瀗) |
양시립(梁時立) |
4 |
1692년 답주(畓主)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박헌(朴瀗) 함답(緘答) |
박헌(朴瀗) |
한성부(漢城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