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집중연구 > 고문서

1668년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 지역 토지매매 문서

가+ 가-

이 문서들은 18세기 중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668년 오승전색댁(吳承傳色宅) 노(奴) 석이(石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②1668년 노(奴) 석이(石伊)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등 총 2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반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668년 오승전색댁(吳承傳色宅) 노(奴) 석이(石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②1668년 노(奴) 석이(石伊)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등 총 2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1668년 오승전색댁(吳承傳色宅) 노(奴) 석이(石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이 문서들에서 거래되는 토지는 모두 동십리 돌곶이에 소재하였다. 동십리는 조선후기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된 면(面)의 이름이었다. 동십리는 도성(都城)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서 지금의 우이천(牛耳川)과 중랑천(中浪川) 일대에 해당했다. 동십리에 속한 돌곶이는 조선 경종(景宗)의 능(陵)인 의릉(懿陵)이 있는 곳으로 천장산(天藏山) 인근 지역이었다. 동십리면은 양주목 읍치에서 70리나 떨어져 있어서 도성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 인해 동십리에는 궁방과 중앙각사의 토지가 많이 소재하였고, 지역민들은 각종 잡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관료나 도성(都城)에 거주하는 부자들도 도성 인접 지역인 이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①번 문서는 오승전색댁(吳承傳色宅) 노(奴) 석이(石伊)가 이의발(李義發)에게 토지를 사면서 받은 매매명문이다. 명문에는 토지의 소유경위, 위치, 면적, 매매가격 등이 표기되었다. 석이는 답(畓) 2마지기를 정은자(正銀子) 8냥을 주고 매입하였다. ②번 문서는 토지를 구매한 석이가 한성부 관아에 입안(立案)을 요청한 소지(所志)이다. 이 문서들은 18세기 후반 토지매매 방식과 지불수단, 행정절차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668년 오승전색댁(吳承傳色宅) 노(奴) 석이(石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이의발(李義發) 

노(奴) 석이(石伊)

2

1668년 노(奴) 석이(石伊)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노(奴) 석이(石伊)

한성부(漢城府)